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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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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보이는 저편 하늘에서 후피동물처럼 보이는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구름은 자줏빛을 띠며 구름 밑으로 짙고 어두운 자주색을 발하는 거무티티한 빗줄기를 뿌리며 이곳으로 정중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자줏빛을 띠는 검은 구름은 지금의 세계를 바꾸려는 듯 보였다. 장롱의 뒷면처럼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지닌 적란운은 자각적인 영역을 확대하며 하늘을 전부 덮고 있었다. 쿠쿵 하는 천둥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렸고 마른번개가 한 번씩 번쩍 거릴 때마다 기분 나쁜 자줏빛구름은 방사선 같은 일렉트로닉 전리함을 만들어냈다. 이 일렉트릭 펄스는 전리전자의 발생으로 나타나는 전자펄스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것에는 일반론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원죄적 절망이 가득했다. 마른번개가 번쩍이고 목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다의 수면 위에 올랐다가 사라졌다. 목 없는 사람들은 사념을 지닌 채 바다 위에서 거친 침묵을 내뱉으며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그들의 수는 삽시간에 개미떼처럼 불어났다. 자줏빛구름은 짙고 어두운 해무를 가득 몰고 기분 나쁠 정도로 서서히 다가왔고 코를 막아야 할 만큼 심한 누린내를 동반했다.
먼바다에 떠 있던 거대한 유조선도 자줏빛 해무에 의해서 조금씩 사라졌다. 이후 유조선의 모습은 바다 위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바다 위에 사람들이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파도의 너울거림을 따라 힘겹게 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자줏빛구름에서 뿌려대는 자주색 비는 어느새 완전하게 검은 비로 바뀌었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자줏빛은 암흑의 조류처럼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 인간이 있는 모든 세계의 하늘을 덮을 것이고 검은 비를 뿌려 댈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검은 누린내가 가득한 바람이 해무가 다가오는 바다에서 불어왔다. 목 없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일]
지금은 장마기간이다. 여름밤인데 조깅코스에 사람이 너무 없다. 마동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마음껏 달리기 시작했다. 시에서 마련한 강변의 조깅코스는 시민들이 운동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겨울 동안 집안에서 꽁꽁 숨어 있다가 여름이 되면 도시에서 마련한 조깅코스로 전부 몰려나와서 자신의 집처럼 점령해 버린다.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여름밤, 야외의 조깅코스를 이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야외의 조깅코스를 이용하는 대부분이 무릎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는 나이의 남녀들이거나 반백을 넘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코스의 한쪽은 자전거가 달릴 수 있도록 빨간색의 자전거도로가 있고 다른 한쪽은 조깅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녹색의 코르크바닥이 잘 닦여있었다. 그래봐야 시민들이 실컷 돈을 벌어서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야외의 조깅코스니까 우리가 실컷 이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는 팽배했다. 그렇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조깅코스에 나와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그것이 외국과 다른 점이다.
자전거도로를 질주하는 자전거의 속력은 아주 빨랐다. 그래서 초보들이 자전거도로에서 벗어나 조깅코스로 들어와서 자전거를 이용하다가 조깅을 하는 사람과 부딪혀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큰 소리로 자신의 입지를 우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
마동은 조깅을 할 때에는 타인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장점이라고 하면 그저 달릴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누구와 같이 운동을 하는 것도 마동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달릴 때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똑바로 앞을 보고 보폭을 맞춰가며 시곗바늘처럼 달려갈 뿐이었다. 누군가 넘어져 있다 해도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타인의 삶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간섭도 하기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태양이 떠있는 낮에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지만 어두운 밤에 달빛을 받으며 조깅코스를 달리는 것이 꽤 매력적이고 터프하며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든 달이 떠 있는 밤에 조깅을 하는 것이 현재는 마음에 들었다.
달리면서 스치는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무형의 파티션을 만들어서 잡음을 막는다. 오직 달리는 것에 집중을 한다. 그러려면 조깅코스로 달려야 한다.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달린다면 소음이 많이 존재하기에 이런저런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소리에 예민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소리라는 것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발사기와 흡사했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며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달릴 때는 오로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뿐이다. 음악은 하나의 운율이 되어서 머릿속에 여러 개의 기호로 배열된다. 들리는 음악을 기호로 나열하고 나뉘어서 균형을 잡아 놓고 머릿속에 넣어두면 회사에서 작업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음악을 기호로 배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또 어떠한 특정적인 음악, 요컨대 프로그레시브나 아방가르드 음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호로 배열되는 것도 아니었다.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기호화가 되는 음악이 존재했고 그렇지 않은 음악도 존재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다가오는 숙명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마동의 입장에서 그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쉽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리듬이 흡수되는 것이다.
여름밤의 공기는 후텁지근하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고 여름밤은 깊이라든가 색채가 결여되어 있어서 꼭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마동만이 그런 타성에 젖어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호한 관념의 여름밤에 마음껏 조깅을 할 수 있는 이 나라에, 그리고 이 도시에 조금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역시 막연한 것이다.
여름의 기운이 한반도로 몰려올 때면 겨우내 스산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난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새벽까지 걷거나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매일매일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사람들이 너무 없다. 이상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없다니. 강변의 조깅코스로 우르르 나와야 할 사람들의 모습이 초췌하리만치 보이지 않았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전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 점심을 먹고 난 후 5월의 오후 2시처럼 조깅코스가 텅 빈 공간 같았다. 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잘 된 거야. 마동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편안하게 달리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동이 달리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조깅코스에 20대는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남녀들이었고 그 모습이 보기에 나쁘다거나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어떤 의식처럼 느껴졌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아마도 2, 30대는 대부분 현실에서 시간을 마음 놓고 쪼개서 운동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두 실내체육관 같은 곳을 찾는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빠른 시간에 최대한 효과를 봐야 할 것이다. 시간이나 폼을 들여 꾸준하고 밀도 있게 무엇을 생산해 내는 것에는 힘겨워했다. 음식도 빨리 나와야 하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도 빨리 인화가 되어야 한다. 빨리되지 않는 곳은 도태되어 버리고 만다. 배달은 마땅히 십 분이 넘어가면 사람들이 화를 냈고, 약속시간을 어긴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안 좋은 소리를 뱉었다.
3.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꾸준하게 해야 하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조깅 따위는 20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운동처럼 되었다. 시간을 오래 두고 따분하게 한두 시간씩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은 백 명 중에 고작 한두 명 정도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마동의 생각이었다. 모든 20대들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마동은 여기 조깅코스를 매일매일 달리고 있지만 마동을 제외하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50대 이상의 남자들은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소화를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들(라고 해봐야 아내정도)과 함께 강변의 조깅코스를 삼사십 분 정도 운동을 했다. 그들에게는 과하다 싶을 만큼 운동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짐(gym) 같은 곳에서 땀을 있는 대로 쏟아내며 지나칠 정도로 운동을 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릿느릿, 천천히 걷거나 달렸다. 마동은 자신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하며 달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달려놓자고 늘 생각했다. 과유불급을 알고 있는 나이대의 사람들은 운동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운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동은 역시 타인의 일이기 때문에 조깅코스에 나와서 느릿느릿 운동을 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조깅코스에 사람들이 없으니 옷을 다 벗고 공용수영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달리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방해자들이기는 하지만 늘 있어야 하는 무엇인가가 소거되어 버리면 일반적이지 않는 기이함이 들어버리고 만다. 마침 저 앞에 네 명의 아주머니들이 조깅코스에서 일렬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일렬로,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면 마동은 달리는 속도를 줄여 그들을 지나쳐 빠져 나가서 다시 달려야 한다. 조깅코스에서 가끔 마주하는 일이다. 달리는 흐름이 끊어지고 아주머니 무리를 돌아서 다시 박차를 가하고 달리기까지는 묘한 불편함이 생성된다. 아주머니들은 이타적이지 않다.
마동은 언젠가 프레젠테이션을 조용히 준비하려 오전시간에 카페에 들어갔을 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온 적이 있었다. 이 나라는 점점 낮아지는 출생률에 곤란함을 드러내고 정부는 사람들에게 출산장려를 억지로 권하며 마치 그에 떠밀려 출산을 한 젊은 엄마들은 벼슬을 단 모습을 지닌 엄마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카페 안을 시끄럽게 떠들고 다녀도 아이엄마는 미안한 구석이 없다. 커피를 쏟으면 아이엄마는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가 그런 건데 이해해 줄 수 있지? 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나는데 등 뒤로 아이엄마는 같이 온 일행에게, 등을 보이고 나가는 마동을 되레 경멸하는 목소리가 먼지 낀 시골길처럼 남았다.
조깅코스에서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무리 지어 걸어가는 아주머니들도 그런 면에서 보면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주머니들의 평범함을 거부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주위에서 많이 듣고 봐온 터였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아크로바틱 한 행동에 비하면 조깅코스에 일렬로 천천히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어떤 대회의 등수에는 들지 못할 것이다. 마동에게 그런 부분은 지나치는 사소한 불편함일 뿐이다. 앞으로 과학이니 의학이니 하는 부분이 얼마나 발전을 거듭할지는 몰라도 유기체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타인의 불편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지만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니까, 하며 그저 넘어가는 것뿐이다.
말을 섞다 보면 의도하지 않는 언어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 그것대로 그만의 힘을 발휘해 상대방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현재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거나 매일 보도될 정도로 많아졌다. 조깅코스에서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그저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일렬로 죽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을 피해 가려면 꾸준하게 달리던 행위를 어찌 되었던 잠시 포기하고 그 사람들을 비켜 가야 한다. 그럴 때면 무엇인가 끊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만 원짜리로 된 오백만 원의 뭉치를 손으로 흥겹게 세다가 이백삼십만 원에서 끊어져 다시 세야 하는 허탈함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어지는 한 세계가 끝나버리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서 별로였다. 아주잠깐 짜증이 나지만 그것뿐이다. 잠깐의 응어리를 참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아주머니 무리가 오늘은 반갑기까지 했다.
4.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가 있을까’
마동은 일렬의 무리를 돌아 다시 달려서 뛰어나갔다. 지금은 레인시즌, 장마가 한창이다. 밤공기는 다른 날보다 더욱 무겁고 꿉꿉하고 후텁지근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등과 어깨에 땀이 배어 나오고 땀의 맛은 정말 짤 것이다. 짠 내가 풍기지 않는 것이 다행일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달리면서 나오는 땀은 그렇게 생각처럼 짜지 않다. 여름날은 겨울의 밤보다 밝아서 시야각이 좋다. 하늘도 환하게 보이고 구름의 유영도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남동풍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굼뜨게 가는 듯 느껴졌다.
‘남동풍?’
바람이 불었다. 여름밤에 부는 바람임에도 이질적인 바람이었다. 이전의 여름에는 도저히 맡아본 적 없는 바람의 냄새와 기운이었다. 앞서 일렬로 걸어가는 아주머니 일행 때문에 잠시 속도를 줄이는 김에 멈춰 서서 바람을 느꼈다. 확실히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어김없이 여름 속으로 가을의 바람이 차고 드는데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이질적인 바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일렬로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 장마기간의 조깅코스에는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이질적인 바람은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이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람이라는 것은 소리만 기생한다. 형태도, 형체도 없다.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저 얼굴을 약간 들어 바람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 같지만 존재감은 완전무결하여 독자성과 자체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바람이 힘을 모아 강해지면 인력으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바람을 잘 이용하면 풍력발전을 할 수 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바람은 미미하기만 했다. 바람이란 불어와야 비로소 바람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자동차가 만들어낸 바람은 진정한 바람이 아니다. 그건 단지 자동차 주위를 맴도는 난기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바람은 알 수 없는 곳, 마동이 상상하는 그 세계의 끝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잠에서 막 깨어난 요정들이 우르르 몰려오듯 불어와야 진정한 바람이다. 마동은 조깅코스에 서서 고개를 조금 들고 이질적인 바람을 느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이질적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일까’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무형의 앙금을 흩날리게 했다. 그리하여 마동은 앙금이 마음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앙금은 무엇의 앙금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막혀버리는 것이 마동이 요즘 느끼는 패턴이었다.
앙금에 대해서 심도 있게 생각해 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앙금은 진흙바닥처럼 쌓여있었다. 앙금 속에는 마동이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앙금도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동의 마음속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무엇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쁠 만도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소피아로렌의 머리숱처럼 강한 것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마동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두 손으로 떨 수 있을 만큼 가득 쌓여있었다. 손으로 떠 올리면 흘러내리는 앙금 속에 분명 누군가의, 마동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바람은 지속적이다. 계속 앙금을 흩날렸다. 게다가 바람은 그동안 마동이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몰고 왔다.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바람이 아니다 이건. 그러고 보면 마동은 자신이 꽤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마동은 매일 이 도시의 강변을 따라 나 있는 조깅코스를 달렸다. 그러나 이런 알싸함이 깃든 바람은 처음이었다. 기시감이 들기도 했고 흥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봄날의 아지랑이 냄새와도 달랐고 가을의 스산함과도 다른 바람이었다. 순간 마동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이 생각났다.
