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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05. 2021

추위에 떨다 먹었던 그 맛

컵라면과 소시지

추억으로 먹는 컵라면


학창 시절에 어른이라는 개념은 대체로 잔소리를 퍼붓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사진부라 주로 하지 마라는 말을 3 내내 들었다. 오로지 공부만 하라고 했는데 공부는  하기 싫었고 하지 않아서 어른들과는 거리가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들거나 가출을 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냐면, 늦은 시간이라도 집에 가면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집이라는 , 부모,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렇게 자식을 기다리는구나.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살갑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몹시 대등하게 으르렁 거리는 사이도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들과도 대체로 그런 거리 정도를 두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수업을 중단하고 모두 일찍 집으로 보내준 날이 있었다. 대부분 학생의 집에 연락을 해서 어머니나 가족 중 한 사람이 우산을 들고 학교 앞까지 아이들을 마중 나와서 데리고 갔다.


그때 나와 사진부 몇몇은 집으로 가지 않고 사진부 암실에 숨어 있다가 모든 교실이 고요에 폭침을 당했을 때 기어 나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갔다. 비가 엄청나게 와서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비를 맞으며 공을 차는 기분은 좋았다. 공은 운동장에 고인 빗물 때문에 튕겨 오르지도 않았다. 발로 차서 운동장에 떨어지면 그대로 붙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비가 상상 이상으로 내렸다.


놀 때는 몰랐는데 운동장에 물이 고여 발목까지 찰랑찰랑거렸다. 그때 덜컥 겁이 났다. 우리는 얼른 공을 가지고 화장실로 가서 젖은 체육복을 벗고 주전자에 물을 받아서 빗물을 대충 씻었다. 여름방학 직전이라 더운 날임에도 비를 맞아서 추위 때문에 체온이 떨어져 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쾅하며 화장실 문이 열리고 학주가 나타난 것이다. 학주는 선생님들도 포함해서 전교생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고 무서워하는 어른 인간이었다. 키도 190이 넘었고 한쪽 다리를 조금 절었는데 소문이 무성한 그런 인간이었다.


학주는 한 손에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는 몽둥이를 들고 문을 탁탁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욕을 섞어서 집에 가라고 할 때 왜 집에 안 가고 아직이냐며, 지금 태풍이 오는데 집에서 걱정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라며 호통을 쳤다. 목소리 통주음이 커서 그럴까 마치 지옥의 악귀가 내뱉는 소리 같아서 몸이 더 떨렸다. 우리는 팬티만 입은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학주는 몽둥이를 어깨에 탁 올리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마치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는 유태인처럼 일렬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학주를 따라갔다. 몸은 점점 추워왔다. 이러다가 골로 갈 것만 같았다.


학주는 교무실 옆의 숙직실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거기에 딸린 샤워실에 우리를 밀어 넣고 물을 틀어주었다. 뜨거운 물이 쏴아 흘러나왔다. 그리고 학주는 우리 머릿수에 맞게 수건을 주면서 샤워 끝나면 몸 닦고 집에 가서 잘 빨아 오라고 했다. 이 새끼들 하튼 말썽이야, 라면서 문을 닫아 주었다.


다 씻고 나왔을 때 학주는 숙직질에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우리에게 컵라면을 하나씩 끓여 주었다. 그리고 소시지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컵라면에 하나씩 넣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컵라면을 들고 한 젓가락 떠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맛있는 라면,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라면을 먹다가 컵라면에 빠진 소시지를 한 입 먹었다. 뽀독하며 터지는 순간 그 안의 육즙이 콸콸 흘러나왔다.


“샘은?”라고 힘없이 물었다.

“나는 질리도록 먹으니까 됐어, 새끼들아. 추우니까 든든하게 먹어둬라.”


아 씨발, 그때 뭐랄까 학주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 원래 우리와 대치를 해야만 하는, 그런 똥 같은 어른이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졸업할 때까지 피해 다니며 말썽을 부릴 수 있는데 학주가 챙겨준 컵라면 하나에 우리는 그냥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욕이 씨발, 속으로 엄청 나왔다. 학주 때문에 말없이 컵라면을 먹었지만 후루룩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먹었다. 학주는 시끄럽게 먹던, 어떻게 먹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학주의 금기가 깨졌다는 기이한 현상을 접한 우리는 속으로 있는 욕을 다 하면서도 컵라면이 이렇게나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욕이 나올 정도로 맛있는 컵라면을 먹었다.





그래서 오늘 내 마음대로 선곡은 https://youtu.be/Oextk-If8HQ

킨의 ‘섬 웨어 온리 위 노우’이다. 십 년 전에 얼마나 따라 불렀던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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