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1.
‘숲’으로 소주를 마시러 나왔더니 겨울이 다 된 것 같았다. 날 선 바람이 자취촌의 거리 곳곳에서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얼굴도 할퀴었다. 불행과 비슷한 바람이었다. 복병처럼 인간 생활 전반에 숨어 있다가 등의 약한 부분이 보이면 날카롭게 붙어버리는 불행은 약한 부분에 상처를 내고 그곳을 벌려 영역을 넓혀갔다.
부는 바람이 꼭 그랬다. 바람이 입으로 들어왔다. 푸석한 맛이 났다. 먼지 구덩이의 맛이다. 결손 된 마음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겨울철 초입의 문턱에 있었다. 해가 숨어버리고 나면 벌써 어묵 국물이나 붕어빵 장수가 나타났고 자취촌의 거리를 거니는 학생들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학교의 곳곳에서는 터널에서 죽음을 맞이한 학생을 추모하는 인원은 줄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숲’으로 들어갔을 때 몇 테이블밖에 손님이 없었다. 이미 시간이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학교는 기말고사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숲’에서 공중전화로 승섭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뚜 하더니 집 전화번호는 이제 없는 번호라고 했다. 승섭이는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승섭이가 나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팬티는 정말 제대로 입고 다니는 걸까.
팬티 따위, 어쩌면 입지 않아도 된다. 인간 생활이 팬티의 유무에 따라 결정지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승섭이는 바지도 입어야 할 텐데, 까지 생각했다. 엄지손가락이 없이 생활한다는 건 알 수 없었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 한두 개가 없는 사람들은 봤지만, 엄지손가락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승섭이는 엄지손가락들을 잘라버린 최초의 인간이었다.
시험 기간에도 학생들은 술을 많이 마셨지만, 시험이 하루나 이틀 앞으로 닥친 날에는 술을 자제했다. 그렇지만 나는 시험과는 상관없이 술을 마셨다. 결과에 따른 원인이 없었고 그에 부합되는 행동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숲’에서는 라디오 헤드의 ‘크립’이 나오고 있었다. 주점에서 나오는 노래 중에서는 가장 좋았다. 김 씨 아저씨는 라디오 헤드의 노래를 좋아했다. 묘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대학의, 아버지가 바라는 학과에 진학했다. 건축과에 들어가기를 바랐던 건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의 권유와 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내가 공부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아버지의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그대로 건축 회사를 물려받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미래가 밝지는 않더라도 편안하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꿈이 아들이 검사나 의사가 아니라서 대항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아서 건축사가 지녀야 할 ‘자격증’이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부분에 있어서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건축과에 들어왔지만 나는 이리로도 저리로도, 어디에도 갈 곳을 잃은 날개 잘린 파리였다. 그렇게 고여 있는 물처럼 곪아갔다. 오래 고여 있어서 물에서는 썩은 냄새가 날 것이 뻔했다. 누가 먼저 맡느냐의 문제였다. 썩은 물에는 아무것도 살지 못한다. 오로지 썩은 물의 냄새만 있을 뿐이다. 톰 요크의 목소리가 숲의 여러 테이블에 가서 닿았다.
그녀는 그날의 사실을 완연하게 잊어버린 걸까. 소주를 한 잔 털어 넣었다. 소주가 목구멍을 관통해서 위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어딘가에 떨어져 그대로 소멸하고 싶었다. 그녀가 다녀가고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그 생생함이 마음속에 앙금으로 굳어 있었다. 선배를 생각하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와 나의 일은 어느 날 문득 일어났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대로 어떻게든 세계를 헤쳐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결과처럼, 엎어진 물처럼 저질러진 일이었다. 계란말이를 먹고 싶어서 왔지만 정작 손도 대지 않고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연거푸 몇 잔을 마시니 입술 끝이 조커처럼 위로 올라갔다. 위기감이 들었다. 계란말이는 은하계 아드로피르드라는 별의 생물체의 배를 가르고 꺼낸 내장처럼 보였다. 계란말이의 겉면에서는 연기가 실뱀장어처럼 피어올라 얼마쯤에서 사라졌다.
나에게는 절정기라는 시기가 언제쯤 다가올까. 분명한 것은 지금은 그 절정기라는 시기가 아니었다. 곧 다가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의 절정기를 생각하면 일주일 후 일기예보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휘젓는 기분이었다. 노래는 어느새 롤링 스톤즈로 바뀌어 있었다.
입 큰 개구리 믹 재거, 하고 소리 내어서 독어하곤 피식 웃었다. 듣는 이도 없는 곳에 대고 말을 했다. 이럴 때 승섭이라도 있었으면 그 녀석의 어딘가 뱅뱅 도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주를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