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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Sep 15. 2024

말을 했어야 했다 5

소설

5.


 “이제 쥐들은 없어지는 겁니까?”


 “나타난 쥐들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아요. 쥐들이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형태가 당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곧 이리로 올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쥐들이 이리로 들어와서 일주일가량의 시간 동안 서서히 죽어갈 거예요. 쥐들에게 필요한 건 당신 내면의 대립되는 마음이거든요. 방호벽을 치면서도 방호벽이 뚫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쥐들에게 필요한 거예요. 쥐들은 당신의 냄새를 맡고 당신의 잔재를 먹을 거예요. 쥐들은 그러면 당신의 그 마음을 가질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당신의 집 변기에도 몇 마리의 쥐가 빠져 죽어 있을 거예요. 쥐들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당신의 마음을 갉아먹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쥐들은 이곳에서 죽어갈 겁니다. 어쨌든 짐을 챙기세요. 이곳을 나가야 해요.”


 “전 그럼 어디로 가야 합니까?”


 “집도 가게도 아닌 곳으로 가면 됩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나와야 했지만 서랍에 있는 16기가 USB만 3개를 들고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고가지만 카메라가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고가의 카메라를 챙기지 않았을까. 무거워서일까. 휴대전화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서일까.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사진보다 훨씬 낫다. 그렇지만 카메라를 두고 나왔다. 그것이 사진관 안의 모든 물품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값어치가 나가지만 나는 그대로 두었다.


 “어디 조금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나을 거예요. 이대로 떠나세요. 지금 당장 버스터미널로 가서 시간이 되는 버스를 타고 아무 곳으로 가는 겁니다. 당신이 유념해야 할 사항은 그곳에서 여자를 만나거나 돈으로 섹스를 하되, 절대 그 안에 사정을 하면 안 돼요. 아시겠죠. 지금처럼 반드시 물에 희석하든지 휴지는 물에 버리도록 하세요. 그것만 유념하면 됩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당신을 도와주는 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자, 짐을 다 챙겼으면 이제 나가죠.”

  최흑오라는 여자는 그대로 밖으로 나와 큰 우산을 펼치고 높은 굽을 신은 채로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 년 전에 여기서 사진을 찍었다는 저 여자에 대해서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채도가 빠진 듯한 기이한 눈동자를 지닌 여자를 기억 못 할 리 없다. 하지만 기억은 없고 여자가 왔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컴퓨터에 파일이 남아 있으니까. 도대체 파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기억하고자 하는 것,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주 하는 행동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몸이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은 몸이 알아서 한다. 분명히 한 달 정도 지나면 나는 모든 파일을 삭제를 했다. 컴퓨터라는 것이 때로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제대로 지우지 않았거나 그 당시에 여자가 절대 지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그것대로 나는 기억을 하고 있어야 했다. 여자의 말대로 나는 기억이 조금씩 소멸되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쥐들에 의해서, 내가 제때에 제대로 태도를 취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최흑오는 나에게 말했다.   

 

