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9

소설

by 교관
다운로드.png


9.


고층건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건물을 옆으로 세울 수 없으니 자꾸 위로 올리는 것이다. 최신 설비, 공기 정화, 인간의 쾌적을 위해- 같은 말이 고층건물을 지었을 때 따라붙는 말이다. 그럴수록 자연과는 동떨어지게 되며 니힐리즘에 빠질지도 모른다. 높이 올라갈수록 높은 곳에서 밑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도 늘어날지도 모른다. 자살을 위해 높은 곳을 찾는 사람들이 예전부터 늘 있었다. 떨어져 죽는 만큼 깔끔한 것은 없다. 실패가 없다. 약을 먹어도 제대로 죽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물에 빠져도 제대로 죽지 못한다. 하지만 50층에서 떨어지면 실패는 ‘무’에 가깝다. 실패가 없는 사람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자살의 실패가 없는 것만큼 멋진 일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높은 곳을 찾아서 몸을 던지는 사람은 세상에 만들어 놓은 질서에 이끌리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그럴지도 모른다’처럼 모호하게 말로 끝내는 걸까.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처럼 철저한 관리를 요하는 아름다운 건물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없어지고 나면 더 이상 그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타날 수 없듯이. 나는 승섭이의 부재 때문에 술을 마시는 일이 늘어났다.


안도 다다오가 쌍둥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게다가 안도 다다오가 권투선수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세상에 알고 나면 전부 흥미로운 일들이 가득하다. 승섭이만 봐도 그걸 알 수 있다. 승섭이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팬티 정도는 이제 네 손가락으로 빠르게 입을 수 있겠지. 우리는 그걸 대비해 연습을 했으니까. 그때 숨을 헐떡거리며 연습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 다다오는 권투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그리고 건축가가 되었다. 권투를 잘하는 사람이 건축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니다 어쩌면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권투는 3분 동안 링 위에서 버텨야 한다. 건축도 그 세계에서 버텨야 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은 기하학적이지만 그 속에 자연의 빛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언젠가 그녀의 웃는 모습을 안도 다다오의 롯코 집합주택을 배경으로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어째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을까. 알 수는 없다. 생각은 늘 알 수 없는 곳으로 흐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생각은 밑에서 위로 솟기도 한다.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생각은 그런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생각이라는 흐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자꾸만 흘러간다.


그때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침대에 멍하게 누워있다가 고개만 살짝 들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밖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방문이 열리더니 비누향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비누향은 이내 방안에 멈춰있는 퀴퀴한 공기의 틈을 악착같이 파고들었다. 비누향은 나에게 있어서 이성적인 감정을 매몰시켰다. 언어에 있어서도 정당한 의미도 사라지게 만드는 향이었다. 문이 전부 열렸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선배의 그녀가 나의 자취방에 왔다.


“밥 먹다 말고 먼저 가서 와 봤어요.”


“전 다 먹어서.”


“또 방에서 책 읽고 있었어요? 내가 방해가 된 건 아닌가요?”라며 그녀가 침대 옆으로 왔다. 비누향이 방 안의 모든 더러운 냄새를 압도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조금 옆으로 옮겨서 앉았다. 방에서 엉덩이가 누릴 수 있는 곳은 침대뿐이었다. 승섭이가 오지 않게 되면서 방바닥은 그저 신발만 벗고 디딜 수 있는 공간이었다. 승섭이가 오면 방바닥에 걸레질이라는 걸 했다. 욕을 하면서.


내 자취방의 방바닥이라는 건 방바닥으로써 아무런 기능이 없었다. 그녀의 무게가 침대에 실렸다. “무슨 책?”라는 말에 나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책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책장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보았다. 그럴수록 비누향은 더욱 짙게 번졌다.


“건축양식이 특이해요. 아름답구요. 스페인의 이곳은 너무 유명해져 버린 곳이군요. 전 너무 유명한 곳은 싫어요.”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웃음을 가까이서 봤다. 방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건축은 의상 하고도 비슷한 면이 많은 거 같아요”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거기에는 백만 원짜리 웃음이 있었다.


“둘 다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잖아요.”


그녀는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건축이 나이가 많을까요? 의상이 더 나이가 많을까요?”


[계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