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Aug 17. 2021

고작 계란 프라이를 먹으면서

일상 에세이

소설가 박경리가 손주를 업고 창문틀에 원고지를 대고 글을 썼다. 사위인 김지하 시인은 옥고를 치르고 외동딸인 김영주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어서 손주를 돌 볼 사람은 박경리뿐이었다. 밥을 해 먹을 수 없어서 마른 북어포를 뜯어먹어가며 손주를 달래며 서서 글을 적었다.


글을 적으려면 불빛과 탁자가 있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누워서도, 걸으면서, 불빛이 없어도 글을 적을 수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일일이 메모했다가 부랴부랴 노트북을 열어서 글을 적을 필요도 없어졌다. 더 쉬워졌고 간편해졌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렇게 편리하고 글을 쓰기에 너무나 적합한 요즘 저 위의 박경리 소설가가 글을 적기 위해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글을 쓸 만큼 절실함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계란 프라이를 먹으며, 창틀에 서서 북어포를 먹으며 손주를 업고 한 손으로 글을 쓴 박경리 소설가를 생각한다. 고작 계란 프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 계란 두세 개를 먹을 수 있다는 건 계란값이 오른 작금의 시기에 마음의 사치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사치는 조금씩 영역을 넓혀 아직 아이로 남아있으려는 마음속의 절실함을 가져가는지도 모른다.


복어포를 뜯으며 창문턱에 서서 글을 쓴 박경리 소설가에 비할바는 못 되지만 근래에 나에게 이토록 글에 대한 절실함이 남아있을까 생각해본다. 나도 분명, 글에 대한 갈망으로 잠들기 전까지 고민하며 글을 쓰다가 잠들었다. 매일 조금씩 그 시간에는 쓰고자 하는 글을 썼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에도 환자가족 대기실에서 글을 쓰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때 새벽에 눈을 뜨니(겨울이었는데 5시가 되면 보일러를 끈다. 그래서 추워서라도 일어나야 한다) 다른 가족이 나에게 이불을 덮어놨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때에 가졌던 절실함을 손상되지 않게 가지고 있느냐,라고 한다면 나도 자신이 없다. 지금은 분명 그때보다 방대하게 글을 쓰고 있다. 습관과 루틴이 고착되어서 나의 생활 반경 내에서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그에 맞게 방호막을 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며 상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메모를 해놓고 모두가 잠든 밤이 도래하면 노트북을 열어 화면에서 나오는 빛을 받은 나는 신나게 글을 적었을 때의 나에게는 마음의 사치는 적어도 없었다. 그때 맛있게 먹었던 계란 프라이는 지금 먹는 맛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고작 계란 프라이였고 단골 식당에서 계란 프라이 하나 달라고 하기도 했다.


박경리의 토지는 못 읽었다. 아마 앞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김약국의 딸들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허장강, 엄앵란과 황정순이 나오는 영화로도 몇 번 봤다. 통영의 유지 김약국 네가 일본인이 들어옴으로 해서 몰락해가는 과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감독을 했던 유현목 감독은 붕괴해가는 한 가정의 이야기 ‘오발탄’도 만들었다. 나에게 있어 재산이라 함은 흑백 시대의 한국 영화를 잔뜩 본 기억이다.


박경리 소설가는 글을 써야만 하는, 그리고 그의 글은 써지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은 절실함을 넘은 어떤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초기 작품들이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박경리는 비극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비극은 칼날이 되어 베고 찌르고 아프게 했다. 고 생각한다.


예술은 잔인하다. 예술은 삶과 흡사하고 밀착되어 있다. 삶도 잔인하다.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세운다. 고작 계란 프라이를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건 잔인한 매일을 숨을 쉬게 해 준다. 북어포를 씹어 먹으며 창문 틈에 서서 손주를 업고 글을 쓴 박경리를 생각한다. 26년 동안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를 생각한다. 대문호라는 칭호는 박경리 소설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소설 ‘토지’를 읽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의 딸 김영주 토지문학 재단 이사장이 토지를 알리기 위해 생을 보냈다. 그랬던 김영주도 2019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 이전에도 매일 먹었던 고작 계란 프라이를 앞으로도 매일 먹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마음의 사치를 줄이고 매일 계란 프라이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열심히 글을 적겠다. 연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마지막 여름을 일별 한다. 매미소리가 좀 더 크게, 길게 들려온다.



오늘도 내 마음대로 선곡. https://youtu.be/mLc5FHrVTP0

가사가 좋아서 왕왕 듣게 되는 하얀 나비. 아주 많은 리메이크가 있는 노래가 이 노래, 하얀 나비가 아닐까 싶다. 김정호는 폐결핵 때문에 일찍 죽었다. 김정호는 폐가 망가지는대도 요양원에서 뛰쳐나와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고통을 참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아마 딸에게 아빠가 가수라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래를 힘겹지만 불렀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련하다. 아련함이란 말을 영어로는 어떻게 될까.


김정호는 솔로로 노래를 부르기 전에 ‘사월과 오월’ 그리고 ‘어니언스’에서 활동을 했다.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음악만을 하게 두면 되는데 대마초 파동에 연관도 없는 김정호가 연루되어서 피해자가 되고 만다. 김정호가 죽은 나이 고작 33살. 그의 노래 ‘이름 없는 소녀’는 정말 호소력 짙다.


재미있는 건 저 유튜브 속 윤복희 쇼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정호의 영상 댓글에 가수 윤복희가 댓글로 김정호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 어린 대댓글이 재미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구역의 미친놈은 나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