  여자의 말대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와서 5시에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7번 국도를 타는 버스였다. 신용카드는 있고 주머니에도 현금으로 34만 원정도 있었다. 가방에는 속옷 두 벌과 여벌의 티셔츠와 바지가 있었고 필요하면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 허기가 졌다. 배가 고팠지만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는 영덕으로 가는 버스였다. 버스에는 운전사 이외에 두 명이 더 있었다. 할머니 한 명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또 다른 할머니 한 명이 올라타 있었다. 나는 맨 뒤의 창가에 가서 앉았다. 할머니들은 그 나이 대가 비슷하고 버스에 사람이 없어서 서로 인사를 할 법도 했지만 그들은 얼굴이 마주쳐도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고 각각 다른 자리의 창가에 앉았다. 어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며 비슷한 모습에 그만 실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은 정당하지 않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막아 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 앉아서 2분쯤 지나니 버스의 냄새가 올라왔다. 검붉은 색의 가죽 시트에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찢어 놓거나 손으로 뜯어 놓았다. 상처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사람들을 맞이했다. 가죽시트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했다. 나는 손으로 그 상처를 만지려다가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떠올랐다. 가끔씩 신고 나오는 하이힐과 나의 팔짱을 끼고 걸었던 거리와 때로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손님들 앞에서 마네킹의 미소를 보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비틀어짐이 마음의 한 구석에서 모래성을 쌓았을지도 몰랐다. 기억이 나야 하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만들어낸 기억은 그것을 생생하게 재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응이 토착화되어 있지 않아서 반응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못할 때도 있고 생각보다 앞서 말하거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되도록 중의적인 말을 찾으려고 했고 될 수 있으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의 방호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그럴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쥐들은 그런 나를 찾아서 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쥐들을 피해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흑오라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쥐들이 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방호벽 안의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더 피하려 하고 있다. 편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몹시 외로워서 더한 외로움의 껍질을 덮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깊게 사랑할수록 나의 외로움은 깊어지는 사랑만큼 커져가는 것이다. 외로움의 발로는 사랑에서의 시작이었다. 학습을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기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호벽만큼은 단단하게 만들어 버렸다. 양의적인 의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을음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기억의 주위에서 떠돌아다니며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버스가 영덕 전의 영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거기서 내렸다. 아주 작은 터미널이었다. 레인 시즌이라 날은 맑지 않고 비는 소강상태였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을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먹구름은 하늘에서 영역을 만들며 이동을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무엇인가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보이는 내장탕 집으로 들어갔다. 더운 날임에도 덥지 않았고 외롭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한기가 들어 내장탕 집 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 집만이 오직 아침식사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주문하고 몇 분쯤 지나니 벌건 국물의 내장탕이 조미료의 냄새를 내며 앞에 놓였다. 막상 내장탕이 나오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저은 다음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는 계산을 하고 그대로 나왔다.


  포구를 거닐다 숙소를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모텔이었다. 항구가 보였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모텔은 모텔만의 냄새가 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비슷한 책상과 생활용품이 테이블 위에 있고 거울이 있고 티브이가 있고 욕실이 있다. 침대가 있고 바닥이 보이고 콘돔이 보였다.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오후 5시가 넘었다.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이렇게 낮잠을 오래 잔 것도 처음이었다. 창문으로 보니 아직 날은 아침처럼 그대로 흐린 상태였다. 바다의 냄새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일어나서 또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사람은 소거되어 있었다. 10분 정도 그림처럼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수순처럼 들어갔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불러 줄 수 있냐고 하니 주인은 그렇다고 했다. 여자는 손톱의 매니큐어가 벗겨진 30대 중반의 여자로 검은 블라우스와 자주 빛의 타이트한 여름용 치마를 입었다. 손톱의 벗겨진 매니큐어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합의를 봤다. 여자는 입으로 해주는 대신 오만 원을 더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여자는 빨랐다. 나의 바지를 내리고 침대에 앉힌 다음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나의 허벅지 안쪽을 잡고 한 손으로 만져주고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입으로 잘 빨아 주었다. 그녀와의 섹스가 떠올랐다. 처음 그녀와 잠을 잤던 때가 생각났다. 작은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모임에서 빠져나와 둘이서만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실컷 취했다. 그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들고나간 고가의 카메라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신은 그런대로 말짱했다. 그날 하룻밤 만에 카메라로 그녀의 사진을 몇 기가바이트나 담았다. 주로 얼굴을, 주로 신비로운 눈동자 위주로 사진을 담았다. “소세계가 있어”라는 말도 술을 마시고 하니 꽤 낭만적으로 들렸다.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그녀가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있었지만 포커스는 그녀의 눈동자에 맞춰져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사진을 대량으로 찍은 적은 없었다. 그녀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 USB 3개를 다 들고 나왔다. 나는 이것을 이곳에 버리기로 한 것이다.    


  왜곡된 기억으로 앞으로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왜곡의 기억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정이라는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조커의 얼굴을 한 채 양립된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며 그렇게 상대방을 대할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외로움 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멀리까지 왔기에 이곳에서 버리면 된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지도 않고 하드디스크에도 없다. 그녀와 처음 섹스를 했던 날 그녀는 술이 취했음에도 부끄러워했다. 적당한 가슴에 적당한 엉덩이가 마음에 들었다. 여인숙의 허름한 방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건드릴수록 반응이 왔다. 그녀와 만나면서 몇 번 섹스를 했지만 입으로 해 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의 페니스를 입으로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 처음 본 여자에게는 당연하게도 입으로 빨아달라고 했다. 어째서 사랑하는 이에게는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개를 숙여 보니 여자가 아주 기계적으로 잘 빨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 속의 남자와 격렬한 섹스를 했을 것이다. 내가 못해준 절정에 도달하는 섹스를 우산 속의 남자는 그녀에게 제공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일종의 분노와 함께 결락이 동시에 몸을 덮쳤다. 그리고 뒤따르는 격렬한 외로움.


