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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10. 2021

그녀를 사랑한 죄 9

단편 소설


9.


 남자는 그녀의 저쪽 세계의 남편이다. 그 남자가 계단 밑으로 다 내려오면 이 세계에 접합하려는 것일까. 나의 착각일 뿐이라고만 하기에는 시계가 이미 틀어지고 있다. 그녀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그녀와 갔다 온 이후 계단 위에 앉아있던 남자는 한 계단 내려온 것이다. 한 세계에 같은 사람 두 사람이 만나는 어느 순간, 어딘가가 변형되고 만다.      


 그녀에게 계단 위의 남자에 대해서 말을 하기 위해 그녀를 이모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이모의 집을 좋아했다. 아담했고 포근함이 깃들여있다고 했다. 특히 벽면에 칠해 놓은 노랗고, 피부의 스킨톤 같은 컬러가 마음을 안정시켜 준다고 했다. 이모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젊은 시절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긁어모은 액세서리가 온 집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감상하듯이 꼼꼼하게 들여다보더니 감탄이나 탄성을 연발했고 감상이 끝났을 때 우리는 거실에서 섹스를 했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소파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섹스가 끝나고 하품을 한 번 하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흘러넘치는 성적 암시를 가득 담고 그녀는 모로 누워 새끼 고양이처럼 잠들어있다. 밑으로 약간 처진 젖가슴을 타고 흐르는 관능미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진부한 말이지만 그녀는 유부녀라고 하기에는 몸매가 이십 대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적으로 손과 손톱에서 늙음의 정직함을 볼 수 있는데 그녀는 손톱마저 플라스틱처럼 탱글탱글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저물어가는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집안에 낀 그림자와는 다른 질감의 그림자가 그녀의 잠든 얼굴에 내려앉았다. 불치병 환자가 지정할 수 없는 병이 깊어져 내일일지 한 달 후일지 알 수 없는 불안처럼 탁하고 기이한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보드라웠다. 손을 더 밀어 넣었다. 그녀가 움찔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실감은 제로였다. 그녀는 정말 나이를 먹지 않고 있었다. 단지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그녀의 얼굴에 보이는, 저물어가는 그림자가 신경 쓰였다. 그녀가 일어나면 계단 위에 앉아 있는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말을 해야 했다. 그녀의 남편, 저쪽 세계의 남편이 이쪽 세계의 남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틈을 타서 오려고 한다. 저쪽 세계의 남편이 이쪽 세계로 완전하게 건너와 버리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그녀에게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뭐랄까 평면적이었다. 굴곡이 있어야 하는 부분에 굴곡이 소거되어 있어서 입체감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으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두통약을 찾는 사이 그녀는 옷을 입고 약은 필요 없다고 했다. 집으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집에 있는 약을 먹겠노라고, 안정이 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내가 바래다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짓으로 괜찮다고 했다. 택시를 불러 그 안으로 들어간 다음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은 연락은 없었다.


 계단 위에 앉아 있는 남자는 이틀 뒤에는 한 계단 더 내려와 앉아 있었다. 감쪽같다. 지켜보는데도 언제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계단 위의 남자의 형태가 좀 더 뚜렷해지더니 그 모습은 우울하고 지쳐 보였다. 물론 기분 나쁜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미소가 박음질처럼 그 얼굴에 박혀 더 지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남자가 계단 밑으로 다 내려온다면 고독하고 고요하게 이 세계에 아포칼립스가 도래할 것만 같이 불안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남자는 한 계단 더 밑으로 내려왔다. 남자의 기이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후광처럼 그 주위를 일그러트렸다. 계단 위의 남자는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더니 어느 날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집으로 가고 일주일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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