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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하지 않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엄마에게 자신이 집에 들어가는 대신 할머니를 좀 더 편안한 집으로 옮겨갔으면 했고 외할머니가 지낼 수 있는 집도 본인이 알아봐 준다고 했다. 는개는 일을 해야 하는 엄마 때문에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 덕분에 여리하기만 한 몸에서 건강을 되찾았다. 할머니와 떨어지는 게 못내 싫었지만 할머니의 집은 는개의 집에서 걸어서 십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어서 엄마는 는개를 달랬다. 할머니는 볼 수 있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단다. 걸어서 십 분만 가면 돼. 엄마는 그렇게 는개를 달랬다.
새아빠는 는개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머리를 오 분 정도 쓰다듬고 나면 는개에게 천 원을 주며 과자를 사 먹어,라고 했다. 는개는 초등학교 때에 그런 새아빠가 싫지만은 않았다. 는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며 용돈까지 쥐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새아빠의 부드러운 손바닥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는개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서 새아빠의 무릎에 앉아서 학교에서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 짝지에 관한 이야기, 점심시간에 진욱이가 오줌을 싼 이야기, 색연필에 관한 이야기 등 는개는 새아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새아빠는 무릎에 앉아서 학교에서의 일과를 말하는 는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는개가 말을 하면 새아빠는 호응을 잘해 주었다. 너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는개가 질문을 대답도 잘해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는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간도 늘어갔다. 머리를 쓰다듬고 두툼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는개의 머리를 쓸어 넘기기도 했다. 는개의 머리를 넘기고 드러난 작은 귀를 만졌다. 그러면 는개는 어깨를 움츠리고 간지럽다고 했다. 새아빠의 무릎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무엇보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에게 자신도 아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친아빠가 있는 다른 아이들처럼 기뻤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할머니와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던 엄마와 달랐다.
집으로 들어왔는데 새아빠가 집에 없으면 불안하고 싫었다. 는개의 새아빠는 어느 날 집에 몇 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단정한 옷차림의 말쑥한 사내들로 새아빠의 일을 거들어주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는개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새아빠의 일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왜 그런지 집안에서 말 수가 없었다. 집에서 저녁에 모두 같이 모여서 밥을 먹을 때 그 속에 할머니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식탁에서 즐겁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언제나 는개였다. 집에서 아빠라는 존재와 엄마가 함께 있다는 건 는개에게 들뜨는 일이었다. 는개도 점점 할머니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갔다.
초등학교 5학년 되면서 는개는 친한 친구가 생겼다. 는개는 새아빠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친구와 함께 군것질을 하고 비밀공유를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그런 시기가 왔다. 는개의 친구는 는개에게 자신의 집에 있는 책을 많이 빌려 주었다. 친구의 가슴은 서서히 봉긋하게 올라왔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책을 많이 읽고 똑똑했다. 는개의 친구는 는개에게 새로운 사실과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적인 부분을 제시했고 그 방법이 책이었다. 친구는 논리적으로 말할 때와 응석을 부릴 때를 가릴 줄 알았다. 그에 비해 는개는 생각이나 의식 같은 것들이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다.
친구는 책을 좋아하는 는개가 집에서 책을 사 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책을 많이 빌려 주었다. 소공녀부터 허클베리 핀 그리고 빨강머리 앤과 한국동화들을 읽으며 책의 재미를 알아갔다. 는개는 그 친구와 매일 어울렸다.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옷을 하나 입어도 어떻게 입으면 좀 더 예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는개의 친구 역시 치마를 즐겨 입었고 그 치마는 친구에게 잘 어울렸고 예쁘게 입을 줄 알았다.
새아빠는 더 이상 는개를 무릎에 앉히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는개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는개의 좀 더 예쁘게 자란 귀를 만졌다. 귓불을 만지작거렸고 위에서 아래로 쓸어가면서 만졌다. 어느 토요일 오후, 는개와 어울리던 친구가 는개의 집으로 놀러 오게 되었다. 는개의 방은 여자아이의 방이었지만 허전하고 무엇인가 빠져있는 느낌이 드는 방이었다. 인형은 몇 개 있었지만 어릴 때 사놓은 것들이었으며 그것마저 허수아비 같은 인형이었다. 책이라고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고 방의 평균적인 컬러도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는개는 친구와 자신의 방에서 서로 간의 비밀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새아빠가 방으로 들어왔다. 는개의 새아빠는 는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간이 길어지고 는개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새아빠의 행동이 친구의 눈에는 비논리적으로 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