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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22. 2023

오밤중에 또 밥을 비벼버렸다

뭐 어쩌라고


비빔밥의 정점은 자정에 비벼 먹는 것이다.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정신 줄을 놓고 자아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초자아가 냉장고를 열고 열무를 꺼내고 계란 프라이를 해서 밥을 비비고 있다. 참기름을 떨어트리는 순간 밀고 당기기의 게임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밥을 비벼 먹는 맛을 알아버리고 나면 자주 비벼 먹게 된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취를 할 때 나는 정말 밥을 많이도 비벼 먹었다. 전기밥솥에 밥이 다 되면 뚜껑을 열면 뜨겁고 맛 있는 밥 냄새가 확 난다.  바로 그 안에 고추장을 넣고 날계란을 두세 개를 깨트려 넣는다. 그리고 멸치볶음이(늘 있었다) 있어서 그걸 넣고 김치가 있으면 넣고, 그리고 김을 부셔서 넣어서 그대로 비빈다. 그러면 밥이 아주 뜨겁기 때문에 계란이 그대로 다 익는다. 와 맛있다.


자취방에 아이들이 오면 늘 이렇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해 먹는 건 괜찮은데 애들이 느닷없이 우르르 와서 밥을 해달라고 하면 그것만큼 귀찮은 건 없었다. 그래서 전기밥솥 한가득 밥을 해서 비벼주면 소주에 잘 도 처 먹었다. 버터가 있으면 더 맛있다. 버터를 넣으면 뜨거운 밥에 햇살이 녹듯 녹아내린다. 버터가 있으면 계란을 꼭 넣지 않아도 된다. 휘휘 비벼서 멸치볶음을 넣고 고추장을 넣고 김치를 넣고 그대로 비벼서 내놓으면 아이들은 환장을 했다.


아이들이 자취방에 와서 살림을 거덜 내는  같지만 학교에서는  나의 점심을 대체로 해결해주기도 했다. 돌아가면서  ,  놈이 학식으로 돈가스를 사주었다. 돈가스의 정은 소스와 밥은 마음대로    있어서  소스에 밥을 비벼 먹는 것도 맛있었다. 학식에도 비빔밥이 있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비빔밥을 먹으니 고로 씨가 우리나라에 와서 청국집에서 비빔밥을 먹었던 생각이 난다. 고로 씨는 뭘 해도 어색하면서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로 씨의 행동에는 어색함이 소거되어 있었다. 볼에 밥알을 붙이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고, 큰 키에 정장차림에 빵집 문 앞에 앉아서 군것질을 해도 어색하지 않다. 식당 주인이 마음대로 말을 해서 여긴 누구? 같은 표정을 지어도 어색하지 않고, 길게 뻗은 다리로 어린이 그네를 타도 어색하지 않다. 한국으로 와서 아 비빔밥데스까 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고 해운대 낙곱새 집에서 수저를 찾지 못해도 어색하지 않다. 오뎅 파는 곳에서 주문만 일분 넘게 해도 어색하지 않고, 몸을 구겨 넣어서 열도를 횡단했던 미니쿠퍼를 운전해도 어색하지 않다. 웃통을 벗고 야구장에서 조카를 응원하던 모습도 어색하지 않고 원작자 쿠스미 씨와 밥집에서 마주치며 엥? 다래? 같은 모습도 어색하지 않다. 이렇게 망가지는데도 어색하지 않은 건 어색함 속에 어색하지 않게 하기 ㅇ 굉장한 장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는 엄청난 장치의 기본이 되는 시나리오가 탄탄하다.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는 작가인 이자크 디네센(카렌 블릭센)의 아주 생생한 글을 볼 수 있다.


키쿠유 족이 젖소를 데려와 우리 집 주위에서 풀을 먹였다. 소 치는 소년 하나가 피리를 갖고 있어서 이따금 뭔가 짧은 멜로디를 불었다. 그 후로 같은 곡을 들을 따마다, 나는 우리의 지나간 날들의 고통과 절망 모두를 생생하게 떠올리곤 했다. 그 멜로디에서 나는 뜻밖에도 활력과 신비한 다정함, 그리고 한 편의 시를 들었다. 그 고통의 시기는 정말로 그토록 고통스러운 것이었을까. 그즈음 우리에게는 젊음이 있었고, 격렬한 희망이 넘쳤다. 그 길었던 고난의 날들이야말로 우리에게 단단한 결속을 가져다준 것이다. 설령 어딘가 다른 별에 가게 된다 해도, 우리는 분명 서로를 금세 친구로 인정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뻐꾸기시계, 나의 장서, 잔디밭에 있는 여위고 쇠약한 암소들, 슬퍼 보이는 키쿠유 족 노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너도 거기 있구나. 너 역시도 이 응공 농장의 일부로구나” 하고. 그렇게 그 고난의 시기는 우리를 축복하고, 그리고 떠나갔다. - 소설 '아웃 오프 아프리카' 중에서




공중그늘의 오르페우스의 가사가 꿈속으로 데려간다.


