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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08. 2024

건물 속에서 9

소설



9.


[앗, 엄마다. 도망가자]라고 말하는 순간에 소녀의 엄마에게 잡히고 말았다. 소녀의 엄마를 보니 킴 와일드였다. 아니 킴 와일드의 스타일을 너무나 닮은 여자였다. 우리는 킴 와일드를 닮은 소녀의 엄마에게 붙잡혀 소녀의 집으로 갔다. 소녀와 나는 소녀의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킴 와일드를 닮은 소녀의 엄마는 [집이 어디니? 우리 애와 언제부터 친구니?] 같은 말을 하는데 너무 친근하고 부드럽게 말을 해서 좋았다. 가족 같았다. 그때 소녀의 집에 소녀의 할아버지가 왔다. 소녀의 할아버지는 노신사였다. 나는 흠칫했다.


 노신사는 안드로이드다. 내가 지금 행복하게 꾸고 있는 이 꿈을 깨려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젓가락을 들고 노신사를 경계하며 인사를 했다. 노신사는 그 온화한 얼굴을 한 채 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나를 보는 눈빛에서 나는 노신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실에 갔던 할머니도 왔는데 화장실에 들어갔던 그 할머니였다. 노신사는 나의 꿈을 깨트리지 않았다. 시간을 벌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계획에 있는 건지 몰라도 아직 깨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다 같이 모여서 밥을 먹고 나는 소녀와 방에 들어왔다.


소녀의 방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소년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그전에 되어 있었지만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소녀의 방에서 알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가 어른이었을 때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알았다. 나는 소녀에게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소녀는 샤프와 공책을 주었다. 샤프? 이거 많이 보던 샤픈데. 나는 내가 어른이었을 때, 여기 오기 전, 건물에 들어왔을 때를 적으려고 하는데 그만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어른이었다는 건 아직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다른 건 기억이 없다. 소녀의 얼굴을 보니 낯이 익다. [너, 너는 누구니?]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장막이 걷히고 모든 환경이 픽셀조각이 되더니 수천 조각으로 흩어지고 건물 안의 모습이 되었다. 내 앞에 노신사가 서 있었다. [선생님을 좀 조사해야 했습니다. 화장실을 발로 찬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라고 말했다.


[저기, 그런데 여기 이곳은 어떤 건물입니까? 2층에서 나비도 보았거든요]라고 나는 말했다. [나비는 이런 곳에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선생님의 착각일 겁니다. 나비가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라고 노신사는 말했다. 그래, 맞아. 노신사의 말이 맞다. 2월에 나비가 나타날 리가 없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잘못 본 것이 너무나 많다. 나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내가 목욕탕에 갔을 때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탕 안으로 여자들이 들어왔다. 놀라서 왜 남탕에 들어오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코로나 이후 목욕탕에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목욕탕들이 전부 남녀혼탕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자주 오던 곳이라 당연하게도 간판도 보지 않고 그냥 들어와 버린 것이다. 여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목욕하라고 했다. 본다고 크게 문제 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뚱이 그거 그렇게 옷 속에 감추고 사는데 목욕탕에서만큼은 그냥 내놓고 시원하게 목욕을 하라고 했다. 맞아,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중요부위 따위 뭐 그렇게 볼 것이 있다고.


[그런데 화장실은 왜 못 가게 하는 겁니까]라고 나는 노신사에게 물었다. [화장실에 언젠가부터 오류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게 정확하게 뭔지 모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찾을 수가 없습니다] 노신사는 그러더니 양 손바닥을 자신 쪽으로 손을 들더니 순간 공각기동대처럼 손가락이 수십, 수백 가닥의 전선으로 분리되었다. 분리된 전선은 화장실 근처의 콘센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다. 노신사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노신사 몸 주위로 지지 지직 하는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씨발. 나는 뒤로 두 발 물러났다.


빠지직 빠지직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노신사의 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하며 몸이 떨리더니 전류를 견디지 못하고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노신사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맙소사, 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나는 계단으로 달렸다. 계단으로 나가는 문틈으로, 천장에서, 벽에서 피가 파도처럼 흘러내렸다. 피바다가 내쪽으로 밀려들었다. 이 장면은? 어디에서 봤더라? 생각하기도 전에 피바다가 나를 덮쳤다. 피바다는 소용돌이치며 나를 덮쳤다. 너무 차가 울 것 같았는데 피바다는 갓 흐르는 피처럼 따뜻했다.


나는 온통 붉은 핏물로 물들었다. 허우적거렸지만 마치 나의 내부가 채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술병이 있다. 그 술병에 아무리 술을 채워 넣어도 숭숭 빠져나가고 만다. 어딘가 구멍이 난 곳도 없음에도 그 술병은 채워지지 않았다. 술병은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몸을 던져 깨트려 드디어 채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 술병이 항상 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를 위협할 줄 알았던 피바다가 따뜻하니 나를 채워주는 기분이 들었다. 피를 보는 건 무섭지만 피가 없으면 인간은 죽는다. 피는 가장 인간다운 거야.


황홀했다. 에어컨을 틀어놔서 이곳은 너무 춥기만 했다. 나는 빠짐없이 붉은 피로 물들어 가리라. 그러고 싶었다. 몸을 피바다 속으로 담갔다. 붉은 피로 가득한 바다는 꽤 깊었다. 내가 이렇게 빠르게 헤엄을 칠 수 있다니. 그리고 숨을 쉬지 않아도 괜찮았다. 입에서는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지만 숨이 막히지 않았다. 마치 나의 갈비뼈 어딘가에 있는 성능이 좋아진 허파가 바닷속에서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의 몸을 보니 손가락과 발가락에 물갈퀴가 달려 있었고 몸의 이곳저곳에 비늘이 붙어 있었다. 비닐은 아름다운 색이었고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내가 내 몸을 보는데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는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 더 이상 힘들기만 한 일상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제 여기서 지내는 거다. 어디선가 킴 와일드의 유 킵 이 행인 온이 나왔다. 이 신나고 자유함이 가득한 섹시한 노래가 들렸다. 나는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손과 발을 휘저었다. 나의 몸은 마치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킴 와일드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한 손에는 타로 카드가 들려 있었다.


소녀도 춤을 추고 있고, 할머니도, 노신사도 춤을 추고 있었고 명희도 춤을 추고 있었다. 명희는 나이가 들었지만 대번에 명희라는 걸 알아보았다. 명희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살집 가득한 몸을 신나게 흔들면서. 춤이라는 거 한 번도 춰 본 적이 없지만 킴 와일드의 노래에 맞춰 몸이 흔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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