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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23. 2022

바람이 불어오면 27

소설


27.


 “이곳은 나만큼이나 오래되었지. 지금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나 같은 노인들뿐이라네 그래서 슈퍼 앞을 잘 쓸어놔야 하지. 믿기지 않겠지만 내 나이는 한 번 넘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많다네. 자네가 졸았던 그 툇마루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지. 좋은 시절이야. 지금이 말이지”라며 슈퍼의 주인은 웃었다. 주인의 웃음 속에는 비록 젊음이 좋지만 지금의 생활도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 말은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난로 위의 냄비가 비명과 함께 끓어오르고 슈퍼의 주인은 냄비에 라면을 넣었다. 스프가 들어갔고 곧바로 라면스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니 허기가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나의 모습을 슈퍼 주인은 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라면의 매력이지. 노인들이 이곳에 모이면 막걸리와 함께  내가 라면을 끓여서 내어 준다네. 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의 라면을 끓인다네. 라면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끓이는 사람에 따라 맛이 전부 달라. 그리고 라면을 먹는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게 된다네. 참 신기한 일이야. 그동안 살면서 라면이 맛이 없을 때가 언제일까. 하며 생각을 해 봤다네. 그랬더니 기가 막힌 결론이 나왔어. 라면은 배가 불러도 맛있다는 거네. 껄껄.”


 슈퍼 주인은 라면 냄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실은 말이네, 노인들 말고 자네에게 내가 끓인 라면을 먹여보고 싶었다네. 노인의 욕심이지. 늙은이들의 입맛은 알 수가 없어. 그저 부드럽고 따뜻한 음식은 죄다 맛있어하지. 자네가 라면을 먹지 않겠다고 했으면 난 아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 슈퍼 주인은 면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라면을 끓였다. 면이 살아있게 끓이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며, 나에게는 이 방법으로 하면을 끓여 먹으라고 권했다. 슈퍼 주인은 후후 불지는 않았다. 스프를 넣고 잘 저어 준 뒤 계란을 하나 깨트려 넣었다. 곧 나에게 냄비의 뚜껑을 건네줬다.


 “라면의 진정한 맛은 어디에 덜어 먹느냐에 따른 거라네. 그중에 제일은 냄비 뚜껑에 라면을 덜어 먹는 것이지. 계란은 자네가 먹게. 나이가 들면 계란 같은 것과는 조금 멀어져야 하거든.”


 슈퍼 주인은 내가 들고 있는 뚜껑에 반쯤 익은 계란을 올려 주었다. 냄새가 허기를 쪼아댔다. 할아버지는 하얀 밥그릇을 선반 밑에서 꺼내고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내서 아래위로 잘 흔들어서 그 밥그릇에 부은 다음 한 번에 죽 들이켰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내는 소리를 냈다. 라면도 그 밥그릇에 덜어서 후후 불어 먹었다.


 “역시 선주후면이야.”


 슈퍼 주인은 나에게도 막걸리를 권했다. 나는 뚜껑에 라면을 덜어 먹다가 할아버지가 주는 막걸리를 받아서 마셨다. 막걸리는 진짜 막걸리의 맛이었고 톡 쏘는 맛도 다른 막걸리에 비해서 덜 했지만 기도를 적시고 잘도 위 속으로 들어갔다. 막걸리의 맛은 어쩐지 아늑하고 노곤했다.


 “이건 아스파탐이 비교적 적게 들어 있어서 단맛은 썩 나지 않네. 진정한 막걸리의 맛이지. 쌉싸름한 끝 맛이 있지.”


 나는 슈퍼 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면은 맛있었고 막걸리는 체내에 스펀지처럼 흡수되었다.


 “자네는 말이 별로 없군. 나도 한때는 자네 같았다네.”


 슈퍼 주인은 또 막걸리를, 라면을 덜어먹던 자신의 밥그릇에 부어서 마시고는 나에게도 막걸리 한 잔을 더 부어주었다. 나는 이제 그만이라고 하려다가 그대로 받아먹었다. 실내의 공기는 앉아있는 나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할아버지를 이어주고 있었다.


 “실은 말을 많이 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면 생각과는 다르게 나와서 저도 놀랄 때가 많아요. 그래서 굳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요.”


 나는 바닥에 조금 남아있는 막걸리를 다 마시고 슈퍼 주인에게 막걸리 병에 남아있는 나머지 막걸리를 할아버지에게 다 부어주었다. 슈퍼 주인은 아주 맛있게 막걸리를 마시고 김치를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걸 하게 집어서 입에 넣고 턱을 움직였다. 김치를 씹는 경쾌한 소리가 하얀 눈밭으로 울리는 것 같았다. 주인 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았는지 김치 종지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지금껏 살면서 나도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았지. 그렇지만 많이 해버린 말들에 대해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네. 그건 말이지 시간이 지나서 보면 쏟아냈던 수많은 말들이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네. 어딘가 소멸되어 버린 말들은 그대로 그렇게 잊히는 거라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말만 기억이 나더군.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그렇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말만 기억한다네. 그것이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매일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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