5.
치누크.
마동은 치누크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치누크가 왜 이 나라의 이 도시에, 이런 밤에 불어온단 말인가’
학창 시절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 기억 속에 과학적 견해 따위로 보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분명 치누크와 흡사했다. 마동이 서 있는 이곳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조단열률로 인한 기온의 변화를 느낄만한 푄이 나타날 지역이 아니었다. 습하고 찬바람이 산을 따라 올라가는 과정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이 따뜻하고 이질적인 푄은 분명 이곳에서는 전혀 나타날 리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치누크에 가까웠다.
마동은 사람들의 반응이 보고 싶었지만 이미 일렬횡대의 아주머니 무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외의 사람들 모습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는 무엇이 일어난다 한들 그 무엇은 평범한 일상 속의 한 부분이 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곳곳(교회, 체육, 교육)에서 성범죄가 만연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괴리가 있으면 폭주해 버리는 지금 시대의 이곳에서 치누크가 불어온다고 한들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마동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치누크는 지속적으로 마동의 등으로 와서 부딪혔고 기시감을 건드렸다. 여름의 지속 중에서 오늘처럼 장마 기간 속의 달리기보다 아주 무더운, 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어가고 밤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러한 무더운 여름날에 달리는 것을 마동은 좋아했다. 그런 날은 땀도 비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표현하기가 쉽진 않지만 어찌 되었던 대단한 경험인 것이다. 준비운동을 가열하게 하고 달리기를 시작해도 십오 분 정도까지는 달리는 행위가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운동은 가급적이면 신중하고 진지하게 해 줘야 한다.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고 굳어있는 근육을 전부 이완시켜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고통이 잠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기분 좋은 고통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느끼는 약간의 고통은 이전의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기에 참아낼 수 있다고. 어디서 읽은 것일까. 책일까. 영화 속 대사일까.
기억이란 꺼내려고 하면 자꾸 멀어져만 간다.
다리의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얻는 고통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이 기분은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모르는 이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우랄알타이어를 듣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준비운동이 끝이 나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십오 분 이상을 달리고 나면 속력을 높인다. 그대로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면 되는 것이다. 다른 건 없다. 그렇게 삼십 분을 넘어서면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숨이 가쁘다는 느낌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공포영화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할 줄 모른다고 ‘쏘우’에서 말했다. 쏘우는 이후에 꽤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며 후속 편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쏘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중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후속작을 속속 탄생시켰다. 흥행이라는 것은 사고체계를 무너트렸다. 그 점이 마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런 마음이 영화인들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다. 설령 들어간다고 한들 무시되기 일쑤다.
다리의 움직임은 일정한 보폭으로 멈출 때까지 유지한다. 조깅을 하고 삼십 분을 넘어가면 탄력을 받아 속력을 내며 달릴 수 있다. 그대로 두 시간을 달리면 데드포인트까지 치닫는다. 한계치에 도달해 보는 것이다. 4킬로 미터가량 뻗어있는 오르막길을 달리면 심장이 파열할 것 같고 다리고 돌처럼 딱딱해지는 게 느껴지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마동은 그것을 넘어서서 달렸다. 팔을 더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인다. 마동에게 달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데드포인트를 넘어가면 죽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6.
달리다가 사망한 사람들은 그 데드포인트 근처에서 멈추어야 했지만 그대로 넘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을 어떤 힘 좋은 신적인 존재가 그 포인트 너머까지 끌어당기는 것이다, 마약처럼. 잠도 없이 계속 몸을 움직여도 전혀 피곤을 모르는 철인이 된 것 마냥 그대로 데드포인트를 넘어가버리고 만다. 아, 하는 순간 보이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들 모두 심장이 터질 듯하고 숨이 차오르는 행위를 즐긴다. 그건 죽음의 입구까지 갔다가 오는 느낌을 맛보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전이라는 이름하에 그렇게 하고 있다.
마동은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비슷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마동에게, 왜 그런 느낌을 좋아하냐고 물어봐도, 그것은 말이죠, 하며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타인은 마동과 달리 확실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마동은 그렇지 못했다.
또 마동 입장에서 혼자서 달리기 좋은 이유는 스코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기로서의 달리기는 치열하고 수치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혼자서 하는 조깅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이 조깅이다. 경쟁을 굳이 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을 이기고 그 선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동은 오늘도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오늘처럼 낮 동안 비가 많이 내린 날은 그나마 밤에는 시원한 편이어야 하지만 오늘밤은 많이 무덥고 습한 날이며 치누크 때문에 몹시 기이한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마동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조깅이 좋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거나 상대가 있는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좋아하지만 마동은 시큰둥했다. 상방교류가 있는 운동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사람들은 상대방과의 교감도 되고 누군가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선호하지만 마동은 그렇지 않았다. 공을 찬다거나 던진다거나 콕을 친다거나 하는 운동은 아무래도 상대방을 신경 써야 한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라고 하겠지만 상대방과 같이 하는 운동이라면 나만 생각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마동에게는 그런 운동은 맞지 않았다. 상대방이 아프다거나 다른 일 때문에 같이 못하게 되는 경우가 두려울 수도 있지만 늘 같이 운동하던 상대방이 없을 때, 처음으로 돌아가서 혼자인 운동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마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땀을 쏟아내며 달리는 것이 마동에게 딱 맞는 운동이며 마동이 좋아하는 운동이다.
이 시간이 하루 중에서 가장 상쾌한 시간이었다. 마동이 매일매일 조깅을 하여 체중이 붇지 않는 몸매를 유지하니 사무실에서 같이 조깅을 하기를 원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조깅을 같이 한다는 것만큼 난처한 일은 없다. 특히 조깅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과 말이다. 달리는 행위를 같이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과도 비슷하다. 독서는 어쨌든 혼자서 하는 것이다. 부인과 한 침대에 들어도 결국에 잠은 혼자서 드는 것처럼.
조깅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마라톤을 준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페이스메이커가 곁에서 페이스조절을 해주겠지만 조깅정도는 마라톤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 분명 달리는 속도나 자신의 신체가 감당하기에 어울리는 코스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아직 파헤쳐지지 않는 미지의 덩어리다.
조깅이 건강학 적으로 인체에 좋다고는 하나 조깅이 맞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다.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범죄자들의 통계를 통해서 그들의 심리를 파악할 뿐이지 그들의 뇌 속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비슷한 범죄에 대해서 확실한 소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동은 달리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열거해 놓기를 좋아한다. 후자의 경우 하나씩 줄을 세워 늘어놓는다. 그러면 그것대로 하나의 기호가 되어서 노래와 함께 정리되어 있다가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하나씩 꺼낼 수 있다.
7.
주위에서 매일매일 하릴없이 보일 정도로 마동이 달리는 행위의 결과가 오직 몸매를 유지하는 것만을 보고 달린다면 결과를 얻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마동은 생각했다. 마동은 사람들에게 좀 더 본질적으로 달리는 것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그렇게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달리는 행위를 진정 좋아하고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모양새의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점도 모르고 회사의 직원이 같이 달리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같이 달리게 되면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달리면서 바람을 느끼는 것도, 머릿속의 생각을 나열하는 것도, 음악을 듣고 기호화시키는 것도 전혀 할 수 없다. 같이 달리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서 달리다 보면 마동이 유지하고 있던 자신의 패턴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달리는 의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마동으로서는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동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마동이 하는 작업이 어떤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일전에 회사에서 같이 달리고자 하는 직원의 부탁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서 같이 달렸다가 낭패를 보았다. 아마도 그는 마동이 일을 마치고 달리기 때문이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며칠을 그 직원의 속도에 맞추어서 달리다 보니 마동은 자신의 페이스를 찾을 수 없었다. 음악도, 상상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버려 며칠이 지난 다음부터 직원을 놔두고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직원은 옆에서 뒤로 처졌지만 뒤쳐진 대로 그 사람 나름의 패턴으로 조깅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조깅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된다. 하지만 그 직원은 달리는 것을 탁구나 배드민턴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달려주지 않았다고 그다음 날부터 마동에게 버림받았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그 소리는 회사의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퍼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나쁜 소문은 파도처럼 한순간에 사람들을 휘몰아 덮친다. 그리고 생명이 달린 눈덩이처럼 점점 부풀어 간다. 아이러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소란이 싫어서 조깅을 할 때 그냥 말없이 혼자 달리는 것이다. 그 직원은 마동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만은 간직한 채 서먹해졌지만 마동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해도 같은 사무실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분야도 달랐고 입사해서 잠시 인사정도 하는 사이인데 급격하게 살이 쪄 버리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마동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다.
요즘도 간간이 같이 달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동의 입장에서는 참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달리기가 좋은 이유 중 또 하나는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에 촌스러운 정장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서 일을 하고 있다. 정장바지라고 해서 다 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마동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무실 직원들은 마동에게 정장이 꽤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다. 정장이 타인보다 잘 어울리는 이유는 조깅 때문이라고 마동은 생각했다.
퇴근 후 조깅을 할 때에는 낮 동안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지인이 옆으로 쓱 지나친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소의 마동의 모습을 없애고 진짜 마동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으로 진입하면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려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창업을 하거나, 세계 일주를 한다거나, 어떤 것에 도전을 하기도 한다. 변이를 꾀하는 것이다. 마동은 매일 저녁이면 변이를 한다.
마동에게는 정장이 딱 두 벌이 있다. 여름에는 당연하지만 정장의 윗도리는 입지 않고 와이셔츠만 입고 출근을 한다. 사무실의 남자직원들은 대부분 대형마트에서 고르고 골라 그중에서 질 좋은 정장을 구입한 듯한 정장을 입고 있다. 대체로 그런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입사한 신입직원들은 맞춤형 정장을 입고 세련미를 뽐내며 일을 한다. 하지만 신입직원이 근래에 좀체 입사하지 못하고 있고, 입사를 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사정이 좀 복잡하지만 자신의 알아서 나가는 경우도 있고 계약서 위반도 있다)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인지 대부분 회사에서 꽤 오랫동안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8.
마동이 다니는 회사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화이트컬러는 그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을 입는 모습에 따라서 재능이라는 것이 나타날 리는 없지만 남자직원들이 입고 있는 정장의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어딘가 맞지 않아서 울이 진다거나 몸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정장이 리처드기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형마트의 정장코너나 백화점 세일기간 중에 구입한 인상이 강하게 풍겼다.
마동은 애당초 몸에 맞는 정장을 맞췄다. 가격은 꽤 비쌌지만 어차피 정장을 입을 바엔 몸에 맞는 정장을 구비해 두자, 하는 주의여서 두 벌을 그렇게 입사하면서 구입했다. 그 출혈이 심해서 입사당시에는 고생을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생활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정장과 자동차는 새것보다 질이 제대로 든 중고품이 훨씬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이라는 옷은 마동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정장 바지는 성견이 다 되어 데리고 와서 키우는 덩치 큰 개의 모습처럼 여겨졌다. 친하게 지내면서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 개처럼 말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깨의 잔 근육의 움직임도, 하체 근육의 꿈틀거림도 옷에 가려 전혀 볼 수가 없다. 자연이 준 육체는 옷이라는 인공적인 천으로 만들어진 물품 속에 숨겨놓고 있어서 자신의 진정한 육체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겨울 동안 육체는 두꺼운 옷 속에서 점점 불어나다가 봄이 되면 자신의 육체에 놀라서 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매나 불어난 몸에 관대해지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순을 거친다. 마동은 그동안 매일매일 꾸준하게 조깅과 근력운동을 한 덕분에 아직 군살이 붙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봐도 배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정도뿐이다. 대부분 열량이 높은 음식, 고칼로리음식, 과한 나트륨과 음주로 살이 많이 붙는다. 단체와 조직의 구조는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소비자들에게 자본을 이용해서 소비를 촉진한다. 그것이 사회가 제시하는 균형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생활하게 되어 있다. 그 구조라는 것은 움직임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뻔 한 기본규칙을 어겨버리라고 촉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구조에 익숙해져 간다. 기본이 잘 지켜지는 것이 조화와 균형이 맞아가는 것이지만 틀어진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방향을 달리했다.
