음식 에세이
날이 더우면 생각나는 여러 음식이 있다. 그런 음식은 음식이 지난 맛보다는 음식을 공유한 추억이 강한 맛으로 탄생하게 된다. 맛이라는 건 기억하지 못해야 한다. 왜냐하면 먹고 죽을 것 같은 맛이 계속 기억이 난다면 아마도 삶이 너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픔도 마찬가지다. 아픔이 기억이 나서는 안 된다. 그 아픔 때문에 고통받았던 상황이 아픔으로 다시 기억되는 것이지 아픔 자체는 기억이 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맛있게 먹은 음식을 떠올려보면 그 음식의 맛을 기억하기보다는 음식을 먹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렇게 날이 더우면 나는 비빔국수가 늘 떠올라, 해 먹게 된다. 나의 외가는 울진 불영계곡으로 산 좋고 물이 좋아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이 늘 외가에 가자고 떼를 썼고, 여자 친구와도 외가에 가곤 했다. 외가의 화장실은 야외에 있는, 머릿속에 생각하는 그 화장실이다.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갔을 때 이틀 동안 외가에 있었는데 이틀을 화장실에 가지 않더라. 여자는 정말 대단하다.
비빔국수의 추억은 더 어릴 때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이면 외가에서 보냈다. 앞에는 개울물이 흐르고 거기서 놀다가 배가 고파 외가에 들어오면 외할머니와 큰이모가 비빔국수를 만들어서 기다렸다가 내가 집으로 후다닥 들어오면 나를 먹였다. 외할머니는 국수를 소면으로 하지 않고 중면으로 했고 내가 맛있게 먹으면 얼굴에 주름이 더 많아졌다. 우리 똥강아지 잘 먹네. 나도 그런 애기애기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는 비빔국수가 맛있었는지 요즘도 비빔면을 해 먹어도 오이무침을 넣어서 먹는다. 거기에 물김치 국물을 조금 부어서 먹으면 여름에 더위가 저만큼 물러가는 맛이 난다. 개울가에 앉아서 비빔국수를 먹었던 추억 속에는 지금은 없는 내 외할머니, 큰 이모가 있었다. 여름의 중심부에서 시원한 바람을 솔솔 맞으며 오이에 국수를 말아먹으면 백석의 시 ‘국수’가 생각난다. 백석의 국수도 추억에 관여한다. 백석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 향토음식을 먹는 것을 즐겼다. 그러다 겨울의 추운 날 먹은 차가운 동치미국수 속에서 아마도 백석은 어머니의 손맛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 중에서
백석의 시는 따뜻하고 안온하다. 백석의 모든 시에는 사리진 함경도의 고운 한국어가 많이 나온다. 백석은 현재 20대 초반의 사람들이 더 많이 좋아한다. 백석의 르네상스다. 백석은 자야와의 애틋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어서 사랑에 목마른 청춘들이 더 백석을 애정 하는지도 모르겠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보면 안타깝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모습에 한 없이 응원하고 싶다. 두 사람의 소설 같은 이야기는 자야가 죽기 바로 전에 쓴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읽어 보면 된다. 에세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빠져드는 소설에 가깝다.
백석의 ‘국수’ 같은 시가 현재 이렇게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 속에 오감이 다 열려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인에 비해서 백석은 미각에 대해서 많이 서술했다. 그래서 음식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난다. 백석을 너무 사랑하여 그의 영혼이 되고 싶었던 시인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읽어보면 ‘가즈랑집’의 한 구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이 밖에 평야지대에서 나는 음식으로는 두부. 콩나물. 도야지비계. 찹쌀탁주. 무감자. 붕어곰. 메밀국수. 호박떡. 시래기국이 있고, 해안지역의 음식으로는 반디젓. 달재생선. 가재미 등을 들 수 있다.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호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시 '통영'에서도 많은 식감과 음식이 시에 등장한다. '조개도 울을 저녁'에서는, 지금보다 더 오래된 바닷가에는 밤이 되면 물이 다 빠지고 바위에 붙은 조개가 밖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달빛을 받으면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입을 쩍 벌린다. 그때 바닷가에는 수백 아니 수천의 조개가 입이 벌어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백석의 시를 읽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의 전후가 바뀌는 경험을 가져다준다.
백석보다 선배인 소월을 동경하던 백석은 1939년 [여성]이라는 잡지에 <소월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김억을 통해 들은 소월의 인상과 성격도 자세하게 묘사했다.
[소월은 키가 작고 몸집이 간얄피고 살결이 깜안작작하고 얼굴은 동글 납작한 편인데 이 얼굴의 특징으로는 견치가 유별히 송곳같이 뾰족하든 것과 다른 총명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눈빛이 샛별같이 빛났든 것입니다. 소월이 내심은 상냥하나 겉으로는 그리 사교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늘 체면을 찾고 얌전을 빼고 새침이를 떼고 말이 헌다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차디찬 샛님이었습니다.]
백석이 태어난 곳과 다니던 학교에는 우리가 한 번쯤 들어봤을 문인들이 있었다. 정주와 오산학교는 일찍부터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백석보다 20년 앞서 춘원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 신리에서 태어났다. 백석보다 열 살이 많은 오산학교 선배 김소월은 구성군에서 출생하고 곽산군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스승 김억은 곽산군 출신인데 오산학교에서 한동안 교편을 잡았다. 백석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나중에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한 소설가 선우휘는 정주읍 남산리가 고향이다. 창작과 비평을 이끌고 있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1938년 외가인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원래 친가는 정주군에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백석이 북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백석의 시를 한국에서는 금지하고 백석을 대체할 시인과 시를 찾은 것이 소월이었으나 오감을 열어 시를 적었던 백석의 시에는 미치지 못했다. 지금 이맘때 말아먹는 국수는 백석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냠냠, 이 더운 날 비빔국수를 말아먹으며 땀을 식히고, 백석의 시를 읽으며 오래전 백석을 만나러 가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