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4.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흘렀을까.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난 아직도 그녀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문득 승섭이의 붕대 감은 손이 떠올랐다. 엄지가 없으면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주물러 줄 수가 없다. 그녀의 차가웠던 손은 어느새 따뜻한 온기를 지닌 작고 아름다운 손으로 변했다.
“고마워”라고 적요하게 그녀가 말했다.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뺐다. 순간 따뜻한 공기가 확 밀려 날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소주잔에 있는 소주를 천천히 마셨다.
“저기, 부탁이 있어. 오늘은 나와 함께 있어 주지 않을래? 그냥 아무런 말은 하지 말고 그래 주지 않을래? 아니 그렇게 해줘. 그래 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입술을 손등으로 닦은 다음 초승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저를 믿을 수 없어요.”
“너를 믿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우리 둘 사이의 어떤 벽은 관념 같은 것으로 마모시키면 돼.”
그녀는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그녀의 얼굴은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소는 얼굴을 예쁘게 만들었다. 미약하고 돌 같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미소였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너의 방은 다른 남자들의 방처럼 냄새는 나지만 온기가 있어. 때 묻은 벽지와 꺼져가는 침대에서, 그리고 방 앞을 지날 때면 언제나 흘러나오던 오래된 노래에 온기가 묻어 있었어.” 그녀는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내일이 시험인데 그녀는 내일 숙취에 오늘 먹은 술을 다 토해낼 것이다. 소주는 그런 악마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좀 지나면 또 소주를 찾게 만든다. 이상한 세계다.
이번에도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고개만 끄덕이기 미안해서 나도 소주를 입에 부었다. 더 이상 소주는 달지 않았다. 쓴맛이 입안을 한 번 휘몰아친 다음 달달한 맛이 뒤따라와야 함에도 휘몰고 난 후 그대로였다. 혀끝은 소주 속의 올리고당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여섯 병의 소주가 내용물이 빠져나갔다.
계란말이는 조금 흐트러졌지만 그녀도 나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분명 김 씨 아저씨가 우리를 혼낼 것이다. 그의 열정과 수고가 들어간 작품이었다. 맛있게 먹어주는 학생들이 있기에 ‘숲’은 오래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음식을 남기면 항상 호통이 뒤따랐다.
“만드는 이의 성의와 영양가 없는 음식에 굶주린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라고 운을 뗀 다음 뒤에는 거친 말들이 김 씨 아저씨의 입에서 십이지장처럼 나왔다. 그녀는 곧 호통을 칠 김 씨 아저씨에게 소주를 한 병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얼음장 같은 손이 아니었다. 가슴과는 또 다른 부드러움이 가득한 작고 따뜻한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사람은 말이지 이미 오래전에 내 몸을 떠나가 버렸어.”
너무나 조용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들렸다. 하지만 말을 알아듣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의 말은 어떤 의미일까. 마음은 그대로인데 육체만 빠져나가 버렸다는 말일까. 채 알아듣기도 전에 그녀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말은 비정상적으로 또박또박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서 점점 깨어나는 듯 보였다. 애당초 술에 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 말고 다른 이가 이미 들어가 있었던 거야. 방학 때마다 실무를 배우는 건축가 사무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났나 봐.” 그녀는 다시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