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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글쓰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by 교관



하루키의 글 쓰는 스타일을 대부분 다 아실 텐데요. 2013년 동아일보를 보면 임경선 칼럼니스트가 하루키에 대해 쓴 칼럼이 재미있습니다. 저는 사실 임경선 작가의 도서를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여하튼 임경선 작가는 고 2였던 87년, 일본에서 하루키의 [그 유명하고 전설의] 빨강 초록 커버의 노르웨이 숲을 만나고 빠져들었다고 하는데요.


칼럼에서 하루키에게 글쓰기란 고상한 문학적 취향이나 자유분방한 풍류라기보다 차라리 노동과 수행에 가까웠다. 탈권위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문장에서도 확인된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정도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자신의 이런 글 쓰는 생활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에세이에서 카버는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 –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 레이먼드 카버 - 글쓰기에 대하여


또, 하루키는 자신과 비슷한 방식의 작가도 예를 들었지요.


이를테면 엔서니 트롤럽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작가로, 수많은 장편소설을 발표해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런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어디까지나 취미로서 소설을 썼지만 이윽고 작가로 성공을 거둬 일대를 풍미하는 유행 작가가 됐습니다. 그래도 그는 우체국 일을 끝까지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출근하기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 책상 앞에서 자신이 정한 양의 원고를 부지런히 썼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체국에 갔습니다. 유능한 공무원이었는지 관리직으로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출세했습니다. 런던 거리 곳곳에 빨간 우체통이 설치된 것은 그의 업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그때까지는 우체통이라는 게 없었다는군요). 우체국 일을 좋아해서 집필 활동이 아무리 바빠져도 그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꽤 특이한 분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는 1882년에 67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유고로 남겨진 자서진이 사후에 간행되면서 그야말로 로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규칙적인 일상생활이 처음 세상에 공표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트롤럽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했었는데 실상이 드러나자 평론가도 독자도 너무 놀라고 낙담 실망해서 그때를 경계로 영국에서는 작가 트롤럽의 인기와 평가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와아, 대단하다. 진짜로 훌륭한 사람이네’라고 순수하게 감탄하고 트롤럽 씨를 존경해 마지않았을 텐데 그 당시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뭐야,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따분한 작가의 소설을 읽었어?” 하고 진심으로 화를 낸 모양입니다. 어쩌면 19세기의 영국 보통 사람들은 작가에 대해 - 혹은 자기의 삶의 방식에 대해 - 반세속적인 이상상을 원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이런 ‘범속한 생활’을 하다가 혹시 트롤럽 씨와 똑같은 일을 당하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움찔움찔합니다. 하긴 트롤럽 씨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재평가를 받았으니까 그건 잘됐다고 하면 잘된 일이지만.


그러고 보니 프란츠 카프카도 프라하의 보험국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틈틈이 꼬박꼬박 소설을 썼습니다. 그도 꽤 유능하고 성실한 공무원이었는지 직장 동료들이 상당히 높은 평가 해줬습니다. 카프카가 결근하면 보험국 일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트롤럽 씨와 마찬가지로 본업도 빈틈없이 잘하고 부업인 소설도 진지하게 써낸 사람입니다(단지 본업이 있었다는 게 그의 많은 소설이 미완성으로 끝난 데 대한 이유가 되는 듯한 느낌은 들지만). 하지만 카프카의 경우는 트롤럽 씨와는 다르게 그런 반듯한 생활 태도가 오히려 훌륭한 장점으로 평가되는 면이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생겼는지, 좀 신기하지요. 사람들의 훼예포폄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루키는 말했죠.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30723/56607913/1





오늘의 선곡은 노르웨이 숲에 나온 사라 본의 Misty https://youtu.be/lJXLqAutql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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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스키소다를 두 잔 째 주문하고, 피스타치오를 먹었다. 셰이커가 흔들리고 유리잔이 부딪치고 제빙기에서 얼음을 가느라 달그락 소리가 나는 뒤쪽에서, 사라 본이 옛 러브 송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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