  나는 외로운 것이다. 외로움을 외롭다고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외로울지도 몰랐다. 혼자서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옆에 그녀가 있음에도 나는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했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지금 이렇게까지 일이 비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혀로 페니스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전조가 있어야 했지만 카타르시스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죽 나오고 말았다. 여자는 미간을 좁히며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칭찬해 달라는 듯 미소를 보이더니 돈을 챙겨서 더 이상 우리는 볼일이 없다는 듯 인사를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나갔다. 돈을 집어 드는 손톱의 매니큐어는 더 벗겨진 듯 보였다. 몸에 있던 무엇이 그대로 빠져나가 버린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게 여자의 입에 사정을 해버렸다. 최흑오는 나에게 물에 희석해서 버리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에 사정을 했으니 위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잔재라는 것들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소멸해 왔다.         

‘어떻게든 되겠죠,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 될까?     

 어떻게든.     

 어떻게든 될 일은 어떤 식으로든 되고 만다.


  고개를 들어 둘러본 모텔의 모습이 생기가 빠져나가버린 그 여자의 손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텔의 냄새가 가득했고 집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항구에 있는 모텔의 티브이는 잘 나오지도 않았고 휴대전화기의 송신도 잘 되지 않았다. 숙소에 돈을 더 지불하고 이틀을 더 머물렀다. 다음 날 포구를 걷고 마을을 걸었다. 털 빠진 개들이 보였고 포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이 보였다. 잠시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고 들어와서 누웠다. 침대 시트도 갈지 않았고 그대로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잠시 해가 뜨는 것 같더니 이내 흐려져 몇 시간 동안 비가 내렸고 그 사이로 다시 해가 잠시 보이더니 또 구름이 해를 가려서 흐린 날이 되었다. 하늘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생이 진지하게 그려놓은 그림 같은 하늘이었다.


  조금 살이 빠졌다. 나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흘러가 버린다. 늘 그래 왔다. 의도라는 자체가 없었기에 어쩌면 공백이 생기고 공백의 부피가 커지면서 의도가 흐를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만들어지면서 의도는 그 길로 진입을 해버리고 의도를 제외한 것들이 나를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나는 그녀가 무리해서 사준 휴고보스의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다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의도는 물처럼 다른 길을 따라서 졸졸 흘러간다.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좋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 또 다른 길로 흘러가버린 의도는 그것대로 하나의 체재를 만들어 새로운 형태의 의도가 되고 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손길을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놓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고 예쁜 손으로 느껴졌던 따스한 그 온기만 있어도 나는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믿어 왔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습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USB를 버리러 왔으니 나가서 장소를 찾아봐야 한다. 장소를 찾아서 버리면 된다. 바닷가이니 어딘가에 던지고 나면 끝이다. 나는 손으로 USB를 만지작거렸다. 이 안에는 그녀의 수많은 사진이 있다. 3개나 되는 USB에 가득 들어 있는 그녀를 이제 나는 버리려 한다. 역시 의도치 않게 눈물이 흘렀다. 우산을 쓴 남자와 잠을 잔 그녀의 몸에도 상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USB를 버리고 나면 나는 나의 방호벽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방호벽은 좀 더 높아질 거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방호벽은 거대한 외로움이라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렇게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어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지하 주차장에서 들리던 그 공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쥐들이 내는 소리였다. 야들야들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먼저 갉아먹듯 자글자글거리는 공명은 조금씩,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을 머리 위로 덮고 귀를 막았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공명은 먹구름 사이를 지나 포구에 정박한 배들의 선미를 건드리고 정중하지만 막힘없이 다가왔다. 자글자글한 공명은 붉은 눈빛을 띠며 숙소 가까이 왔다. 그때 인터폰이 크게 울렸다. 그리고 인터폰은 끊어지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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