마동이 일하는 회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사람들은 자기 관리에 더욱 철저해야 하지만 포기를 하거나 귀찮아했다. 수많은 의식의 ‘방해’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리추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조깅을 하는 모습을 봐온 사무실 직원들은 얼마 전부터 마동에게 조깅코스라든가 조깅에 적합한 운동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사무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동은 타이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조깅을 하는데 적합한 운동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인생이라 마동은 여기도 있다. 어느 곳이든, 무엇을 하든 그에 합당한 복장이 있다. 그런 트레이닝복은 가볍고 땀을 배출해 내며 낮에 달린다면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역할도 해주는, 기능적으로 탁월한 복장이다. 가슴근육이 드러나는 민소매의 상의와 허벅지에 착 달라붙는 칠 부 팬츠를 입고 나이키 조깅슈즈를 신는다. 조깅슈즈는 달리는 용도로만 나온 운동화여야만 한다. 발목의 비틀림을 잡아주고 땅바닥을 잘 디딜 수 있게 만들어지고 발을 착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조깅화가 좋다.
마동은 달릴 때 허리에 작은 냅색을 차고 그 안에 보조키와 약간의 현금을 넣고 달렸다. 휴대전화는 밴드에 넣어 팔뚝에 착용하고 음악을 들었다. 달리기 전에는 준비운동을 반드시 했다. 십오 분 이상,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근육에 긴장을 가해서 근육이 놀랄 정도로 준비운동을 했다. 매일 달린다 하여 준비운동을 게을리하거나 하지 않고 달리다가는 한 시간이 넘어가면 자칫 무릎에 무리가 올 수 있다. 준비운동이라는 것이 십오 분 이상 해주지 않고 오 분 정도 한다든가, 아니면 하는 시늉만 했다가는 육체는 금세 알아채고 신호를 보낸다. 이런, 주인님께서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조깅을 시작하셨군요!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신 거죠? 거참. 라며 신체의 하중을 무릎에서 크게 받아 이내 뇌에 신호를 보내게 된다.
준비운동을 가급적 얼굴의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쭉쭉 뻗어주고 풀어줘야만 한다. 근육에 텐션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가를 하듯이 다리에 힘을 주어 풀어주고 무릎도 천천히 돌려가며 잘 풀어준다. 양팔과 팔목, 발목도 잘 풀어준다. 이렇게 준비운동을 십오 분 이상 단단히 하면 가슴에 텐션이 가해지며 달릴 때 더욱 가슴근육과 가슴골이 두드러진다. 그렇게 해서 달리면 근육이 드러나는 잘 빠진 얼룩말이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육상선수만큼은 아니지만 준비운동을 잘하고 달리게 되면, 하지 않고 달렸을 때보다 단거리를 달리는 육상선수와 비슷한 근육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9.
마동은 달리면서 팔을 흔들면 삼두근위의 어깨근육이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강변의 조깅코스를 달리면 실제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여자들은 티브이 속 남자배우나 연예인들의 잘 빠지고 근육질의 몸에 관심이 있지만 야외의 조깅코스의 가슴근육이 발달한 남자에게는 관심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대부분 이제 운동으로는 근육을 만들 수 없는, 몸만들기를 포기해 버린 나이가 찬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게 된다. 달리고 있노라면 남자들의 시선을 꾸준하게 받는다. 맞은편에서 오는 중년의 남자는 박수를 치고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가 든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심도 있게 준비운동을 끝낸 다음 마음껏 매일 달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에 가까이 가게 했다. 낮 동안 몸을 덮고 있던 촌스러움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을 마동은 느끼는 것이다. 타인은 이러한 마동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 기분을 이해해 달라고 남에게 말하거나 내색하지는 않는 스타일의 마동이었다. 그동안 그래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지 타인이 마동 자신의 유일하게 즐기는 달리기를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달리기외의 운동이 마동과 맞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마동은 조깅을 하면서 냅색에 무엇인가 넣어서 달리며 휴대전화를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라도 언제나 마동은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스마트폰은 있어야 했다. 냅색에는 열쇠꾸러미가 있는데 집 열쇠와 사무실, 그리고 서랍열쇠가 같이 붙어있었다. 일의 특수성 때문에 사무실의 열쇠를 잊어버린다면 고작 그 일 때문에 회사의 오너가 나서야 하기 때문에 마동에게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회사 사무실의 모든 것이 오토시스템이지만 서랍과 사무실의 열쇠는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있었다. 열쇠는 손으로 들고 다니기에 아주 거추장스러운 물품이다. 그럼에도 열쇠는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고 열쇠는 그만큼 마동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개개인에게 지갑이 중요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지갑과 마동의 열쇠는 달랐다. 지갑 속의 내용물은 개인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일일이 따리고 보면 없어져도 다시 만들거나 발급받으면 그만인 물품이지만 열쇠는 특수성 때문에 잊어버리게 되면 회사의 작동이 멈추게 된다.
스마트폰 역시 마동에게는 소중한 물품이 되었다. 휴대전화는 요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마치 사랑한 지 일주일 된 애인처럼 대한다. 잠에서 깨어나 잠들기까지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생활이 불편해졌다. 의미는 다르지만 마동에게 스마트폰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깅을 하다가 회사의 직업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전화에 스케치를 하거나 메모를 해왔다. 메모는 마동이 하는 일에 관해서 여러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 메모가 없었다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무형의 것들을 그대로 놓쳤을 것이다. 붕 떠오른 아이디어를 잡아서 스마트폰 안의 스케치 애플리케이션에 잘 스케치를 해뒀다. 일에 관해서, 작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많은 양의 메모를 기입해 놨다. 생각이 번쩍 나면 언제나 기입을 했고 조깅을 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 있으면 휴대전화의 메모장에 기입을 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에 요긴하게 사용을 했다. 그래서 마동이 손을 뻗는 반경 내에 휴대전화기는 늘 있어야 했다.
마동이 지니는 몇 개의 물품은 팔뚝의 밴드와 허리에 찬 냅색에 들어있었고 마동과 함께 조깅을 하면 따라서 이동을 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대단히 거창한 일이라도 한다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이 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조깅을 할 때면 팔뚝에 찬 밴드의 휴대전화기에 블루투스로 연결이 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매일매일 달리지만 듣는 노래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지나간 팝스타들의 노래들, 그러니까 시시알, 데이빗 보위, 조니 미첼, 제네시스를 듣는다. 또 다음 날에는 클래식을, 어떤 날은 영화음악을, 또 다른 날에는 비비킹과 에릭 클랩튼이 같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음악을 듣는데 가리지는 않지만 최신가요만은 피했다. 왜 그럴까. 최신가요는 들을수록 듣는 시간을 축소시킨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최신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동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성의를 다해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업적으로 꽉 짜인 최신가요는 이 노래와 저 노래가 비슷한 공산품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전어회 맛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어회의 맛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10.
우리가 매일 음식을 챙겨 먹지만 음식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마동은 매일 다른 음악을 비타민처럼 섭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폴리시달의 음악을 들으며 달리고 있다. 라이브다. 폴리시달이라는 이름의 명성에 맞게 콘서트홀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여흥 또한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폴리시달은 자신의 공연에 여자가수를 초대했다. 여자가수는 신인이다. 큰 무대에는 처음 올랐다. 폴리시달이 먼저 그만의 독특한 음색과 특유의 기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와~'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파에 비해서 청중은 자제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신인여자가수와 폴리시달의 조화를 위해서이다. 세련된 팬 문화가 세련된 가수를 만들어낸다. 분위기가 ‘거대하다’보다는 ‘정겹다’에 가까운 공연의 느낌이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 때문에 정겹게 들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노래에 심취해서 달리다 보면 듣고 있는 노래가 전달해 주는 떨림은 몇 배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폴리시달이 부르는 노래의 파트가 끝나면 여자가수가 노래를 이어받아서 불렀다. 어쩐지 여자가수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의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다. 훈련을 받지 않은, 그저 음위에 몸을 실어 노래를 부르지만 잘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마동이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가수가 부를 땐(아마도 후렴 부분) 사람들이 다 같이 따라 불러준다. 곧이어 청중의 박수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폴리시달은 특유의 매너로 같이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수를 띄워주는 음을 불어넣어 준다. 노래에 생기를 한 단계 더 이끌어 울려줌으로 청중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중간에 색소폰의 연주가 나오는데 그 연주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색소폰이 내는 음에 어깨를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색소폰의 연주가 끝나고 폴리시달은 마이크를 청중에게 돌린 모양이다. 모든 이들이 후렴 부분을 열창을 했다. 휘슬소리와 환호가 한데 어우러져 들렸다. 여자가수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끝까지 뒤에서 폴리시달은 청중과 여자가수를 받쳐주는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여자가수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아마도 감격에 겨워 청중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폴리시달과 한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신인 여가수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어폰으로 짱짱하게 노래를 듣고 땀을 듬뿍 흘리며 한 시간여 동안 달린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며 매일 이러한 이벤트를 맛보는 것에 만족했다. 모든 것을 상상하게 된다.
마동은 찾아서 듣는 음악 속, 그 세계에서 짜릿함을 상상했다. 그건 마치 중학생이 옆집 대학생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상상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음악을 들으며 땅바닥이나 앞을 조며 꾸준하게 달리는 동안에는 꽤 여러 가지 상념이 지나갔고 마동은 그중에 몇 가지는 선택을 해서 상상하기도 했다. 보통 하루에 멍청하게 있거나 갖가지 공상이나 상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영화처럼 햇살이 들어차는 창가에서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거실바닥에 내려앉은 햇살을 밟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좀비처럼 일어나서 바로 화장실로 가 배설을 하고(아닌 사람도 있지만)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나와서(요즘은 굶는 사람이 더 많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카페주인과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아서 빠르게 한잔 마신 후 대중교통이 몸을 실어 회사로 고생 끝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중간에 시간을 내어 치과를 가야 하고, 은행에도 들러야 한다. 줄을 서서 기다려 맛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급하게 먹고 난 다음 다시 업무로 복귀하어 대쳐진 시금치가 되어 퇴근하는, 단순하고 반복된 사이클은 언제나 복잡하고 바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러한 패턴이 지니는 복잡성을 사람들은 균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상상 따위를 하는 것은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런 쓸데없는 공상은 자신을 어두운 공간에 유패 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을 마동은 많이 봐왔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상상력의 부재였다. 상상하는 것을 살아있는 지렁이를 먹는 것만큼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서 상상력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쁜 일상, 그 속에서 상상이니 공상이니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어쩌다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생긴다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를 여유롭지 못하게 사용할 뿐이었다. 여유가 생겨도 손에 들어온 모래가 빠져나가듯 종식시키고 만다. 현대인은 삶이라는 무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배당하며 그 속에서 주어진 ‘지배당하는 여유’를 바랄 뿐이었다.
11.
그런 점에서 마동은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마동이 하는 일도 특수성을 띠었고 보통 멍하게 있거나 꽤 여러 가지의 세계에 대해서 상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 이상해 보이기도 했다. 마동에게 사람들에 비해 다른 점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동은 타인 속에 교집합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삶이라는 것은 자꾸만 인간을 쓰러트린다. 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크레바스 끝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크레바스 끝에서 발을 잘못 디뎌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사람도 있다. 굴복하지 않으려면 삶의 무게에 당당해져야 한다고 어디에서건 떠들어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상력이 소거되는 순간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생활을 할 뿐이다. 24시간 중에 한 시간 이상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마동에게 주어진 여유를 행복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달리는 동안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다 보면 아주머니들의 무리를 제외하고 또 하나 거슬리는 것은 조깅코스가 강변이다 보니 주위에 나무, 강 둔치에 자라는 풀이 이룬 풀숲이 강을 따라 죽 나 있는데 그 속에 살고 있는 하루살이나 날파리가 많다. 달리면서 호흡을 하다 보면 입을 통해서 목구멍에 그대로 날벌레가 들어와서 불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조깅의 방해자들이다. 날파리 한 마리 따위 입으로 들어가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느낌은 기이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치아를 통해서 여러 갈래갈래 씹혀 분해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고 곧바로 입안에 들어간 벌레가, 생긴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다. 하루살이는 그대로 목으로 들어와서 기도의 벽에 찰싹 달라붙어버리는데 잔기침을 유발했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다. 기침을 할 때에는 목구멍에 붙어 있는 날파리 날개 가루가 온몸으로 번지는 착각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 역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마동 역시 조깅을 할 때 입을 약간 벌리고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면서 달리다 보면 작은 날벌레가 목구멍에 그대로 붙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무릎에 양손을 대고 잠시 쉬면서 기침을 한다. 달리는 것은 여지없이 중지해야 한다. 그렇게 잠시 멈춰서 자세를 다듬는 동안 흘린 땀은 모기들을 불러들인다. 잠깐 동안 운동화의 끈을 묶고 있는 와중에 모기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몰려들어 주로 접히는 부분의 피를 빤다. 무릎의 안쪽이라든가, 목덜미 또는 팔꿈치 반대쪽 같은 곳.
