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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Nov 17. 2021

추억의 햄버거

이야기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가을빛이 스며든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 나무에 색을 칠하고 하늘에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렇게 있으면 추울 텐데,라고 학교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수위 아저씨를 보고 목례를 했다. 서쪽 숲에는 이미 눈이 내리고 있지,라고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다리를 모으도록 해, 그러면 덜 춥지. 라며 낙엽이 바람에 딸려 가듯 수위 아저씨가 학교 뒤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일요일의 학교는 고요했다. 종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아이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싹 소거된 학교는 학교 같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는 수위 아저씨가 없다. 누구일까.


발바닥이 가려웠다.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발바닥이 가려워서 욕실 바닥에 앉아서 발바닥을 긁었다. 좀 시원한가 싶더니 긁는 걸 멈추었더니 두 배로 가려웠다. 술만 마시면 이렇다. 특히 와인을 마시면 더 그렇다. 와인의 어떤 성분이 나의 세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미지를 입힌다. 그 세포는 발바닥에 포진되어 있는 세포들로 방어막을 펼치느라 분주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손은 열심히 긁어야 했다. 와인을 분명 한 병 정도 마신 것 같은데 술에 취했다. 와인은 요즘 흔히들 마시는 시고르 자브종이다.


그 정도에 이렇게 술에 취해 발바닥의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있다. 샤워를 하는 내내 발바닥이 가려웠다. 몸을 닦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으니 발바닥이 가려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시는 시고르 자브종 와인을 마시지 않으리.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그동안 살면서 다짐을 몇 천 번이나 했을까. 가려움은 점점 증식했다. 가려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처한 입장, 나와 관계된 일, 내 주위의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가려움은 여지를 두지 않았다. 가려움은 뇌를 침투해서 두정엽, 측두엽, 전두엽 같은 것들이 해야 할 일을 몽땅 스톱시키는 것이다. 가려움이란 그런 것이다.


너무 가려워 손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책상으로 가서 자를 찾았다. 서랍을 여는 동안에도 발바닥이 가려워서 발가락을 오므렸다. 늘 첫 번째 서랍 안에 자가 있는데 거기에 없었다. 내 기억의 문제일까. 발바닥은 자로 긁어야 하는데 자가 없다. 할 수 없이 볼펜으로 발바닥을 긁었다. 그렇지만 자만큼 시원하지 않았다. 좀 더 날카로운 무엇이 필요하다. 술이 올라온다. 술이 목구멍을 드래프트 한다. 곧 머리까지 올라올 것이다. 한 손은 발바닥을 긁고 있고 한 손은 다리를 잡고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없을 정도의 묘한 자세다.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해줘야 맞는 것일까. 진정 그게 올바르게 생활한다고 믿게끔 보이는 행동일까. 모든 이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은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될 수 있으면 인간관계를 축소하고 축소하여 협소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것일까. 한 이불에 같이 들어도 잠은 혼자서 잘 텐데. 인간관계란 그런 것일 텐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발바닥이 너무 가려웠다. 손에 차가운 무엇이 잡혔다. 잠이 드는 동안 술까지 더 취했다. 천장이 빙빙 돌 정도로 어지러운데도 발바닥은 가려웠다. 욕이 나오지만 지성인이라 욕은 삼켰다. 욕을 하고 싶은데 욕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인간이 괴물이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내일이 오는 게 무서운 것이다. 크앙.


일단 손에 잡힌 차가운 무엇인가로 발바닥을 긁었다. 잠결이고 술이 취했지만 너무 시원했다. 그 시원함이 뇌를 습격했다. 머리가 마치 무더위에 지쳐있다가 은행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려움이 순식간에 발바닥으로 줄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긁는 그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 시원하게 다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함이었다. 배가 고팠다.


학교 로열박스에 앉아 있었다. 다시 계절이 돌고 돌아, 기가 막힌 햇살과 그에 맞먹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기에 왜 또 앉아 있는 것일까. 기시감이 드는 동시에 낯선 이곳은 내 학교일까. 나는 수위 아저씨를 기다렸다. 해가 조금 이동을 했다. 수위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는 아저씨가 낯이 익었다. 해는 등지고 있지 않았는데 수위 아저씨의 얼굴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었다.


역시 쉬는 날 학교는 적요했다. 이런 적요는 나쁘지 않다. 세상에는 소음이 지배하고 있는데 쉬는 날 학교에는 비교적 적요가 고요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게 마음에 든다. 마치 파동 없는 호텔 풀 사이드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다. 바람은 있지만 소리가 소거됐고 햇살은 따스했지만 깊이가 느슨했다.


서쪽 숲은 이미 한 겨울이네, 라며 수위 아저씨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위 아저씨를 봤다. 역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쩐지 수위 아저씨에게 나는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음 저 밑에서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수위 아저씨는 뒷짐을 지고 내가 보는 운동장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시선을 아저씨가 두는 방향으로 옮겼다. 해가 또다시 조금 이동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도 조금 길어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같이 먹으려고 햄버거를 사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말에 아저씨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먹고 싶어서요, 옛날 햄버거예요, 햄버거 안에 햄과 상추만 들어있는. 라며 나는 수줍게 내밀었다. 수위 아저씨는 표정은 없었지만 내가 내민 옛날 햄버거를 받으면서 아마도 조금 기뻤을 것이다. 예전 그 오래 전의 기억이 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햄버거를 까서 야무지게 먹었다. 맛이 썩 있지는 않았지만 꽤나 맛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마치 나를 어린이처럼 내가 잘 먹고 있는지 뒤에 서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해가 이동을 할 때마다 그림자도 조금씩 움직였다. 그때 나는 수위 아저씨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나는 아저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저씨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정신이 몽롱했다. 가물가물 한 것이 발바닥으로 나의 의식과 자아가 몽땅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겨우 눈을 떠 발바닥을 보니 날카로운 것에 난도질이 되어 침대 바닥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위 아저씨는 눈물보다 진한, 붉은 사랑을 주고 팠을까.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Cigarettes After Sex의 케이 https://youtu.be/kxsglm-D2Jc

욕이 나올 정도로 너무 좋아서 욕이 삼켜지는 이 분위기 사운드, 어떡합니까요. 미칠 것 같았던, 미치도록 좋아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다시, 니코를 다시, 다시, 다시 보는 것 같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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