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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an 07. 2022

이어폰

죽어도 유선 이어폰


이어폰은 그야말로 천방지축이다. 음악을 듣고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 후에 음악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꺼내면 어김없이 이어폰 줄이 뒤엉켜 있다.


아마도 이어폰은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안 참치 인간이 내가 싫어서 몰래 주머니 속에 기어들어가 마구잡이로 이어폰 줄을 꼬아 놓은 듯했다. 어이없지만 그야말로 베베 꼬여 있다. 엉킨 이어폰 줄을 푸는 데는 약간의 시간과 무엇보다 큰 인내가 필요하다.


이어폰의 엉킨 줄을 푼다는 건 인간사에 있어서 그렇게 썩 중요한 부분을, 그러니까 집도의가 막힌 혈관을 푼다든가, 정전의 주범인 얽힌 배선을 푼다던가, 하는 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재빨리 풀어 버리려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이어폰은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베베 꼬여간다. 찬찬히 마음을 가다듬고 시간을 들여서 풀어내면 샤워 후 기분 좋은 그녀처럼 아잉 거리며 얽힌 매듭이 풀어진다.


하지만 그 5분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치명적이다. 영하 10도에, 칼바람이 부는 겨울밤에 마음잡고 운동을 하러 나왔다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고 나면 조깅이고 운동이고 할 마음은 이미 치즈처럼 생긴 달의 뒤편으로 가버리고 만다. 손이 시려 장갑을 끼고 조깅을 하는데 장갑을 낀 채 낑낑거리면 몸이 덜덜 얼어버릴 것 같았다.


자동차 조수석에 가만 올려 두었던 이이폰을 집어 들면 어김없이 그들은 교접하는 원숭이처럼 베베 꼬여있다. 참치 인간은 나를 싫어하는 게 맞다. 베베 꼬였다는 표현보다는 아예 묶여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이어폰이 이리도 서로 매듭짓듯 묶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녹색 바닥의 지하 주차장에서 조수석 옆에서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서 이어폰 줄을 푼다. 요걸 저기로, 저걸 또 이쪽으로, 하면서 다 풀어가는 와중에 이어폰 헤드가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인내라는 의식의 찌꺼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한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사물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살살 달래 가며 매듭을 풀던 이어폰을 확 잡아당겼다. 확 주차장 바닥에 버리려 하다가 분을 삭이며, 그냥 대시보드를 열고 거기에 넣었다.


그렇게 대시보드 안에는 바로 버리지 못한 10개가량의 이어폰 시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들은 생명이 끝이 나서 더 이상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음에도 서로 다른 이어폰 줄과 함께 서로서로 베베 꼬여있다.


검은 이어폰 줄에 하얀 이어폰 줄이 꽈리처럼 꼬여있는가 하면 참치 인간이 앉아서 장난을 치듯 아주 신이 난 모양새로 서로 묶음 세트가 생각날 정도로 전부 꼬여 버린 것도 있다.


나는 조깅하기를 포기하고 자동차에서 음악을 틀었다. 마이클 부를래의 ‘홈’이 나온다. 부를래의 목소리가 좋다. 그리고 부블래의 노래가 끝이 나면 도트리의 ‘홈’이 나온다. 도트리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 나는 잠에 빠져 버린다. 시트에는 열선이 깔려 있어서 추운 날에도 등이 따뜻했다.


따 뜻 하 다 따 뜻 하 다.


따뜻한 느낌은 언제나 좋다. 특히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는.


-이 녀석 얼굴 좀 봐. 여잘 정말 밝히게 생기지 않았냐?

-외설스럽군.

-그래, 그래, 낄낄낄.

-이 녀석 지난번에 여자하고 여기서 키스하는 것 같던데. 키득키득.

-그 여자와는 어떻게 됐지?

-몰라 이 녀석 정말 보기 싫어.

-이 녀석 어떻게 혼내줄까?

-이 녀석 코털을 계속 자라게 해 버릴까.

-낄낄, 아주 길게. 낄낄낄.


무슨 시끄러운 작은 소리에 눈을 뜨니 나는 이어폰 줄에 몸이 칭칭 감겨서 의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운전대에는 참치 인간이 그 짧은 다리를 꼬고 앉아있고, 조금 전의 머리가 떨어져 버린 이어폰이 참치 인간의 옆에 앉아 있었다.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이어폰들은 그 검고 하얀 머리들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맙소사.




그래서 오늘의 선곡은 부블래의 홈

https://youtu.be/lbSOLBMU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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