맛있게 피를 빨고 달아나는 바람에 어떤 날은 따끔하기까지 했다. 집에 있는 모기와는 다르다. 요즘은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모기는 예전에 없던 무서운 바이러스를 옮기는 이동매체가 되었다. 분명 서슬이 퍼렇고 추운 바람이 부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조깅하기 에는 더없이 괜찮은 환경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괜찮은 계절임에도 호러블 한 것이나 미저러블 한 것들은 끊임없이 마동을 괴롭혔다. 혹독한 추위가 세상을 뒤덮은 겨울이 되면 야외의 벌레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절지류처럼 말이다. 그것을 조화라 부른다면 그것이 균형인 것이다.
하지만 모기가 없다 하여도 추위가 사람의 등을 구부리게 만드는 겨울은 마동에게는 내키지 않는 계절이었다. 두꺼운 트레이닝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꾸준하게 뛰었다가 잠시 쉬는 동안 다시 몸이 식어버리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라는 것이 목욕탕처럼 바로 콸콸 나오지 않고 시간을 들여야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입김이 많이 나와서 착용하는 안경에 성애가 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수한 이치를 가르친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얻으면 싫어하는 것 하나를 가져와야 한다. 역시 이것을 균형이라 부른다면 균형이다.
12.
그 러 나,
오늘은 장마라고 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인간소멸에 가까웠다. 장마기간에 사람이 이렇게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작년, 재작년 여름의 장마기간에도 이랬었나 하는 생각을 더듬어 보지만 생각의 끈은 누군가 올해 초에서 깔끔하게 딱 잘라 놓아서 그 생각의 끝에 마동의 기억은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장마기간이라서 사람들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었다. 기이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쉽게 포기하는 것도 생활하는데 꽤 필요한 부분이었다. 드문 일이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마동은 평소에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어찌 되었던 강변으로 불어오는 단정 할 수 없는 치누크 바람을 맞으며 힘차게 달렸다. 그래봐야 빠르게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릴 뿐이었다. 달리는데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마를 입고 머리가 길었다. 뒷모습만 봐도 대번에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입고 있는 옷이 긴팔에다가 치마까지 아주 길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치마는 길었다. 여름인데 긴팔을 입고 술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틀거릴 정도로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으며 춤을 추며 걷는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모자람이 많은 걸음 걸이었다. 저렇게 걸어가는 모습의 사람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길거리 마임을 하는 예술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뒷모습은 마치 연극단원의 배우의 움직임 같았다. 지극히 뒷모습만 보여서 단지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동은 여자를 지나치면서 쓱 한 번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려 나갔다. 마동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더운 여름날에 긴팔에 긴치마의 옷을 입고 조깅코스를 춤을 추듯 흐느적 걸어가고 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 비해 오늘은 유난히 습하고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인 풍경이 조금은 단조롭고 다른 날에 비해 달랐다. 바람 역시 기시감을 자꾸 불러일으켰고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습한 공기를 폐에 집어넣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치누크가 자아내는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속에서는 곰삭은 마음이 일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작은 소용돌이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가슴이 뛰는 것과는 달랐다. 마동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늘 북적이던 조깅코스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일 보는 환경이 기이하게 달라지거나, 개체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거나 이하가 되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들인다.
그 순간 단조로움과 권태라는 고삐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면서 괴기한 모습으로 바뀌며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확 드러났다. 그리고 곧 암흑이 세계를 뒤덮어 버리는 장면까지 시야에 보였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13.
이것은 도대체 어떤 환영일까.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동은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을 애써 하지 않았다. 전경이라고 불리는 시야가 만들어낸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했다.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탄 그것들은 목이 없는 몸이 전부였다. 소름이 돋았다. 때를 가리지 않고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몸의 털이 바짝 솟구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눈앞에 그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만약 지금 내가 본 환영이 실제의 현실이고, 달리고 있는 지금이 현실이 아니라 다른 편의 세계라면? 마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 번씩 마동은 세계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는 경험을 했다. 마동의 의지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돌연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동안에는.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몹시 지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환영처럼 가끔씩 보이는 다른 세계는 근래에 들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지금의 세계가 전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었다. 세계가 어둠으로 종식되기 전에 마동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마동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딘가 이상한 이야기만 자꾸 한다. 글자로 치마를 만들었다느니, 캔 깡통의 맛은 달다고 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동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동의 눈을 보는 것 같은데 자세하게 보면 눈 뒤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며 말을 한다. 마동은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동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눈에서 약간 떨어진 밑이나 옆의 어디를 계속 보며 이상한 말을 쏟아낸다. 마동은 다른 사람에게 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마동의 눈을 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상한 말을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상해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하늘이 점점 검은색으로 뒤덮인다. 바뀐 세계의 암흑은 물엿처럼 찐득하고 무서운 검은색이다. 하루에 한 번, 내지는 이틀에 한 번씩 무의식 중에 그런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눈앞에 나타났다.
이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아니다. 마동이 그동안 생각했던 다른 세계는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환상의 곳, 오즈의 먼치킨 마을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암흑이 온 천지를 뒤덮는 세계는 아니었다. 비록 우울하지만 엘리스가 재버워키를 물리친 마을의 풍경정도라면 괜찮았다. 그렇지만 마동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진 광경은 무참했고 무차별적인 폭력이 만들어 놓은 세계였다. 폭력에는 당연하게도 정당성은 배제되어 있었고 이유나 폭력의 강도도 알 수 없었다. 마동이 바라는 이계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자장수처럼 미쳐야만 해’ 쳬셔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쳬셔의 말은 분명 이상한 나라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데도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미쳐야만 한다.
14.
여름은 여름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지 십오 분을 넘어가면서 땀이 목덜미를 내려와 가슴을 타고 가슴골로 흘러내렸다. 액체라는 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점성과 성분을 떠나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점점 몸에 텐션이 가해지면서 달리는 속도를 조금 더 냈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 가며 마동은 사람이 없는 조깅코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어폰을 통해 폴리시달의 노래가 끝이 나고 안타까운 비비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십 여분을 달렸다. 하늘은 속살이 비치는 에이프런 속옷처럼 구름이 엷었다. 엷은 구름 속에 또 다른 구름이 보이고 그 속에 또 다른 구름이 보였다.
이퀴벨런트.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조깅을 하는 사람도, 걷는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대나무공원이 나온다. 마동은 조깅을 하다 대나무 공원이 나오면 그곳에 잠깐 멈춰 서서 다리를 풀고 숨을 고른다. 이 도시는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60년 전에 떠들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작은 강(이라고 하지만 바다로 이어지는, 도시를 가르는 총길이가 50킬로미터가 넘는)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농경마을의 단락이 군데군데 있을 뿐 도시라는 형태를 갖췄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지엽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해안가를 둔 이곳을 제1의 임해공업단지로 조성을 하는 계획 하에 세계 최고의 수출을 목표로 제조업을 전국에서 긁어모아 이 도시에 집결시켰다. 그 결과 당시 전국의 노동을 집약적으로 발휘하여 생산품을 수출하면서 제조회사도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수출의 성과를 거둬들임으로 해서 경제적 발전이 꾸준하게 일어났다. 70년대의 부흥기를 거쳐 80년대에 정착기와 이후 황금기를 도시는 맞이했다. 현재 서울과 수도권의 위성도시가 배부르게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소리가 있음에도 이 도시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수도권의 사람들에 비해 적었다. 각종 농산물을 근교에서 직접 재배하고 수확하여 타지방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여 그대로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질 좋은 농수산물을 공급했고 선박과 철강의 수출이 세계 최고조에 달했으며 선박의 제조에 필요한 부대부품의 생산 공장도 속속들이 생겨나서 생산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타지방에서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이 도시에 몰려들면서 과포화를 이루었고 큰 기업에서는 노조가 생겨나 매년 노동파업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 도시는 경제가 발전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다. 건축에 관한 산업의 발전이 없어서 타 도시에서 들어온 건축업자가 대부분 이 도시의 고층건물의 신축과 증축에 관여했고, 문화에 대한 발전은 아기의 걸음걸이 속도만큼 더디었다. 근래에(최근 7, 8년 사이에) 문화와 여가생활의 발전이 경제발전의 밑거름이라는 토대로 시청에서 문화 사업이 시행 중이었다. 하청을 둬서 추진 중이고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강을 살리는 노력과 그에 따른 조경 사업을 차곡차곡 착공하고 있는 추세다. 그 계획 하에 50킬로미터가 넘는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다양한 체험형식의 인공자연 숲이 조성이 되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에는 시에서 너구리를 방사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마동은 대나무 숲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습한 공기 때문인지 무릎에서 땀방울이 살갗을 뚫었고 정강이에서도 땀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인적이 없는 가운데 조깅코스 저 앞에 검은 무엇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엇일까?
마동은 달려서 앞으로 갔다. 여름밤은 겨울의 밤만큼 어둠이 짙지 않다. 밤이라는 관념은 또 다른 세계, 그것이다. 과연 밤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인생은 어떤 삶으로 이어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인생에서 밤이 사라져 버리는 삶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반대로 밤의 세계만 펼쳐진다면 또 어떨까. 그 나름의 세계가 있어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밤이 오면 사랑하는 이들의 스킨십도 더욱 로맨틱해진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의 활동도 밤이 되면 잠잠해진다.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하던 종합병원의 내과병동도 밤이 도래하면 환자들의 잠자는 소리와 낮은 기침소리로 조용한 악단을 조성한다. 밤이 되면 누구나 인상주의가 되고 현실에서 벗어나 시인이 되고 주인공이 된다.
15.
소설가들의 첫 소설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의 한가운데를 지나 새벽녘에 대부분 탄생되었다. 겨울의 깊은 밤, 산울림의 ‘독백’을 들으면 고독의 실크로드 속에 발바닥을 디디는 기분이 든다. 산울림의 독백을 통해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다. 밤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고독으로의 항해는 밤이 깊을수록 방향이 뚜렷해지고 밤의 정취 속에서 자아는 밤으로 녹아들어 버린다. 밤이 다가와 고독해지는 것은 지극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조용히 읊어 보기도 한다. 밤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오늘은 수고했구나,라며 괜찮다고 끊임없이 속삭여주고 그 힘을 얻어 밤새도록 깨어있고 싶지만 마술에 걸린 공주처럼 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잠들어 버리고 사람들은 꿈을 꾼다.
밤이 무서워 도시를 환하게 불 밝히지 마라고 하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밤의 어둠은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죽음에 맞닿기 직전까지 같이 가야 할, 가족보다 더 친밀한, 이불 같은 관념이다. 글귀가 있던 책에는 도시가 자아내는 불빛이 강하여 그 존재를 돋보이려 해도 밤은 제 몫을 확실하게 해낸다고 했다. 어둡다고 말할 수 있는 밤이 새삼 정겨웠다. 밤이 깊어지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낮게 드리운다. 작은 난쟁이들이 타협점을 찾으려 올라오고 밤하늘의 별은 그들의 앞을 비춰줄 것이다. 밤은 여름보다 겨울이 깊이가 더 있어서 겨울밤에 더 강하게 끌린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름밤이 좋다. 마동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낮 동안은 느껴볼 수 없는 은유를 여름밤이 되면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밤에는 확실하게 밤의 언어가 존재한다.
마동은 밤이 주는 아름다운 색채를 머릿속에서 상기하며 조깅코스를 달려 앞에 보이는 검은 물체 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모습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달리기를 출발하여 조깅코스의 시작점을 지나면서 봤던 긴팔의 긴치마를 입은 그 여자였다.
마동은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조깅을 하다 보면 아무리 조깅화의 끈을 질끈 동여매어도 신발 안으로 미세한 돌멩이나 먼지덩어리가 들어온다. 그것은 매일매일 밥을 먹듯 조깅을 할 때마다 조깅슈즈 속으로 무례하게 들어왔다. 신발안의 작은 돌멩이들을 무시하고 그냥 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동은 그렇지 못한 축에 속했다. 마땅하겠지만 달릴 때 운동화 속으로 들어온 아주 작은 돌멩이는 신경을 건드렸다. 달리는데 발바닥에 가시 같은 자극을 주는 그 작은 돌멩이 때문에 제대로 달리는 행위에 집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운동화를 벗어서 신발을 털어냈다. 운동화를 끈을 풀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달리는 패턴이 끊어져버린다. 몸을 풀어주는 사이 마동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러너들이 마동을 앞질러 저만큼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멈춰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가버리는 인생 따위의 법칙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작은 돌멩이나 덩치가 큰 먼지덩어리가 조깅슈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미세한 돌멩이도 왜 그런지는 모르나 사람들이 많은 날에는 유독 두세 번씩 신발 안으로 들어왔다. 돌멩이들은 인적이 드물 땐 신발 안으로 기어들어오기를 회피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질까. 확실히 움직일 수 없는 작은 돌멩이나 알갱이들이 사람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동되어 온 탓이 아닐까.
