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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11. 2023

36. 어른들의 수다가 있던 곳

소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정할 수 없는 포근함이 가득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한없이 실내에 피어올랐다. 미닫이문을 밀면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데 들어가면 문 밖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문 바로 옆에 네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붉은색의 소파가 있다. 소파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촌스러운 인조가죽의 소파로 일종의 가난한 자의 사치가 조심스레 묻어 있었다. 어딘가에 버려진 것을 옮겨 놓은 듯 보였지만 소파에 앉으면 편안했다.     


 어른 네 명이 앉으면 조금 불편하게 보일법했지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를 하려면 소파에 앉아 있어야 한다. 소파 옆으로 의자가 두 개가 더 있었고 그 사이에 난로가 있었다. 겨울에 이곳에 들어와서 기다리는 동안 난로에서 불을 쬐며 손님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소파 맞은편 통유리가 보이고 소파와 통유리 사이에 지구상에서 볼 수 없는, 마치 우주선의 조종석 같은 이발용 의자가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의자는 붉은색으로 뒤로 젖혀진다. 양옆으로 드라이기와 각종 이발 도구도 꽂혀 있어서 기이했다.    

 

 푹신하고 촌스러운 소파 앞의 난로가 뜨겁게 열기를 뿜어내며 이용원 안의 수건을 말리고 있고 머리를 방금 깎은 건너편 구멍가게 아저씨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머리를 감으려고 세면대로 향했다. 흰 러닝셔츠의 구멍가게 아저씨는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난로 위 양동이의 뜨겁게 데워진 물을 떠 찬물과 병합하여 고개를 숙인 아저씨의 머리에 붓고 비누칠을 했다. 거기까지가 이발사가 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구멍가게 아저씨가 알아서 머리를 감았다. 머리에 물을 부어주는 이발사나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감는 구멍가게 아저씨나 전혀 조급함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11월 마지막 일요일 오전, 아저씨들이 동신 이용원으로 모여들었다. 겨울 햇살이 머리 감는 곳에 붙어 있는 창을 통해 라면 위의 치즈처럼 녹아내렸다. 이발사는 혼자지만 이발용 의자 세 곳에 앉아 있는 아저씨들의 머리를 전부 능숙하게 손질했다. 연기가 모락모락 신기하기만 하다.     


 의자 위에서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있는, 뒷집의 제조사에 다니는 회사원 아저씨, 의자가 뒤로 젖히고 얼굴에 뜨거운 수건을 올리고 눈을 감고 있는 세탁소집 아저씨, 수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영락없이 엑토플라즘처럼 보였다. 아빠를 따라와서 아직 이용원에 적응하지 못한 다섯 살짜리 꼬마의 울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이발사는 한 치의 오차도, 비루함도 없이 뜨겁게 데워진 수건을 세탁소 아저씨의 얼굴에서 걷어 낸 다음 생크림을 듬뿍 얼굴에 바른 다음 기이하게 생긴 면도날을 이리저리 움직여 수염을 깎아 낸다. 슥슥 삭 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전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 의사도, 요리사도 하얀 가운을 입는다. 칼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용사도 그렇다. 순결한 직업인 것이다.


 태양상회 아저씨가 머리를 다 감고 의자에 앉으면 총처럼 붙어있는 드라이기는 쇄엥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소명을 다 한다. 드라이가 끝난 구멍가게 아저씨는 거울을 보며 코털을 뽑아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던진다. 이발사와 동신 이용원에 모인 아저씨들이 그 이야기에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저씨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이야기에 한 마디씩 했다.     


 그때를 틈타 기철이가 이용원 구석에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왔다.


 “이 자식들 누가 벌써 캐럴을 틀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발사도 어떤 아저씨도 노래를 끄지 않았다.


 “역시 빙 크로스비지”라며 기철이가 웃으며 말했다. 일찍 찾아온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이용원 안의 따뜻한 빛과 함께 모든 이들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Bing Crosby - White Christmas https://youtu.be/_3ZC45Q82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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