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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 여자와 스쳐 지나갔는데 3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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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안 되면 할 수 없고,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보였다. 창피해서 SNS를 탈퇴한다거나 나의 팔로우를 취소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글을 올리고 사진을 올렸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내가 신경이 쓰였다.


여자는 일상을 부딪치면서 시 같은 글귀를 고통스럽게 써내고 있고, 여전히 인기가 좋으며, 여전히 날씬하고, 딸아이는 좀 더 자랐다. 여자는 변함없는데 언젠가부터 내가 조금씩 변했다. 피하기 시작한 건 내 쪽이다. 피한다기보다 이제 SNS를 기웃거리지 않았다. 내가 올리는 글만 올리고 나면 거기서 빠져나왔다. 예전처럼 다른 피드에 가서 팔로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댓글을 일일이 달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나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자가, 전혀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의 여자가 아닌데 자꾸 생각이 난다. 여자가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오늘부터 여기는 내 집이에요,라고 하는 것처럼 떠나지 않고 있다. 계속 생각나는 여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책을 읽지도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시도 때도 없이 여자가 생각났다. 이러다가 분명 일하는 것에 지장을 줄 것이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디자인하고 있다. 주로 백화점 앞에서 보는 유리 벽 안의 디스플레이이다. 마네킹 조형사에게 원하는 마네킹을 주문해서 받아서 브랜드를 착용해서 진열한 다음 배경 화면으로 인공지능이 마네킹을 사람처럼 구동시켜 브랜드를 광고했다. 항상 내가 작업해 놓은 디스플레이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했다. 마네킹은 마치 사람과 흡사했고 배경으로 살아있는 마네킹이 그래픽으로 탄생해서 브랜드를 홍보했다. 덕분에 나는 두 군데의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 총괄을 맞고 있었다.


하지만 작업을 할 때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브랜드와 인공지능을 머지시킬 수 없다. 그런데 여자가 머릿속으로 들어와 온통 헤집고 있다. 인공지능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뒤떨어지는 감이 있어서 나는 이를 좀 더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작업을 매일 하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머릿속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내가 전혀 좋아할 만한 타입의 여자가 아닌데 작업을 못 할 정도로 생각이 났다.


어느 날은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주사선만 보이는 화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 주사선이 움직이더니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집중해야 하는 모든 부분에 여자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생각을 전부 집어삼켰다. 일단 여자가 한 번 나타나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생각으로 나타났지만, 눈앞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덩치가 있는 여자. 얼굴의 피부가 좋은 여자, 키가 큰 여자가 나타나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자에게 말을 해야겠지? 아니면 내가 원하지 않는 여자를 생각에서 없애는 방법을 알아봐야 할까. 생각을 없애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의사는 말할 것이다. 내 얘기를 듣는다면 오히려 여자분에게 가서 말을 해 보지 그러십니까 하는 들을지도 모른다. 생각이란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을 안 하는 생각이 좋은 생각이지만 쉽지 않다. 오늘 아침에도 여자와 마주쳤다. 날이 추워서 여자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덩치는 좀 더 크게 보였다. 여자는 나를 한 번 보더니 가던 길을 갔다. 늘 그렇듯이 여자는 나를 스쳤다. 영화에서는 눈빛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도 눈빛을 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내가 지금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일이라도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SNS의 그녀가 나에게 말을 했을 때 내가 당황했던 것처럼, 여자도 내가 그쪽이 생각난다고 말을 하면 당황할 것이 뻔하다. 심지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신고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태로 마냥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퇴짜를 맞더라도,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나는 말을 해야 한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마음을 먹었다지만 막상 순간이 오면 분명 나는 어리바리할 것이다. 그걸 안다. 알지만 머릿속으로 말할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실은 요즘 매일 당신이 생각납니다 – 진부하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 말이 꼬인다.

자꾸 당신이 생각나는데요? - 역시 진부하다.

쪽지를 써서 건네줄까 생각했다. 글은 말보다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쪽지를 받고 읽지도 않고 버린다면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경험이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 학창 시절의 일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보는 여학생이 마음에 들었다. 매일 생각이 났다. 그러나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학교도 같은 방향이라 같은 버스를 타고 50분가량 갔다. 나는 그 여학생을 흘깃흘깃 보게 되었다. 매일 생각이 나고 여학생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 정류장에 서 있는 여학생에게 쪽지를 건네주고 도망갔다. 쪽지에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토요일 오후 4시까지 기다리겠노라고. 여학생이 나올 리 없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바보였다. 카페에서 나는 3시간을 기다렸다가 나와야 했다. 그 후로 매일 아침 그 시간을 피해 버스를 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쪽지를 건네고 일방적인 거절을 당했을 때 그 뒤의 일을 나는 걱정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생각했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여자가 생각이 났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했다. 압도적으로 여자의 생각이 생각 대부분을 차지했다. 잠들면 어김없이 여자가 나타났다. 꿈속에서 여자는 나와 잘 맞았다. 말이 통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라는 건 전혀 없었지만, 이야기를 일단 시작하게 되면 여고생들처럼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여자는 내가 일하는 건물에서 속눈썹 가게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속눈썹을 포기하지 못한다. 먹고살기가 어려울수록 속눈썹에 대한 애착이 짙어진다. 나라가 힘들고 경제가 어려워도 여자들은 속눈썹 샵을 나오는 순간 새로 태어나서 다시 일상에 용왕매진한다.


여자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재잘재잘 마치 학생처럼 떠들었다. 그렇게 떠드는 여자의 모습이 학생처럼 보였다. 여자는 꿈속에서 나를 알고 있다고 했다. 예전부터 나를 봤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백했을 때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여자와 나는 특별한 데이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건물의 계단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다. 그때 여자의 손을 봤는데 손가락이 비정상적으로 길고 약간 투명했다. 꿈속이라서, 꿈속의 여자라 그런 것이라 받아들였다. 여자의 기묘하고 기괴한 손가락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꿈속이다 아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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