작은 돌멩이는 유전자처럼 사람을 따라서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사람이 없는 날에는 지금까지 운동화 속으로 작은 돌멩이가 들어오지 않았고 마동은 아직까지 쉬지 않고 꾸준하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처음 출발 코스 근처에서 봤던 긴팔에 긴치마의 느린 걸음걸이를 가진 여자가 마동보다 저만치 앞서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초의 일렬횡대로 걸어가던 아주머니 무리를 지나쳐 왔고 그녀들은 코스 중간에서 집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 마동은 꾸준하게 같은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걷는 사람은 마동의 속도를 앞질러 갈 수는 없다. 운동화에 들어간 돌멩이가 없어서 아직 달리는 패턴이 깨지거나 멈추는 행위 없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전혀 없지 않은가. 마동은 처음 봤던 그 여자가 아닌가 싶어서 빠르게 여자의 옆을 지나치면서 곁눈질로 보면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보니 처음코스에서 지나쳤던 여자가 맞았다. 도저히 아니라고 하기에는 행색과 옷차림이 너무나 특이했다. 저 여자도 운동 중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옷차림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여자는 마동을 앞질러 나가서 저만치 앞에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달려서 조깅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도 속도나 차림새가 어색했다. 일단 치마가 너무 길었다. 저런 차림을 하고 달려서 마동을 앞질러 갔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16.
긴치마를 입고?
원피스처럼 생긴 옷을 입고? 흠.
하지만 타인의 문제이니 마동이 이렇다 저렇다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앞을 보며 걸어가는 그 여자를 지나쳐 빠르게 달렸다. 마동은 그만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시야각은 대단한 각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카메라회사에서 인간의 시야각과 흡사한 각도의 렌즈를 만들어내느라 고심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곁눈질로 쳐다봐도 시야각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감지가 가능하다. 어두워서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정면을 꼿꼿이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면만을 바라보는 이지러진 눈빛에 마동은 그만 매료됨과 동시에 연민스러운 섬뜩함도 동시에 느꼈다. 이것 역시 마동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섬뜩함이 잠시 들었지만 마동은 앞을 보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긴팔에 긴치마를 입은 여자를 스치며 마동은 조깅코스의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그저 그러면 되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느꼈던 섬뜩함 따위는 사라진다. 노래는 서태지의 인터넷전쟁이 흐르고 있었고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파멸 위한 발전 또다시 겪을 세계 전
네가 버린 그 독한 폐수가 어린아이 혈관 속을 파 내려가
단단하게 박혀 새로 탄생할 오염변이체 항상 나 자신을 위협한
난 내 자신에게서 저항한 결국 나 내게 경고한
우련 결국 스스로를 멸망케 할
우리들, 인간은 편리해진 시대에 어쩌다가 태어나 발을 들이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편리함인지 인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편리함이 장마처럼 대량으로 주어진 환경 속에 쏟아져 사람들은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를 건지지 못하고 있었다. 편협하고 경멸적인 어조와 이기심으로 뭉쳐진 개인이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복잡해진 삶 속에서 단순함을 찾으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굉장하다고 불릴 만큼 복잡해진 시스템 속에서 반복을 강요받고 그렇게 적응해 가다가 문득 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면 난처해하고 일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조화와 균형이 깨져버린다. 그 순간 상상력도 같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상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바이러스 끝없이 맞서는 백신
온 세상 지천에 널린 어덜트 갤러리
감춘 칼날이 어린 우리 아이 머릿속을 훌린
아동학대 자학변태 소녀들을 노리는 추태
천태만상의 실태 애석하지만 너
안터넷전쟁처럼 세상은 혼잡하고 불투명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뉴스전문 채널에서는 연일 성추행 범죄에 대한 뉴스와 성희롱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종교집단의 우두머리는 어린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 했고, 여고생을 가리키던 선생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성추행을 범했다.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조차 자신도 모르는 채 입 밖으로는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성범죄와 이혼율은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줬지만 어느 순간 휙 하며 순서가 바뀌어 버렸다. 성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썼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범죄자들은 성적인 욕망을 채우고, 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 때문인지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구타를 일삼고, 저항하는 여자들을 기이한 모습으로 처참히 죽이기까지 했다. 죽어버린 여자의 성기에서 죽은 쥐가 나오기도 했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어떤 누구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을 같은 인간이 무참히 죽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꽤 여러 가지 부류로 나뉘며 거기서 또 여러 갈래의 인간으로 나뉜다. 변두리에 속한 인간들 중에 몇몇은 내면의 자아가 이성을 짓누르고 밟고 올라타서 껍질에 불과한 육체에게 성적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찾아서 욕구를 풀어버리라고 강요한다. 성범죄자들 중 많은 수가 제대로 교육을 받고, 올바르게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올곧게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인 것이다.
17.
마동은 살고 있는 독신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늦은 시간에 탈 경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과 동승하는 일이 벌어지려고 하면 그냥 계단을 걸어 올라가 버렸다. 이미 사회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렇게 한 여름에 긴 팔과 긴치마를 입고 무방비로 걸어가는 여자는 성범죄에 노출이 되어 있다고 불 수 있다.
땀을 쏟아내며 달린다는 것은 이런저런 해학에 관한 것들을 상상할 수 있고 마동이 보낸 하루 동안의 오만함에 대해서도 반성이 가능했고, 노래를 듣고 그 가사에 맞게 서사를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마동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하는 일의 작업에 관한 부분에 기여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 전쟁이 끝나고 노래는 조지마이클로 바뀌었다. 조지마이클이 이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의 목소리는 더 멋지게 들렸다. 두서없는 음악이 끝없이 이어폰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노래를 들으며 가사에 집중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나무공원까지 달려와 버렸다. 보통은 이곳에서 몸을 풀고 다시 달려 나갔다. 대나무공원에 도착했을 때, 긴치마를 입고 느릿느릿 걸어오던 여자가 다시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뇌 속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이 들어 어지러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이 잘못 본 것은 아니다. 앞서가는 여자를 보고 멍하기만 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성범죄가 만연하는 것과는 다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일이 아니다. 비록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나 마동은 지극히 리얼한 인간이었다. 현실에서 미신이니 형이상학적 궤변 등은 마동의 문화권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이라도 일단 눈앞에 실체가 보여야 한다. 실체를 받아들인 다음, 그다음에 허구적인 공상과 상상이 가능한 논리를 적용시키는 타입니다. 그것이 마동이 하는 일과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저 여자는 어떠한 논리나 정의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사전적 해석으로 확정 지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없는 관계로 대나무공원에서 몸을 풀지 않고 바로 달려서 지나치려고 했지만 공원의 벤치에서 잠시 멈추어서 몸을 풀기로 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조깅코스에서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계속 달리다가 다시 멈추었다가 또다시 달려 나가는 것을 반복하면 달리는 기복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같이 이렇게 달리기 좋은 날에는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앞으로 뻗어나가는 행운이 주어지는 것이다.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어딘가에서 활자나 문형이나 어떤 방식으로든 개념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결단코 진리가 아닌 사실은 될 수 있으면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지금 보는 저 여자에 대해서 어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믿어 줄 사람도 없지만 마동 역시 입 밖으로 꺼내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지 꽤 진지하게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 봤지만 답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마동은 몸을 풀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저 여자를 뒤따르며 관찰했다. 여자는 걸음걸이가 영화화면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며 걸어가는 비현실적인 걸음처럼 보였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가 걸어가는 속도보다는 빨라 보였지만 어쩐지 걸음걸이는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져있는 듯했다. 누군가 억지로 걷게 하는 모습처럼.
여자의 걸음걸이는 리듬을 타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걸어가는 것뿐이지만 걸음걸이에는 설명이 안 되는 미묘한 체념이 있었다. 행복과 불행이 보이지 않았으며 걷는 행위가 효율적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걸어가야만 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걸음걸이였다. 천천히 조금 걷다가 잠시 멈추는 듯했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고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다. 처음 봤을 때처럼 얼핏 보면 술에 취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이겠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걸음걸이였다.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겠지만 치마 밑단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보통 걷는다고 하면 다리를 교차하며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치마는 그 반동으로 어떤 식으로든 침묵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저 여자의 치마는 그러한 논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전혀 치마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하. 지. 만. 여. 자. 는. 분. 명. 히. 천. 천. 히. 걷고 있음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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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처럼 꾸준히 앞으로 가는 것에는 ‘속도’라는 것이 따라잡을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토끼가 한눈을 팔고 멈춰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마동은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조깅코스를 달려왔다. 여자가 마동보다 앞서 걸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마동은 여자를 지나치면서 자세하게 봤다. 어둠 속에서 흐린 달빛과 가로등불빛을 받아서 보이는 저 여자와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흑발이었다. 밤이지만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아주 강한 흑발, 여름의 밤보다 몇 배나 짙은 검은색이었다.
이런 얼토당토 안 한 상황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나 눈에 들어오다니.
강변을 따라 치누크가 한번 크게 불어왔다. 이질적인 바람은 마동의 마음에도 묘한 파동을 일으켰고 반사적으로 강변의 모습을 이전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치누크가 불어와 대숲을 흔들고 얼굴에 있는 땀방울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바람이 물고 온 기이한 냄새는 지나간 시간의 냄새이기도 했고 닿지 못한 먼 곳에서 시작하여 이곳까지 불어온 바람처럼 느껴졌다. 치누크는 당연히 한여름의 중간쯤에 불어오는 그런 뜨거운 바람이 아니었다. 온도도 그렇지만 냄새가 달랐다. 한여름의 바람 냄새라는 것을 딱히 해석할 길은 없지만 후욱하고 폐로 들어오는 습한 바람의 냄새가 아니었다. 지금 불어오는 치누크의 냄새가 그랬다.
보통 한여름의 냄새는 환영받지 못한다. 냄새라는 것은 싫든 좋든 인간의 코를 통해 뇌로 전달이 된다. 냄새의 싫고 좋음을 뇌는 인지를 한다. 마동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름에는 그러한 냄새가 도처에 존재한다. 그것과는 다른 냄새가 바람을 따라와서 풍겼다. 지금 불어오는 치누크는 얼굴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바람이 마동을 스쳐 걸어가는 여자에게 도달했지만 여자의 머리카락은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마동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실체와 비논리가 톱니바퀴에 의해서 서로 어긋나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동시존재하고 있었다. 치누크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부터 무엇인가 비틀어지고 이질적이라고 판단을 해야 했다.
오늘은 조깅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인간은 유기체라는 것, 미묘한 물질의 세포형질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마동은 늘 상기하고 있었다. 인체는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을 지극히 피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의 사이클을 꼬박 쉬지 않고 돌린다면 어느 순간에 삐거덕한다는 것이다. 피곤한 날은 조깅을 피하고 다른 거리를 찾아봐야겠다고 한 번 생각했다.
얼굴만 빼고 긴팔이 긴치마를 입은 여자는 이렇게 무더운 날임에도 지나칠 때 보니 전혀 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창백하고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온몸을 소중한 보석으로 감싸듯 두꺼운 옷으로 꽁꽁 가렸다. 흑발의 머리는 길어서 허리까지 내려와 더욱 더워 보였지만 더위를 전혀 타지 않는 체질일지도 모른다. 병 때문에 여름에도 긴팔과 긴치마를 입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팔다리에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저 여자는 이 모든 가설과 함께 겨울을 너무 좋아하는 체질인 것이다. 그래, 한 여름에도 가죽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겨울을 동경하는 사람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의 향과 겨울의 온기와 겨울의 따뜻함을 좋아한다. 추운 계절이 전하는 따사로움의 위배를 사람들은 사랑했다. 일 년 동안 자주 내리는 비와는 다르게 겨울에는 눈이 있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커피 향도 어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은 겨울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동은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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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흠뻑 흘릴 수 있어서 좋아했고 크리스마스가 없어서 좋았다. 애써 겨울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여름은 조깅을 하며 흘린 땀이 빨리 마르지 않아서 좋았다. 오래전에는 역시 겨울이 자신에게 맞는 계절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마동 자신의 오해였다. 계절에게도 오해를 하다니,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언젠가부터 마동의 육체가 먼저 여름을 반겼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여름 속, 여름의 밤을 신혼의 주말부부가 일주일을 건너 만났을 때처럼 반겼다. 봄이 지나 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하면 마동의 몸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고 축제준비에 돌입한다. 짧디 짧은 여름의 밤이 출발을 알리면 신체는 여름밤의 정취 속으로 달려들어 한없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새벽에야 힘이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마동에게 있어 여름이라는 계절은 몸을 마음껏 풀어줄 수 있고 달려고 겨울만큼 힘들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름이라는 계절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대체로 막연하고 땅 밑의 지층의 비틀림을 걱정하는 불투명한 걱정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여름에는 한 시간 반 이상을 달려도 기분만은 상쾌하다. 열기가 가득한 여름에 두 시간을 걸으면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한 시간을 달리면 맑은 정신이 되었다. 조깅 후에 차가운 물로 진지하게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폭력적인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여름에만 가능했다.
