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Nov 13. 2024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16

소설


16.


 방학이 가까워오자 자취촌에는 사람이 점점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선배의 방에서는 여럿이 모였다.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웃음과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쓰레기통에는 차곡차곡 쓰레기가 쌓였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시간은 주전자의 물이 빠져나가듯 흘렀다.


 “옷 만들어 내는 게 쉬울까요? 옷을 입는 게 힘들까요?”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게 힘들까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게 쉬울까요?”


 “옷 만드는 사람이 돈을 많이 벌 까요? 건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돈을 많이 써버릴까요?”


 그녀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서로 술잔이 오고 갔고 때로는 격렬하게, 대론 진지하게 대화를 했다.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의 면모가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마음 놓고 당구나 치고 술이나 퍼 마실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 밖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행복에 겨워 저녁을 맛있게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 화면에서 나는 찝찝한 벌레 같은 존재로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들의 틈 속에 있다가 털옷에서 한 가닥 빠져나가는 실오리처럼 내 방으로 와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조금 먹은 밥의 양에 비해 위장에 쏟아부은 소주의 양이 훨씬 많아서 그런지 누우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책을 집어 들었지만 그녀와 일이 있기 전처럼 책에 몰두하지는 못했다. 내 방에는 그녀가 남겨놓고 간 모종의 슬픔이 잔존해있었다.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화가 났다. 슬픔은 방 안의 저쪽 구석에 환영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방에 들어오면 강아지처럼 나를 반겼다. 얼굴을 핥았고 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작 두 달 된 강아지처럼.


 진저리가 날 정도로 비가 차갑게 내렸다. 가을비가 자주 내렸고 한 번 내리면 오래 내렸다. 비 냄새가 창을 통해서 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녀가 남긴 슬픔을 몰아내기에는 터무니없었다. 억지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알 수 없는 슬픔의 잔존감을 마음으로 느끼며 책을 읽다가도 그녀를 생각했고 음악을 듣다가도 그녀를 생각했다.


 그때 이후 그녀는 내 방에 오지는 않았다. 그녀가 방에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의 가슴이 느껴졌다. 만약 지금 문이라도 열고 들어 온다면 어쩌나 하는 조마조마함을 자취방에서는 늘 느꼈다. 그리고 더 깊은 마음속에는 그녀가 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모순에 모순을 장착한 로봇이었다. 이런 내가 건축을 한다니, 건축물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얼토당토 안 될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긋지긋했다. 맥주를 마셨다. 소주가 위장에 아직 찰랑거리고 있었다. 희석주에 발효주가 들어갔다.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게으른 인간이 리모컨을 만든 거야, 라는 말을 되새기며 나는 침대에 한 번 누우면 그대로 침대에 붙어서 꼼짝하지 않았다.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만나면 이야기를 잘해주었고 책에 대해서 물었고 음악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비틀스가 나을까? 에릭 클랩튼을 선택할까? 그녀는 내 방에 다녀 간 이후로는 나에게 말을 놓았다. 나는 그런 그녀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낯설지 않음은 어떤 전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주말에 선배와 그녀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나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갔다. 나는 동물원에서 기린의 우리 앞에서 기린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동물원에도 왕왕 갔었다. 하지만 동물원은 언젠가부터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법칙도 없이 어느 날 문득 가지 않게 되는, 그런 곳이 존재한다. 오락실도 그렇고 극장도 그렇게 된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운 날도 사라질 날도 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