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7.
어린 시절에도 동물원에 가면 기린 우리에만 붙어있었다. 기린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을 동물들 중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긴 목과 함께 가늘고 긴 다리가 그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기린은 지구상에서 가장 모순된 생명체다. 한 없이 길고 길어서 육식을 할 것만 같지만 쉬지 않고 풀이나 열매를 먹는다.
기린의 눈을 보고 있으면 기린은 자신의 모순을 받아들이고 있다. 기린을 보고 있으면 슬픔이 모든 것에 잔존해 있었다. 기린은 자신의 몸에 붙은 슬픔을 느끼며 기뻐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모순이니까.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면 균형이 맞아진다. 기린에 늘 끌리고 있었다.
그녀가 기린을 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브라보콘을 하나 주었다. 대기에 먼지가 많이 껴 뿌연 화면 같은 주말의 오후에는 기린을 잘 볼 수 없었다. 기린은 저 멀리 있었고 딱 한 마리가 나와 있었는데 어딘가를 향해 닿지 않는 곳을 보고 있었다. 브라보콘의 맛은 푸석하고 차가운 가을의 맛이었다. 선배가 화장실에 가고 우리 둘만 남아있으면 안절부절못했지만 그녀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물의 왕국에서 들은 이야긴데 기린은 헤엄을 못 친데. 거기다가 기린은 새끼를 제대로 낳을 확률이 37%밖에 되지 않아. 신기하지? 그래서 동물원에서 새끼를 낳는 날이면 동물원 직원들 전부 긴장을 하고 밤샘을 같이 한데. 대단하지?”
'신기하지?'와 '대단하지?'는 비슷한 것 같은데 전혀 다른 말이다. 모두가 나와는 동떨어진 말이었다. 신기하면서 대단한 건 나에게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의미적으로 나에게 신기하고 대단한 것들은 대체로 호러블 한 것들이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서는 웃었다. 그녀는 유독 내 앞에서 웃음을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너는 좀체 웃지 않으니 나의 웃음을 좀 가져가라는 식으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귀를 드러내 주었다. 그녀의 귀에는 작은 귀걸이가 매달려서 반짝거렸다. 귀걸이는 그녀에게 선택되어 그녀의 귀에 매달려 반짝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반짝임이 만져질 것 같았다. 나는 그만 손을 들어 그걸 만지려고 했다.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맑고 깨끗한 피부다. 이런 피부가 나이가 들어 주름이 점령하고 푸석해진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 그런 날은 너무 먼 훗날이다.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아이처럼 순수했다. 순수한 것들은 무섭다. 시간이 가장 순수하며 가장 무섭고 두렵다. 자연이 그렇고 아이들이 그렇다. 그녀가 무섭게 변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애써 기억을 외면하는 것일까.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작은 기억이 너무 선명한 걸까. 그녀는 진정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스무 살과 스물한 살.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사이의 ‘골’에는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흐르는 그 무엇은 어째서 그녀에게 건너갈 수 없게 하는 것일까. 그런 사실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어느 순간엔가 소멸되어 버렸다.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내 작은 기억이 없어졌다. 누군가 코드 선을 우악스럽게 뽑아 버린 것처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