겨울이라는 계절에는 따뜻한 냄새가 도처에 널려 있을지 모르지만 마동의 몸은 겨울에는 민감해졌다. 건조해진 피부는 가려움을 유발했고 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긁어버리면 긁은 살갗에서 피가 올라왔다. 피부의 표피를 뚫고 나오는 피는 마동 자신의 피가 아닌 듯 보였고 자다가 일어나서 피를 닦고 나면 긴긴 겨울밤을 가려움과 싸우며 눈을 뜨고 지새우기도 했다. 그저 건조해서 그렇다고 병원에서 말하지만 마동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동의 신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라는 찬란한 계절을 육체는 잘 받아들이고 실컷 적응해 놨는데 겨울이 오면 신체가 투정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터무니없지만 겨울이 되면 그런 생각을 내내 하게 되었다.
날이 차가워지면 나라에서 지정한 명절이라는 연휴가 있다. 명절은 식칼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명절 이전과 이후의 환경을 싹둑 잘라버렸다. 더불어 마동의 신체도 명절의 경계를 지나 달라졌다. 명절이 오면 고향으로 갔다. 경진 군에 있는 고향집을 찾았다. 경진 군 삼리면의 고향 집에는 여생을 밭일을 일구며 지내온 어머니가 있다. 명절이 오면 경진 군의 고향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명절기간 동안 오전에 그곳의 동네를 한 시간 이상 달렸다.
공기가 맑고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조금만 달려도 숨이 막히고 힘이 들었다. 도시생활의 반복적인 패턴에 익숙해져 있어서일까, 늘 달리는 곳을 벗어나서 어색한 땅을 밟으며 달리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체 역시 고향땅에서 달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왜, 어째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인사를 할 만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다가 문득 명절은 말 그대로 뚝하고 끊어져 버린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마동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라든가, 늙으면 이곳으로 와서 살아야 하는 성찰은 없다.
여름이 지나고 12월이 다가올수록 명절도 다가오고 연말이 되면 회사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행사도 반갑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달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회식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마동이 다니는 회사는 다른 회사에 비해 회식의 횟수가 적고 사원들이 비교적 술에 절어있는 회식을 즐기지 않음에도 회식을 가지게 되면 몇 명은 흙탕물을 만들기 마련이다. 술과 담배냄새와 새벽까지 지속되는 언어유희의 향연은 전쟁만큼이나 싫었다. 하지만 마동은 회식에 참석을 해야 한다. 마동은 입사하여 앞만 보며 일을 해서인지 부서의 팀장이 되었으며 회식자리에서 뜬금없이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그들의 말을 스케치했다.
연말에 가지는 회식자리에는 회사와 연계되어 도움을 주고받는 타사의 사람들도 참석을 하기 때문에 오너는 연회자리에 항상 마동을 대동했다. 연회를 가지고 난 이후의 뒤풀이와 회식자리를 마동은 그동안 피해왔다. 그렇지만 오너는 회식자리도 중요한 하나의 이음새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죽 참석하게 되었다. 어떻든 그렇게 해야 다음에 오는 일 년을 나름대로 아무런 사고 없이 무탈하고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생각대로 생활을 하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 역시 조화와 균형이라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한 해가 지나간다는 덧없음에 또 기분이 상하고 결락을 맛본다고 해서 사람들은 겨울의 끝에서 끈을 놀칠 수 없어했다. 그리하여 연말에는 취객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과는 다르게 마동은 겨울, 그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신체가 여름을 더 받아들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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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평이하게 주어지는 하나의 스톱워치 같은 것이다. 일련의 난잡하고 조잡한 부조리의 나열 속에서 반복되는 과정의 귀결 같은 것이다. 흘러가는 한 해의 덧없음이나 감성에 호소하며 지나가는 막바지의 끝을 아쉬워해 본 적은 마동은 없었다. 달리는 행위로만 따지자면 겨울에는 무엇보다 계절의 탓으로 달릴 때 얼굴만 빼고 몸을 중무장하고 달려야 한다. 그것이 마동이 탐탁지 않았다.
조깅이란 무릇 가벼운 몸으로 한 시간 이상 끝없이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땀을 듬뿍 흘린다. 단지 그것인데 겨울에는 추위가 몸을 옷으로 꽁꽁 감싸 매고 달리게 만들었다. 그런 겨울을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다. 겨울에 두껍게 입고 달리는 것이 싫어서 gym을 찾아서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실내라는 곳도 겨울만큼 마동과 맞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다. 실내에서 이런저런 운동을 한다는 것이 마치 살찐 햄스터가 되어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운동을 해야 했다. 비슷한 복장의 모습을 한 남자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와서 비슷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비슷한 숨쉬기를 하며 비슷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운동을 하는 곳이 실내 운동장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장면이 연상이 되었다. 전부 인상을 쓰며 말없이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 비슷하게 죽는다. 그 공포가 점점 확산되어 간다.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다음 날 또 한 사람이 피를 토하며 죽는다. 벌벌 떨었고 공포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헬스클럽을 삼키려 한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선동을 한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을 하려면 여러 개의 문장과 연구결과에 입각한 사실을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이미 반박을 준비하는 것 역시 선동에 당한 것이라는 괴벨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한 사람의 말에 자신의 마음도 믿지 못하게 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범인은 상대방이라고 서로 외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다. 스티븐 킹이 실내체육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죽음을 소설로 써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스티븐 킹은 이런 따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실제 헬스클럽이 영화 속의 모습과 다른 점은 헬스클럽에서의 운동도 지극히 혼자만의 운동이지만 클럽장이나 트레이너, 먼저 들어온 회원은 신입회원에게 친절함을 보이기 위해 관심이나 간섭을 한다. 그저 내버려 두기에는 안타깝거나 안 된다는 무언의 의무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마동에게 이런 운동은 이렇게 하는 게 좋다든가, 이 기구는 이렇게 들어야 하지, 같은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저 트랙을 달릴 수 있으면 만족했지만 의도치 않게 아령이나 근력 운동에 필요한 운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마동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마도 마동이 이렇듯 싫어하는 겨울을, 저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는 무척 좋아하는 계절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에도 ‘왜’라는 의문은 꼬리표처럼 붙었다. 필시 불가결한 어떠한 무엇에 의해서 저 여자는 겨울을 단맛 가득한 딸기무스케이크만큼 좋아하거나 더위를 타지 않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까지 생각하고 마동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나무공원에서 몸을 살며시 풀면서 여자의 걸음걸이를 쳐다보고 있으니 비가 한 두 방울 우두둑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비는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런 레인시즌에 내리는 비는 더욱 그러한 모습이 짙었다. 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 십여분 힘 있게 떨어지다가 인간의 모습에 놀라 달아나버리는 새떼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조깅 중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여름에 중구난방으로 내리는 비는 일기예보관들까지 난처하게 만들었다. 특히 소나기의 경우 더 그랬다.
계절 또한 변이하고 있었다. 한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어가는 날, 밤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시멘트나 아스콘 특유의 냄새를 사람들의 코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건조한 여름날에 내리는 비 비린내도 지금처럼 장마 기간 중에 떨어지는 냄새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는 시멘트냄새와 뒤섞인 비 비린내를 저쪽 세계에서 어떠한 문을 쾅 열고 통과하여 나온 것 같은 묘한 냄새를 풍겼다. 한여름의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는 실내 체육관에서 역기를 드는 남자들처럼, 얼굴의 표정을 일그러트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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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이렇게 비가 후드득,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비 비린내가 자아내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땀과 함께 얼굴을 타고 가슴골을 지나서 배로 내려가는 빗방울의 느낌은 아주 좋은 기분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떨어지는 비는 정의할 수 없는 흥분을 자아냈다. 조깅코스 어딘가에서 비를 피했다가 다시 달려가면 되지만 마동은 비를 맞으며 조깅코스의 앞으로 달려가려는 강한 끌림을 받았다. 이처럼 잡아당기는 끌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끌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마동은 알고 싶었다. 알고 싶다는 욕망적 근원이 팽창하며 마음속의 어느 부분에서 일렁거렸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마동은 다시 전위를 가다듬고 달리기 시작했다. 긴팔의 긴치마의 여자를 쓱 지나치며 곁눈질로 여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동의 목적은 어쩌면 여자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함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시 정면을 응시한 꼿꼿한 눈동자 속에는 ‘적당히’를 넘어선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과 차가운 감성이 서려있었다.
잠깐 스쳐 지나치는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어째서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것일까.
저런 복장으로 필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운동을 목적으로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미동도 거의 없이 조깅코스를 하릴없이 걷지는 않을 것이다. 장마기간의 스산한 밤에 비까지 내려 더욱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거닐다가 혹시 취객들에게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볼까.
마동은 그런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요즘처럼 성희롱 때문에 떠들썩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그저 지나치는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는지 놀랐다. 마동은 고개를 저었다. 스쳐가는 한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동은 지나치는 여자에 대해서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났다. 마치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스치는 여자의 눈동자는 차가운 달처럼 보였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 달이 마치 작은 수정으로 축소되어서 여자의 눈동자를 대신해 조깅코스의 앞을 밝히며 걸어가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여자의 눈 속에 비친 달은 무거운 침묵을 잔뜩 지닌 채 어떠한 말에도 함구할 거야,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고 하늘의 달을 여자는 자신의 눈 속에 고이 안착시킨 후 앞으로 이동했다. 마동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아 이래선 조깅을 하는 것은 무리다. 생각하지 말자.
마동은 다시 고개를 여러 번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카락 끝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차가운 냉철함이 여자에게 받은 첫인상이었다. 비가 투두둑하며 거친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여자의 근처에서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여자의 옷깃이나 머리카락을 전혀 적시지 못했다.
뭐지? 몸에 어떤 장치를 한 것일까? 어째서 비가 여자의 몸을 적시지 못하는 것일까.
마동은 달리면서 팔뚝을 쳐다보았다. 팔뚝에서 열을 내며 방출시킨 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아서 시원하다는 감촉이 분명하게 전해졌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굳이 설명 따위로 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논리로 설명을 하려면 비에 젖지 않는 저 여자 쪽을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 마동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혼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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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전문의에게 상담의 길을 열어 놨다. 정보화시대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이 시대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죽 다니려면 정신이 올바른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반’과 비슷하다. 흔히 사람들은 기반을 잡는다는 말을 한다. 기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기본반찬의 준말일까. 그렇다면 끼니때마다 기본반찬을 먹으며 생활하기가 쉬운 일일까.
회사는 그간 동종업종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직원들은 사내에서 또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가해져야 하고 그 노력 속에는 일반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해들이 얽혀 있었다. 인간은 유기체다. 그 점을 나는 시시때때로 각인하고 있다. 스트레스의 출발은 여러 사람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해도 도착지점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제각각인 것이다. 각각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축적하거나 방향성을 잃은 채 배설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회사는 직원들의 일탈을 예방하기 위해서 연계한 정신과전문의에게 정기적으로 모든 사원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다. 상담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각자의 고민과 상담시간은 본인이 느꼈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생활이 불편하다고 생각이 들면 전문의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회사 내에서는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직원들이 상담을 받고 있으며 그중에는 꽤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는 직원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아직 상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중학교 때 이 도시로 흘러 들어와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의 필요성을 덜 느끼고 있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것이 스트레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뇌를 창으로 찌르는 고통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도 언젠가는 상담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가 단지 언제인지 확정 지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그것 이외에 나를 따라다니는 잠재적 고통이 있다. 분명 정신과상담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기억이 상실된 부분이 있다. 고등학교시절에 나는 어떠한 계기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입원한 경위에 대해서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할뿐더러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에 대한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입원을 하여 눈을 떴을 때부터 기억은 생생하지만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때 당한 사고와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상실되었는데, 그 부분이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고향에 머물렀던 어머니가 병원으로 와서 나의 간호를 맡았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몬스터의 얼굴 같았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부어있었고 두드려 맞아서 폐허 속의 부서진 담벼락처럼 제멋대로 멍이 들어 있었다. 눈이 부어서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를 단춧구멍이 겨우 거울을 통해 보였다. 거리감이 상실되어서 손으로 거울을 어느 지점에 대고 봐야 하는지 거리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게 무슨 일이 있었죠?” 나는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지만 어머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고 의사에게 매달려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나의 옆에서 낫기를 바라며 고요하게 간호를 할 뿐이었다. 나는 이후 의사에게 직접 들었지만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말은 여러 명이라는 말이다. 누가 나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때렸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할 만큼 어떤 짓을 벌이면서 지내지 않았다. 친구도 거의 없었고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불량배들에게 그렇게 당했을 거라는데 본 사람도, 신고를 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의사는 여러 명이 때렸다고 해서 이런 식의 멍이 드는 경우는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뇌의 자기 공명 단층촬영을 통해서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곳도 뢴트겐으로 촬영해 본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나왔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뇌의 어느 구간에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상이 없다는 뇌 생리학 전문가의 소견이 있었다. 그렇다면 믿을만했다. 그렇지만 현재에 와서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이나 고등학생 때, 당시의 기억이 소멸된 것으로 보아 그 의사의 소견을 철저하게 믿어서는 안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당시에 머릿속에 대해서 좀 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구체적인 소견을 들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후회가 가끔 들기도 했다.
