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2.
정신이 나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선배의 그녀 가슴을 만지는 일이 정신이 나간 일이 아닐까.
세상이 달라 보여야 한다. 정신이 나갔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늘 그대로 보였다. 정신이 나간 놈에게까지 그렇게 친절할 필요는 없다.
소주를 벌써 한 병 반이나 비워버렸다. 그럼에도 ‘숲’에 감돌고 있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나간 놈이, 소주를 이렇게나, 그것도 괴생물체의 내장처럼 보이는 계란말이를 그대로 두고 소주를 마셨는데도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소주만 두 병쯤 비워갈 때 안개 같은 미래 속에 누군가의 상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제야 정신이 나간 놈에게 부합되는 세계가 펼쳐지려고 했다.
소주병을 들고 잔에 부으려고 하는데 누가 소주병을 낚아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서 앞을 봤다. 또렷하게 들어오는 피사체의 상은 그녀였다. 앞에 그녀가 와서 앉았다. 마치 초현실 단편 소설 같은 모습이었다. 가망성이 없는 이야기가 지금 내 앞에 있었다.
“이렇게 술만 마시다가는 속이 튼튼해도 남아나질 않겠어”라면서 그녀는 굳어버린 내장처럼 단호하게 대형을 유지하고 있던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풀어헤쳤다. 숲의 공기가 불투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무방비 상태에서 그녀를 봐서 그런지 가슴이 뛴다는 걸 알았다. 손목 부위의 혈관이 팔딱팔딱 뛰며 더욱 살아있다고 신호를 보냈다. 소주를 그렇게 마셨음에도 머리는 찬물에 감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긴 싫었다. 소주를 대번에 또 한잔 마셨다. 그녀는 여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젓가락으로 찢어 놓은 계란말이를 집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침착한 움직임이었고 침착한 맛이 소주로 인해 껄껄한 입안으로 들어왔다. 입안으로 들어온 계란말이 속 당신의 조화가 느껴졌고 계란의 향이 가득 퍼졌다. 소주의 무색에 섞여 코를 자극했다.
“선배는….”
나는 선배가 같이 왔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숲’의 문 쪽도 봤다. 창밖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차가운 비 비린내가 ‘숲’으로 딸려 왔다. 유난히 이번 가을에는 비가 오는 날이 많았다. 작년에는 메마른 가을이라고 이곳저곳에서 가뭄 때문에 걱정이라는 말들이 많았는데 이번 가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한 번의 행복이 오면 한 번의 외로움이 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 번의 행복에 여러 번의 외로움이 있다.
가을비는 누군가 마개를 버려버린 독에서 새는 물처럼 주룩주룩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소주잔을 가져와서 술을 따르고 바로 입으로 넣었다.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에 인상이 퍼졌다. 곧바로 또다시 한 잔을 부어서 입으로 털어 넣었다. 두 잔 째 소주는 미소를 사라지게 했다. 다시 소주병을 들었을 때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는 이미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왔다. 옷과 머리가 차갑게 젖어 있었다.
“저, 그런데 선배는….”이라는 내 말에 그녀는 조용하게 다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손은 빙하기에서 얼어 있다가 이제 막 얼음 굴에서 나온 고대 참치처럼 차가워서 놀랐다. 곧 손등을 잡아 준 그녀의 손위에 내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주물렀다. 며칠 전 가슴을 만졌을 때와는 다른 관념이 그녀의 손으로 전해졌다. 거대하게 냉각되어 버린 결락이 그녀의 차가운 손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얼음 같은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양손을 호들갑스럽게 꺼내서 손으로 비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녀의 손은 조금이라도 빨리 따뜻하게 돌아왔을 텐데. 나의 엄지손가락의 반경은 좁았고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서 그녀의 손등을 따뜻하게 해주지 못하고 차가움만 전달받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으로 슬픔 감정이 잠자는 새끼 고양이의 심장처럼 전해졌다.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손을 포갠 채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