더는 나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아도 돼

햇빛에 천천히 젖은 마음을 말릴게

괜찮아 괜찮아 나아가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나아가고 있어


나의 축축한 마음도 옷 밖으로 꺼내 햇빛에 제대로 말리고 싶다. 이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축축해진 나의 마음을.

이건 나의 작품이다



사실과 진실은 많이 다르다.

 

미드를 보면, 좋아했던 미드들, 덱스터 시리즈, 오자크 시리즈, 홈랜드 시리즈 등. 미드를 보면 주인공 주위 사람들이 계속 진실을 알려 달라고 주인공을 들들 볶는다. 잘 만들고 인기가 좋은 미드에는 언제나 답답하고 갑갑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놈의 진실을 알아서 뭐 하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사람은 죽었는데 주인공의 가족은 계속 진실을 알려 달라고 한다. 그래서 결국 진실을 알고 나면 그저 허탈해하고 한 숨만 쉴 뿐 주인공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늘 진실을 알려 달라고 한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만약 누군가 모르는 것이 낫다고 하면 모르는 채 넘어가는 게 방법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전쟁에 공을 세운 선무공신의 공신은 하대하고 호성공신, 요컨대 내시나 왕의 짐꾼들은 1등 공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원균이 1등 공신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공신록이 뒤집어져서 사실과 진실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강가에서 사람이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둑에 발을 헛디뎌 강에 떨어졌다. 허우적거렸지만 힘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강의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이 그날 뷰가 좋아서 강을 보고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이 강에 빠질 때 그 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앞에 있던 사람이 밀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아파트의 또 한 사람도 그렇게 증언을 한 것이다. 경찰은 맞은편 아파트에서 뷰가 좋아서 강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시각 강변의 시시티브이를 확인하고 그때 강가에 나온 사람들을 탐문수사를 했다. 빠져 죽은 사람 앞에 있던 한 사람을 찾아냈다.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전과자였다. 그 사람이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을 밀었다고 생각하고 잡아서 심문에 들어갔다. 사실은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것이지만 진실은 그 앞에 있던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맞은편 아파트에서 보는 각도에서는 마치 밀어서 강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사실과 멀리 있는 경우는 아주 많다.


토요일에 회사 직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건 사실이다. 결혼식에서 웃으며 직원을 축하했다. 이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쉬고 싶은 주말에 회사의 경조사에 가는 일은 너무나 싫다. 이게 어른이 되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정말 싫고 진짜 싫다. 이게 진실이다.


자살이 많은 사실을 줄이려고 번개탄 생산을 줄이는 게 진실일까. 8점이면 8점이지 9점에 가까운 8점은 뭘까. 시력이 좋지 않으면 활 쏘기도 힘들 텐데. 그래서 진실은 알고 싶지 않다. 사실만 있으면 된다. 사실과 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 ‘네버 렛 미 고’를 봤다.  겉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그 속을 벌리면 너무 잔혹하고 잔인한 현실이 가득한 영화다.


보고 나면 그러지 않으려 해도 미미한 음식물이 계속 위에 붙어서 소화가 안 되는 것처럼 잔상이 어디를 가도 따라다닌다.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를 하나씩 기증하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운명 가지고 태어난 복제인간들. 아직 아이들이었을 시절에 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 사실을 말해주는 루시 선생님.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그녀는 기숙학교를 떠나고 만다. 샐리 호킨스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분명 판타지 에스에프 영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의 목적에 의해서 탄생된 주인공들은 그들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나의 병을 받아들이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가는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처럼.


이 영화 속 캐시와 토미, 루스처럼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가고 그 가치를 깨닫는 현실의 인간이 있다면 친구를 해도 되리라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네버 렛 미 고를 본 사람과 친구가 되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https://youtu.be/j6wYBA73q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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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을 먹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 비빔밥은 정말 우리의 소울푸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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