23.
후회라는 것은 건강한 후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후회가 있다고 키가 작고 머리통이 큰 심리학자가 말했다. 그 당시에 확실한 것은 어머니의 변화였다. 어머니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어머니를 지탱하고 있던 어떤 것이 누락되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어머니에게 입력되어야 할 어떤 부분이 머릿속에 기입되지 못하고 그대로 빠져나가면서 원래 지니고 있던 자아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마음과 머릿속이라는 대지에 세워놓은 건물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건물 안의 집기들만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하룻밤 새 그대로, 몽땅, 흔적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변화는 내가 입원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내가 병실에서 눈을 뜬 그때부터 어머니의 변화를 감지했다.
평소에도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명절에 찾아가서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한 곳을 응시하는 시간을 많이 가진다는 것이다. 티브이를 보는 경우도 드물었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정해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정되지 않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부르면 그제야 얼굴 가까이 있는 나를 알아채고 식사준비를 하곤 했다. 전화통화를 하면 안부를 묻고 그날의 이야기를 하지만 어딘가 겉도는 이야기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어머니의 마음의 누락을 가져왔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의 건강검진도 나쁘지 않았다. 노안으로 나타나는 몇몇의 징후를 제외하고는 장기라든가 대부분의 기능은 아직 말짱했고 치매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누락시킨 그 무엇이 내 기억까지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닌지 나는 의심을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뒤로 제대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정신과상담을 미루고 있는 형편이지만 언젠가는 상담을 받아 보리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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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깅코스에 보이는 저 여자의 모습은 그동안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마동의 머릿속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마동은 전문의와의 상담을 ‘언젠가는’에서 ‘내일’로 바꾸었다. 비에 젖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몸에 무슨 장치를 하지 않고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도 너무 이탈한 궤변이었다. 논리라는 관점이 전혀 없는 일이다. 레인시즌에는 비가 많이 온다. 비가 떨어지면 세상은 비에 젖는다. 여름나무가 젖고, 여름 나뭇가지가 젖고, 여름나뭇잎이 젖는다. 땅바닥이 젖고, 땅바닥의 흙이 비에 젖는다. 해변이 젖고 바다 위의 배가 비에 젖는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이 비에 젖는다.
마동은 지금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 비가 오면 비에 젖는다는 것은 논리다. 그것이 사실이고 정론이며 공식이고 상식인 것이다. 그동안은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은 논리에서 벗어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마동은 기억이 상실한 부분과 어머니의 누락된 부분과 저 여자는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동은 지금 자신의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사고로 인한 정신적인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난다던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면서 뇌의 여러 구간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동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특정 부분에 대해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닐까 의심을 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눈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24.
마동은 오컴의 면도날을 대입시켜 긴팔의 긴치마를 입은 여자가 비에 젖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대입하려고 했지만 첫 관문에서 막혀 버렸다. 마동은 생각을 다시 시작점으로 돌렸다. 어쩌면 저 여자는 옷 속을 비에 젖지 않는 장치로 채웠을 것이다. 그 장치가 조금 추하기 때문에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것을 일기예보를 통해서 전해 들은 회사는 그러니까 저 여자가 속해있는 회사(이 회사는 비에 젖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 회사로)는 직원인 저 여자에게 실험을 목적으로(대신 사 내에서 더위를 타지 않는 여자에게 월급 이외의 보너스 수당을 듬뿍 지급하기로 합의를 한 다음) 인적이 드물 것 같은, 오늘 같은 날의 강변 조깅코스를 천천히 걷게 하는 것이다.
회사는 우산 없이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할 뿐, 비에 젖은 것은 바퀴벌레만큼 싫어했다. 우산을 드는 것도 사람들은 귀찮아했다. 회사는 프로젝트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개발은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빠르게 걸으면 비에 젖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속도를 붙여가면서 실험을 이어 갈 것이다. 회사의 연구팀은 어딘가에서 여자를 주시하거나 사무실에서 무선망으로 그 결과를 그래프로 받아서 체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나니 어느 정도 이치에 맞아 들어갔다. 그런데, 저렇게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감에도 달리는 마동을 앞질러 앞서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채워도 바닥이 드러나는 그릇처럼 막막했다.
그래,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마동은 더 이상의 생각은 해롭다고 느끼고 그대로 달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늘 하던 대로 그저 달리는 것이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평소와 같을 것이다. 내일 당장 상담을 받아 보는 것에 마동은 자신과 합의를 본 후,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타인의 일인데 뭐, 하며 여자를 지나쳐 앞으로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긴팔의 긴치마의 여자가 옆에서 뒤로 멀어져 갔다. 달라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모습은 곁눈질로 볼 때보다 확실히 미. 스. 터. 리. 했다.
키는 163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돼 보였지만 키가 커 보였다. 긴치마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높은 구두를 신어서 그럴 것이다. 굽 속에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키가 커 보였다. 확실하게 그렇게 보였다. 마동의 키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면서 본 여자의 키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멀어지면서 보면 여자의 키는 상당히 커 보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자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왔다. 여자는 외국의 매력적인 모델인 안젤라 카사모안의 얼굴과 닮았다. 그렇게 보였다. 눈매가 동양인의 것이 아니었다.
안젤라 카사모안과 닮았다고는 했지만 분위기는 달랐고 화장이 진한 안젤라에 비해 옅은 화장이 여자의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매는 브리티시여자들처럼 쑥 들어가 있었다. 입체감이 드는 눈매였다.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을 보는 듯 비현실적인 눈이었다. 그래서일까. 눈동자의 깊이가 몹시 깊었다. 깊은 눈동자는 떨어지는 비에도 전혀 깜빡임 없이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고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로지 걸어간다. 앞으로 가는 것 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은 것처럼 보였다. 긴팔을 입었지만 타이트해서 팔이나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 기이하고 신비스러워 보였다.
여자가 입고 있는 긴팔에 긴치마의 옷은 블랙계통의 옷이었다. 이 밤에 홀로 뜬 달을 시기하듯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비를 뿌리고 있어서 달빛이 너무 미미했지만 연약한 달빛을 받아서 상의의 자수가 살짝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은 여자의 얼굴과 함께 신비스러움을 가중시켰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달빛이 미미하게 비치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밤이었다. 치누크가 불어와 기시감이 떠올랐다면 자수의 신비한 빛은 기시감을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구체성이라는 것이 불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여 무엇인지 감지해내지는 못했다. 마동은 이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 상담을 통해서 다 쏟아내야 할 것만 같았다.
25.
비가 내리고 있어서 달빛이라는 빛이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약했지만 비와 달빛이 공존하는 밤이다. 만약 달이 냉정하고 온전한 달빛을 쏘아낸다면 상의에 박힌 자수는 어떤 빛을 반사시킬까. 아니다, 그런 밤이면 사람들이 몰려나올 것이고 저 여자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원피스였다. 연극이나 뮤지컬무대에서 주인공이나 입었을 법 한 드레스다. 원피스는 여자의 육체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그녀의 콜라병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치를 숨길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혼란스러웠다.
치마는 무릎 부분에서 밑으로 펑퍼짐하게 퍼지는 스타일이었다. 누군가 해코지를 하고 도망쳐도 따라갈 수 있는 기능을 겸비한 옷이 아니었다. 상의는 브이네크라인이었고 목 아래로 파였는데 여자의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나 보였다. 여자의 가슴골은 남자들의 마음을 흥분시킨다. 가슴골이 선명하게 보이는 여자는 옷 속에 숨겨진 가슴을 떠올리게 하고 만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가슴골이 도드라지게 옷을 입은 여자들의 심리까지는 세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가슴골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길이 기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동은 여자의 가슴골에 그동안 시큰둥해왔다. 한데, 지금 조깅코스에서 지나치는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여자의 가슴골을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맙소사.
이렇게 여름의 비 오는 날이면 섹스가 하고 싶어 진다는 글을 본 적이 있지만 지금처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몰아닥칠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날에 섹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하지만 더운 여름밤에 비가 내리면 마동의 머릿속 뇌의 여러 구간에서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섹스가 하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온다. 마치 그렌델의 엄마인 물의 마녀가 물 밖으로 서서히 올라오듯 차올랐다. 어디선가 비가 오는 날이면 남자의 정액은 맑아지고 수가 많아지고 더욱 생생해진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더운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여름밤이면 섹스가 더욱 하고 싶어 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가 내리고 가슴골이 깊게 파인, 이지러진 눈망울의 신비로운 여자를 조깅 중에 보니 마동은 자신도 모르게 달리면서 발기를 해버렸다.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서버리고 말았다. 난처했다.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조깅코스에 사람이 없어서 그야말로 낭패에서 벗어났다. 휴우 하며 숨을 쉬었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의 앞섶을 사람들이 본다면 분명 마동을 변태성욕자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런 남자를 조깅코스에서 마주친다면 마동 역시도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이렇든 저렇든 의도하지 않는 발기로 체육복 하복의 앞이 불룩 튀어나왔다. 조깅 중에 발기를 한다는 것은 마동에게 있어서 첫 경험 같은 것이었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에 발기가 되는 예는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외국 여자처럼 생긴 기이한 여자의 가슴골을 압도적으로 페니스를 발기시켜 버렸다. 그것도 조깅을 하는 도중에 말이다. 발기는 비가 떨어지는 야외에서는 섹스를 더욱 강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금 여자와 섹스를 하게 된다면(야외의 한 곳에서) 비록 조깅코스에 사람들이 없다고 하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야외이기 때문에 타인을 의식해야 해서 긴장감이나 스릴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이런 생각에 도달해 버린 것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마동은 야외에서 섹스를 하는 생각의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고 있었다. 이미 마동의 생각은 여자와의 야외섹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마동은 고개를 세차게 자꾸 흔들었다. 이상했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생각, 그리고 신체의 반응.
26.
마동은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는 사람들이 없으면 조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리에 힘을 더 주었다. 더불어 내일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상담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확실하게 접근했다.
볼썽사납게도 트레이닝바지의 앞섶은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채로 달리는 모습이라니.
사람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마동은 발에 쥐가 났을 양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발기가 수그러질 때까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조깅코스에 사람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없기에 마동은 그대로 달렸다.
평소에 조깅코스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 그들은 왜 오늘은 운동을 하러 나오지 않는 것일까. 담합이라도 한 것일까.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부 집안에 콕콕 박혀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도 조깅코스에 몇 명은 굳은 결의를 한 얼굴로 달리는 것에 전념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들마저 없다. 일렬횡대로 시끄럽게 걸어가던 아주머니들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전혀 없는 덕분에 발기한 채 마동은 조깅을 했다.
발. 기. 한. 채. 로. 조. 깅. 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떤 남자가 발기한 채로 조깅을 할 것인가. 마동은 그 신비로운 여자와 빗속에서 섹스하는 모습을 자꾸만 머릿속에서 그렸다.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버려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어두운 야외에서 섹스를 하는 모습이 마치 어제 일처럼 다가왔다. 머릿속의 환상은 사춘기 시절 ‘꿀벌들’에 나오는 성기를 죄다 벌리고 있는, 입술이 두터운 금발의 이름 모를 외국 여자와의 하룻밤을 꿈꾸는 청소년처럼 환상이 실제처럼 다가왔다. 가슴골 속의 가슴이 드러나는 모습에 마동은 꽤 격한 흥분이 섞인 소리마저 냈다. 이럴 수가! 더 이상의 조깅은 무리였다. 앞으로 더 달려봐야 틀림없이 조깅에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호흡이 멋대로 되면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남녀는 도대체 몇 살까지 섹스에 흥미를 가질까.
신비로운 여자의 가슴골이 생각이 났고 여자의 매혹적인 눈빛이 또 생각이 났다. 여자는 지금쯤 뒤쳐져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 터였다.
비를 맞지 않으며.
