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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11. 2024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윌렘 대포가 나온 영화들


       

어제는 한 아주머니의 얼굴을 봤는데 윌렘 대포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거야.

웃으면 안 되는데 마치 서치 아이 하는 것처럼 눈을 흘겨 뜨면 아주머니의 얼굴이 윌렘 대포의 얼굴로 바뀌는 거야.

나도 모르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어.

그러고는 바로 입을 막았지.

아주머니는 윌렘 대포의 얼굴을 하고서는 아직 날이 추운데 무지개티셔츠를 입고 있었어.

아주머니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모습마저 윌렘 대포 같은 거야.

아주머니도 마르고 걸음걸이가 그랬지.

걸음걸이가 마치 가여운 것들에 나오는 윌렘 대포의 걸음걸이었거든.



가여운 것들, 너무 푹 빠져서 봐버렸는데. 거기서 윌렘 대포의 갓윈은 정말 딱이었다. 가여운 것들 어떻게 봤어?


기기괴괴한데 아름답고, 딱해 보이는데 자유로워 보인다.

상상 속의 동물, 인터넷 세계에서나 가능한 개닭, 개돼지, 개오리를 탄생시킨 가여운 것들이여.


프랑켄슈타인의 여성 버전.


이 영화의 장르를 말하라면 엠마 스톤이라 하겠다. 엠마 스톤이 엠마 스톤 한 영화. 벨라가 벨라가 되는 이야기.


만삭의 몸으로 죽어버린 벨라는 벨라의 아이의 뇌를 벨라에게 이식시킴으로 다시 태어난 벨라가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 벨라식 사랑은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며 우아하지 않고 추잡하고 드러내는 사랑이지만 벨라의 사랑에는 거짓은 없다.


벨라가 가여운 것일까 벨라를 둘러싼 사람들이 가여운 것들일까.


사랑을 찾아 그렇게 벨라의 모험이 시작되는데, 빠져드는 색감과 황홀한 미장센. 초현실의 감각으로 그려 놓은 미술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모험은 예측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벨라는 벨라만의 특별한 성장을 한다. 인간을 알아간다. 벨라는 벨라 자신을 알아간다. 흑백에서 서서히 컬러를 찾아간다.


벨라의 눈을 통해서 보는 세상을 우리도 같이 느낀다. 이상주의는 무너지기 쉽지만 현실주의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벨라는 알아간다. 그게 세상이다. 종교의 거짓에 넘어가지 마라. 세상은 치욕과 공포, 슬픔이 있는 곳이다.


유아기처럼 의성어 의태어나 뱉어내던 벨라가 후반에는 성장하여 대사가 몹시 철학적이 된다. 몹시 야하며 아주 잔인한 장면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도발로 다가온 ‘가여운 것들’을 너무 재미있게 봤다. 랍스터를 볼 때보다 더 홀딱 빠져서 보게 된 영화.


근래에 인간을 이토록 잘 드러낸 영화가 있었나 할 정도로 재미있게 본 ‘가여운 것들’이었다.


윌렘 대포는 가여운 것들이나 라이트 하우스에서 거친 표면을 만질 거 같은 연기가 좋다. 스파이더맨과 아쿠아맨(그러고 보니 디시, 마블에 다 출연을 했네)에서의 윌렘 대포도 좋지만 꺼끌꺼끌한 표면 같은 연기가 좋아.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좋았지.



모두가 신인인데 윌렘 대포 같은 명 배우를 집어넣은 것은 관객의 시선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무니가 웃으면 관객이 따라 웃게 되는데 그건 션(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감독이나 영화의 감정을 무니에게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니가 표현하는 감정에 그냥 그대로 이입을 할 수 있었다


무니는 사실 불행을 모르고 지낸다. 무니를 괴롭히는 것도 없고 모든 것이 그저 신난다. 오늘은 무니가 무엇을 하며 신나게 노는 것일까. 


카메라로 담은 무니의 일상을 보는 우리는 무니가 오늘도 침을 뱉을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폰으로 촬영을 하면서 무니의 불행이 영화에 드러나게 된다. 무니의 불행을 이 작은 이상한 매체인 아이폰으로 그것을 브라운관 밖으로 끄집어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션 베이커는 무니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이폰으로 무니와 젠시의 달려가는 그 진동을 표현했다. 전혀 잡스럽지 않다. 그 장면을 통해 화면 밖의 우리는 드디어 무니의 불행을 감지하게 되었고 세상의 모든 무니에게 행복이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무니들이여 나 대신 제발 행복해져라! 제발!




영화 ‘더 라이트하우스’도 딱 두 명의 배우가 나온다. 이 영화는 굉장히 엄청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1890년대 뉴잉글랜드의 작은 섬에서 바다를 비추는 등대에서 생활하는 등대지기 두 명의 이야기.


고립된 곳에서 마음의 고립이 점점 인간성을 갉아먹는다. 야금야금 먹히다 보면 고독과 외로움의 경계를 넘어서서 제정신일 때와 제정신이 아닐 때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악몽인지 악몽 때문에 일어나는 현실인지 균형을 잃는다. 피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빡빡 문지르고 닦는다. 녹을 다 낚아내고 나면 다음 날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나중에는 이 일을 좋아하게 될 거야. 알겠습니다


반복반복

고립

그리고

반복반복

맛없는 식사가 이어지고 아침이 밝아오고 또 같은 일을 반복한다. 


서서히 몸으로 달려드는 갈매기들. 영화는 마치 고독한 시 같다.


윈슬로는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인지 정말 빌린 이름인지 점점 멀어져 가고 환각과 환청이 고립을 꽉 채우다 보면 등대를 밝히는 불빛은 신적인 존재가 된다.


일단 윌렘 대포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굉장하다.

공포를 맨몸으로 표현한다.

대 놓고 공포의 요소가 없음에도 공포영화 치고 접근하기 어려운 평점을 받은 것도 이해가 간다.


더 기분 나쁜 건 공포영환데 마치 흑백의 미술작품을 계속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두려움과 불안을 그림으로 말하고 있는 예술품을 보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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