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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Dec 15. 2019

클라우스

영화를 소설로

아직도 건전지를 많이 사용하는 나는 예비 건전지를 구비해 놓아야 한다. 집의 벽시계와 탁상용 시계에 건전지가 들어간다. 또 무선 키보드에 건전지가 들어가고 아직 카세트 플레이어를 듣기 때문에 건전지를 구비해 놓는다. 예비 건전지를 구비해놓지 않으면 건전지는 겉으로 에헴, 하는 그런 무표정으로 일관해버리니까 건전지의 외모를 보고 수명이 다 되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러다 일축해 버리듯이 어느 날 문득 수명이 뚝 끊어진다.
 
외모의 변화가 전혀 없이 수명이 끊어지는 물품은 인간생활 전반에 건전지 이외에 또 몇이나 있을까. 마치 내 앞에서 언제나 같이 있을 것만 같은 강아지가 어느 날 늙어서 아프더니 죽어버리는 것처럼 건전지의 겉모습으로는 수명을 알 수 없다. 건전지가 필요 없는 물품이 많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건전지가 얼마나 더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건전지를 필요로 하는 물품이 있는 한 열심히 구비해두려 한다.
 
건전지는 그래서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물품일지도 모른다. 특별하다는 말은 하찮고 대단하지 않고 늘 옆에 있어서 특별하게 느껴진다. 일상의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건전지가 조촐한 감정의 변화를 안겨준 적이 있다. 건전지를 넣어서 라디오를 듣던 중학교 때 딱 하나뿐인 친구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둘 다 먼지 같은 존재로 둘 다 공부도 못했고, 음악을 나눠 듣고, 대의에 끼지 못하며 하굣길을 같이 걸었다. 그렇게 2년을 같이 다니다가 그 녀석이 이사를 갔다. 허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5개월 만에 연락이 와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으니 언제 나올지 모르니 계속 들어보라고 했다.
 
수업시간에도 창가에 앉아서 선생님 몰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하필 그때 건전지가 수명이 다 한 것이다. 예비 건전지도 사놓지 못하고 안절부절 이었다. 수업시간이라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가방을 뒤져보니 다 쓰고 버려야 했던 건전지가 뒹굴고 있어서 그걸 집어서 끼워 넣었더니 라디오가 나왔다.
 
그 녀석이 먼 곳에서 보낸 사연이 흘러나왔다. 사연은 별거 없었다. 잘 지내고 있고 오늘 하루는 뭘 했고 무엇을 먹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고 인종이 다르지만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를 듣는데 잘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런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그동안 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런 당연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제이가 덤덤하게 읽어가는 도중에 그만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넷플릭스의 ‘클라우스’를 보는데 그때의 기시감이 올라왔다. 영화 속 마르구는 인종이 달라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배를 타고 와야만 하는 먼 길을 걸어와 제스퍼를 찾는다. 하지만 편지가 없으면 선물을 줄 수 없기에 다시 돌려보내지만 마르구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 먼 길을 걸어서 제스퍼를 찾아온다.
 
마르구는 계속 제스퍼를 찾아온다. 제스퍼는 결국 마르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제스퍼는 마르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마르구가 원하는 선물을 만들어서 배를 타고 썰매를 끌고 마르구가 있는 먼 곳에 가서 그것을 마르구가 잘 때 몰래 갔다 놓는다. 마르구가 선물을 풀어서 썰매를 타며 환한 얼굴이 된다. 모든 아이들이 하는 평범한 놀이가 마르구에게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마르구가 딱 한 번 눈물을 흘리는데 제스퍼가 떠나갈 때 운다. 선물도 집어던지고 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장면은 뭔가 아직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의 어떤 부분을 쿡 건드렸다. 그건 아마도 중학교 때 느낀 행복한 마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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