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0.
잠이 오지 않아 돈을 긁어서 소주를 마시러 ‘숲’으로 갔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긴장하면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미묘하게 절었다. 가난하다고 하지만 대학생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돈이 없어서 술을 마실 때는 용기처럼 돈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이상하지만, 대학교 근처에는 여성들이 칵테일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바’가 많이 생겨났다. 나는 그 사이를 피해 ‘숲’으로 향했다. 29인치의 허리가 28인치로 줄어들었다. 내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차가워진 계절에 소주를 위장에 부으러 갔다. 그러고 나면 아마도 카포티의 소설 속처럼 기차를 타고 패를 다 꺼내 보여줄 수도 있다.
몸무게는 그동안 더 줄어들어서 여학생과 싸워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민망해졌다. 주말에는 씻지도 않았다. 어차피 학교에 가기 전에 씻을 텐데. 치약이 아까워서 양치질도 하지 않았다. 책을 한 손에 들고 그저 침대에 누워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늘었다. 가끔 다리가 욱신거릴 때 일어나서 다리를 주물렀다. 최소한의 움직임만 하면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배고픔을 참을 수 없을 때면 통장의 잔액을 뽑아서 ‘숲’으로 대왕 계란말이를 먹으러 갔다.
그녀의 슬픈 남아 있는 느낌은 어째서 내 방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형태를 지닌 채 방에 틀어박혀서 나를 내려다보는 걸까. 섬세함을 지닌 채 배려하는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뜬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부재가 남긴 그녀의 잔존은 방안에 스며들어서 내내 나에게 그녀를 상상하게 했다. 상상 속의 그녀는 슬픈 얼굴을 하고선 나에게 가슴을 내어 주었다. 보드라운 가슴을, 아름다운 가슴을.
작고 초라한 방에 혼자 있지만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는 느낌 때문에 덜 외로웠다. 퀴퀴한 자취방이 좋아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럴수록 깊은 고독으로 빠졌다. 나는 몸을 아기처럼 말고 그대로 잠이 드는 경우가 잦았다.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져 갔다. 시간이란 무서운 것이라 시간이 가지는 의미 속에 나 역시 녹아들었다.
나는 설탕이 되어 뜨거운 물에 융해되었다. 따뜻함으로 그녀의 시선은 나를 안아 주었다. 보드라운 그녀의 가슴을 나는 만지고 싶었다. 이제 자취방에서 냄새를 풍기는 컵라면도, 그보다 냄새가 덜 한 골뱅이 캔도 따지 않을 것이다. 승섭이 녀석도 오지 않는 자취방에 오롯이 그녀의 향이 남아서 나를 내려다볼 수 있게, 그렇게 해 놓을 것이다. 그녀가 내 방에 다녀간 이후 방 안에서 수음도 잦아졌다. 하고 나면 밀려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게 때문에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아주 나빴다. 나도 모르게 방바닥에 침을 뱉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그런 기분 따위 잊어버리고 그녀의 가슴을 생각하며 또 수음했다. 나도 모르는 굶주림. 그것을 풀어헤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고 그러려니 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굶주림을 선배나 그녀는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나를 풀어주려고 했겠지. 왜? 어째서? 그들이 나를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순간 화가 났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벽에 집어 던졌다. 곧 후회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했던 어리석은 행동 중에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자취방에서 유일한 사치인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