마동은 여자가 궁금해 다시 뒤로 돌아갈까 하고 생각을 했다. 돌아가서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먼저 어디 아픈 건 아니냐, 병원에 가보지 않겠나, 아아, 너무 진부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길거리에서 말을 걸기란 하루에 버스가 몇 대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 택시를 만나는 것처럼 어렵다. 말을 걸면 백이십 프로 거절당하거나 쳐다보지도 않는다. 용기라는 건 어디에도 쓸모없는 하찮음 따위로 전력하게 된다. 마음에 드는 이성을 길에서 보고 말을 걸고 만남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경우는 용기와는 무관하다. 남성의 외모가 조지 클루니나 그레고리 팩을 넘어설 수 있는 외형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길거리를 지나가다 이성에게 말을 걸어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술을 마시기란 있을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은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어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여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으로 머릿속이 잠식되어 간다는 것을 마동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자의 가슴골이 눈앞에서 아른아른거렸다.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화면은 신경조직의 시냅스를 타고 시야에 그 모습을 선연하게 나타내주었다.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터의 홀로그램처럼 말이다. 마동은 이전의 자신을 생각해 봤을 때 여자의 가슴골을 본다고 해서 이렇게 끌림이 들었던 경우는 없었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이렇게 잡아당기는 끌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27.
마동에게는 트위터로 대화를 꾸준하게 해온 이역만리에 떨어진 미국에서 생활하는 성인여배우가 있다. 그녀는 적당히 풍부한 가슴과 날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과 섹시한 가슴골을 지니고 있다. 어쩌다가 그녀와 트위터로 친분을 쌓게 되어 대화를 하며 지내고 있지만 그녀의 가슴이라든가 알몸을 본다고 해서 끌림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꽤 많은 세계의 남성 팬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팬들이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보이는 경우를 본다면 마동은 조금 예외였다.
회사에서도 가슴골이 살짝 드러나는 블라우스를 입은 여직원이 몇 명 있다. 그녀들의 가슴골은 사무실 남자들의 시선과 호흡에 영향을 주었다. 미세하게 드러나는 여직원의 가슴골은 남자직원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누구도 도덕이니 윤리 같은 언어로 그녀들의 가슴골을 가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녀들, 본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적어도 마동이 볼 땐 그렇게 보였다. 개성이며 하나의 자기표현 방법인 것이다. 여직원들 중 단연 돋보이는 여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는 언제나 단추가 두 개는 풀어져있다. 그러한 모습이 도전적이고 커리어 우먼스럽고 그녀에게 잘 어울리며 세련되어 보였다. 숲의 정령이 인적이 없는 숲 속에서 공간을 이동하듯 그녀에게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 이면에는 여직원 역시 자기 관리에 시간 투자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력을 들여서 군살이 불지 않게 하고 근육에 텐션을 가해주며 뒷모습이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노력을 했을 것이다. 사무실남자들과 타 사무실사람들까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적어도 마동은 그 여직원만의 매력에 끌림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녀의 다른 매력에 눈길이 간 적은 있었지만. 까지 생각하고 사무실의 그녀에 대해서는 생각을 접었다.
마동은 조깅코스에서 스친 여자가 발산하는 기이하고 무차별적인 끌림에 대해서 회피하려고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의 다른 한 편은 그 끌림의 강한 유혹에 현혹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도 섹스에 대해서 강력한 자기장에 끌려가듯 그녀에 대해서 이끌림이 들었다. 얼핏 봤던 여자의 가슴골이 폭격기처럼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모르고 미사일을 쏘아댔다. 페니스는 아직까지 가라앉을 줄 모르고 트레이닝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마동은 멈춰 서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양손을 무릎에 대고 숨을 할딱거렸다. 비는 소나기처럼 갑자기 거세졌다. 후두두둑 떨어져 어깨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밀어냈다. 치누크가 불어 빗줄기에 각도를 더했다.
휘이잉.
치누크가 스며든 비를 맞으니 마동은 비 오는 야외에서의 섹스에 대한 갈망이 더욱 밀려들었다. 섹스란 모름지기 은밀한 것이라 남의눈을 피해야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야외에서는 웬일인지 누군가에게 신비로운 여자와의 은밀한 행위를 들킬지도 모른다거나 섹스를 하며 누군가 훔쳐보고 있을지라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더 흥분이 되었다. 섹스란 모호한 것이다. 쉬쉬하는 것이지만 존엄한 생명의 탄생 역시 섹스로 인해 이루어진다. 가장 음지에 있는 곳에서 제일 반짝이는 위대한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무모순성 속의 모순이다.
마동의 생각의 수위는 점점 고조되었고 위험한 최음제를 다량 복용한 기분이 들었다. ‘에로틱 마인드’를 쓴 존 모린은 ‘사람들은 약간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환희와 재앙 사이에 위험하게 걸쳐 있을 때 가장 강력하게 흥분한다’라고 말했다. 모린의 방정식에 따르면 자극 플러스 장애물은 곧 흥분이라는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성인남녀 40% 이상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섹스로 야외섹스에 동그라미를 쳤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닭살부부라는 애칭까지 있을 정도였던 부부도 시간의 폭격에 무방비하게 당하게 되면 불행을 맞이하고 나이가 들면서 밋밋해지고 무관심해진다. 권태로운 부부는 한번 따라 해도 좋을 것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한꺼번에 뇌리에 훅하며 밀려들었다.
28.
[1일째]
언제나 희미했다. 우리는 철길 위에 누워서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태양빛은 언어를 잃어버릴 만큼 따스했고 불안정한 마음을 쓰다듬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들꽃이 기찻길 주위에는 만연했고 코를 간질이는 바람이 불어와 누워있는 우리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옷이 두껍지 않았고 버드나무의 아름드리가 보이는 것이 아마도 봄인 듯했다. 저 멀리 울타리가 보였고 기찻길 옆으로는 무성한 숲도 보였다. 숲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 같았다. 나는 내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따뜻했다. 그녀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에 나는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기만 했다.
내가 눈이 나빠진 걸까.
그녀의 얼굴을 점점 충분히 볼 수 없어졌다. 희미한 얼굴 속에 나를 보며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눈을 한 번 비볐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지만 나는 그 입모양을 볼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누운 채로 그녀 옆으로 좀 더 다가가려면 언제나 꿈에서 깼다.
마동은 종종 같은 꿈을 꿨다.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내용의 꿈이 지치지 않고 반복되었다. 그 속에서 헤매다가 깨어났다. 꿈의 시작과 끝은 없고 늘 중간만 있을 뿐이다. 전경은 확실했지만 옆에 누워있는 작은 여자 아이의 모습은 언제나 희미했다. 꿈속에서 마동은 어렸다. 요즘 입고 있는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마치.
눈을 떴을 때 마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느꼈다. 오늘 이전의 날과 지금이 다른 점은 눈을 뜨니 18킬로그램짜리 작은 아이가 몸을 누르고 5킬로그램짜리 덤벨(dum-bell) 두 개가 몸속에 들어와 가중을 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무거웠다. 일어나는 것이 힘겹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어젯밤 조깅을 하다 모기에 물렸는데 목 언저리가 따끔거리고 가려웠다. 따끔함이 지속되는지 신경이 쓰였다. 무의식적으로 물린 부분에 손을 대고 긁었다. 물린 주위가 부어있었다. 콧물은 나지 않았지만 코가 막히는 느낌도 들었다.
설마 감기인가.
한여름에 감기 기운이라니, 마동은 매일매일 조깅을 하는 탓에 감기를 앓아 본 적이 없다. 그동안은.
군대에 있을 때 제대하기 전에 부대에서 감기가 한 번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심하게 감기를 앓으면서 감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후에 감기는 동네의 개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감기바이러스는 마동과 동떨어진 단어였다. 세균이란 무더운 여름에 창궐하고 바이러스는 차가운 계절에 나타나는 것에 비한다면 여름날의 감기기운은 마동에게 그야말로 이질감이 드는 무형질의 몹쓸 것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이러스도 변이를 거듭하여 무더운 날에도 에어컨의 바람을 통해 사람들의 틈 속으로 파고들었다.
침대에서 서서히 일어나서 욕실을 향해 구울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역시 힘겨웠다. 욕실까지 걸어가는 것이 이렇게 힘겹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으려고 거울을 보니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오전에 충혈된 눈을 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욕실의 거울을 통해서 바라본 얼굴은 평소에 자신의 얼굴과는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여름감기기운 때문인지 조소 가득한 핏빛 서린 눈동자와 멸시가 서려있는 표정이라서 또 한 번 놀랐다. 어쩐지 다른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29.
거울 속은 꼭 마동이 서 있는 바깥의 세계와는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 그림자가 마구 돌아다닐 것 같고 무생물이 생물화되어 있고 오목성 때문에 모든 것이 조금 일그러져있는, 그런 세계 같았다. 거울에 비치는 욕실의 모습은 안과 밖이 같았지만 거울에 비친 상이 시계를 넘어서 마동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현실의 몸에 구멍을 내고 싶어 하듯 거울 속의 상은 마동을 확실하게 힘을 실어서 노려보고 있었다. 비슷하게 보이나 완전히 차단된 다른 공간의 세계처럼 거울 속의 공간은 부피나 밀도가 달라 보였다. 조금 겁이 났다.
이 모든 현상이 감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거울을 통해 보이는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 아닌 듯 일그러져 보였다. 푸석하고 거친 피부의 결을 지닌 마동 자신과 닮은 얼굴은 분명히 달라 보였다. 마동은 거울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에 묻은 물기 때문에 거울의 표면이 일렁거렸다. 거울 속의 짚더미처럼 생명력이 없고 나무껍질처럼 거친 피부의 또 다른 마동이 거울 속에서 손을 들어 마동과 똑같이 움직였다. 감기가 생각보다 심했다. 지금부터라도 얼굴의 피부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도용 세이빙크림을 산타클로스의 수염처럼 골고루 턱에 바른 다음 질레트 12 날의 면도날을 이용해서 수염을 깎고 크림을 씻어냈다.
면도날이 평소처럼 잘 들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런 것인지 면도날의 닳는 시점이 오늘부터인지 잘 들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염을 깔끔하게 깎이지 않았다. 12 날의 면도날은 한 번에 수염이 깔끔하게 깎이는 면도날 중에서는 가장 좋은 것이다. 면도날을 이용해 여러 번 수염을 깎으면 피부에 손상을 주게 된다. 하지만 마동은 한 번 더 면도날을 사용해서 칼국수의 장인이 반죽을 하듯 진지하게 수염을 밀었다. 씻어내고 난 다음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어제와 별반차이가 없이 깔끔하게 수염이 깎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달랐다. 달라진 점이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그 변화를 눈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었다. 언어로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달라지긴 했다. 마동은 거울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얼굴을 씻어냈다. 턱을 약간 들고 다시 돌려가며 확인을 했다. 육안으로 달라진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동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오늘은 정신과상담도 신청해야 하고 회사의 업무도 집중을 해야 한다. 바쁜 하루가 펼쳐질 것이다. 옷을 입고 나오는데 집안이 꽤 서늘하게 느껴졌다. 역시 감기다. 아침은 매일 챙겨 먹고 싶어서 언제나 조금 일찍 일어나서 회사 근처의 던킨도넛으로 간다. 거기서 오전에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세트메뉴를 먹는다. 그곳이 아니면 집 근처의 베이커리에서 갓 만들어낸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거나 맥도널드에서 역시 세트메뉴를 먹고 출근을 한다. 베이커리의 샌드위치를 자주 사 먹지만 오늘은 좀 늦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샌드위치는 다 떨어지고 만다.
오전을 맞이하는 회사원들에 비해서 비교적 마동은 부지런한 편이라 집에서 30분만 일찍 나오면 아침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한 시간 일찍 나온다면 신선한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잠깐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아침시간에 유리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풍경은 대부분 허둥지둥하며 출근하는 모습뿐이지만 마동은 느긋했다. 부지런하면 오전에 사치라고 불리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시간의 사치는 누구나 누릴 수 있지만 아무나 그것을 손에 쥘 수는 없다. 출근하기 한 시간 전이라 아침을 먹을 때는 천천히 진지하게 먹는다. 정크 푸드지만 최대한 시간을 들여 씹어 먹는다. 그런 류의 음식은 몇 번 씹지 않아도 입안에서 금방 부서져 쉽게 꿀꺽 목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몇 번 씹지 않고 넘기게 되면 한쪽으로 씹을 수밖에 없기에 정크 푸드를 좋아하는 이들의 특징은 턱이 비대칭으로 틀어져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기에 의사들에게 얼씨구 좋은 일만 시키게 된다.
진화와 멸종, 그리고 비대칭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건 하나의 법칙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동은 양쪽으로 골고루 많이 씹었다. 그 행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음식을 빨리 먹지 않는 것이다.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씹어 먹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아침을 먹으며 트위터로 알고 지내는 미국에 있는 성인배우와 잠깐 대화를 한다. 마동이 아침을 먹을 시간이면 그녀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한두 시간 전이다. 마동은 그녀와 꽤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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