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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 여자와 스쳐 지나갔는데 6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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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 분이 지났다.


여자: 혹시 거기 있나요?

나: 아니 목욕하신다면서 왜 말을 거는 거예요?

여자: 목욕하다 보니 말을 걸고 싶어 졌어요. 심심한데요? 호호호.

나: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그쪽이 계속 생각 대화를 걸어오면 집중을 못 하게 되잖아요?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고.

여자: 그렇네요. 생각하니 그렇네. 약속이 있다고 말하면 생각 대화를 걸지 않는 건 어때요?

나: 그러다가 생각 대화를 하게 되면요?

여자: 약속하고 있더라도, 지금은 아직 약속 중이니까 나중에 생각 대화를 하자고 하면 될 것 같아요. 그쪽이 일방적으로 대화를 걸지 않는 이상 방해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호호.

나: 흥, 웃기시네.

여자: 호호호. 그건 나의 대사인데.

나: 이름을 알고 싶으면 어떡하죠?

여자: 이름을 알려주는 건 서로 어렵지 않겠지만 검색을 할 수 있으니 그건 관두죠. 대신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아이디를 하나씩 정해서 이름 대신 부르죠. 제 인터넷 아이디는 전부 같아서 다른 아이디 하나 생각해서 알려줄게요. 당신도 그렇게 해요.

나: 좋아요. 그러면 나머지 목욕을 마저 하세요.

여자: 전 다 했어요. 호호호.

나: 뭐야? 그럼, 생각 대화를 하면서 씻고 닦고 다 했단 말에요?

여자: 네, 뭐 어때요? 보이지도 않는데 호호호. 상상하지 마세요, 제 알몸을 호호호.

뚝. 생각 대화는 끊어졌다. 끊었다지만 저기요?라는 생각만 하면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오프라인으로 사람들을 만나도 머릿속 여자와 생각 대화를 하는 것만큼 재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오프라인으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단절된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단절이다. 전혀 외부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건 내가 여자와 생각 대화를 너무나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 대화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집중이 잘 되었다. 사람은 자신을 모르는 불특정 소수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채팅이 그래서 없어지지 않는다. 카카오톡도 그렇다. 나를 모르는 어떤 누군가와 대화한다는 건 일종의 관음을 해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여자와 나는 일주일 내내 이런저런 생각 대화를 이어갔다. 그 덕분인지 자주 마주치는 여자는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 얼마 전에 ‘아비정전’을 봤어요. 혹시 장국영 알아요?

여자: 장국영은 아는데 아비정전이라는 영화는 처음 들어요. 오래된 영화죠? 장국영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나이가 대략 30대는 넘었군요. 호호호.

나: 그런 식으로 점점 좁혀오시겠다?

여자: 호호호 그 영화가 그래서 재미있다는 거예요? 한 번 이야기해 봐요. 어떤 영화였어요?

나: 90년대 초 영화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알아요?

여자: 당신은 정체가 뭐예요? 호호호 영화, 문학 뭐 이런 쪽?

나: 그런 것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많은 사람이 좋아해요.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여자: 어머, 제가 모른다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나: 아니에요. 그런 건.

여자: 호호호 저는 그 많은 사람 속에 속하지 않아요. 저는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가 봐요.

나: 소설은 아주 재미있어요. 사랑을 운명이라 믿는 여자와 그건 그저 우연이라 여기는 남자. 그런 남자 여자 네 명의 이야기거든요. 세상의 모든 남녀를 다 함축시켜 놓은 것 같아서 무척이나 재미있어요. 아비정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왕가위 버전이에요.

여자: 왕가위? 가위? 이름이 왜 그래요? 막 뭐를 자를 거 같잖아요.

나: 홍콩 영화감독 이름이에요. ‘일대종사’ 알죠?

여자: 내가 알까요?

나: 송혜교도 나오는데 몰라요? 유명한데?

여자: 전 송혜교 별로 안 좋아해요.

나: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그러면 영화 ‘해피투게더’는요? 몰라요?

여자: 예쁜 것들은 다 별로예요.

나: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여자: 예능 프로? 알죠. 그러나 영화도 있나요?

나: 영화 해피투게더가 있거든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좋아요.

여자: 내가 이상한 걸까요? 모두가 아는 거예요?

나: 아니에요. 모두가 알지는 않아요.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걸요. 이상하지 않아요.

여자: 호호호. 정말이죠? 거짓말이면 저 화낼 거예요.

여자와 생각 대화를 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여자는 내가 말한 책과 영화는 시간을 내서 읽고 보고 왔다. 하지만 여자와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 근데 아비정전에서 누가 주인공이에요?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장국영이 나중에 죽어요?

나: 주인공은 나오는 모두가 주인공이에요. 그러나 장국영이 주인공이라고 홍보했었죠. 정확하게 말하면, 이선 순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장국영과 유가령이 주인공 같아요.

여자: 유가령? 유가령이 누구? 예쁜 여자?

나: 하하하 유가령이나 장만옥이나 다 예쁘니까. 장국영은 죽어요. 죽음으로 해서 장국영의 결핍이 완성됩니다.

여자: 결핍을 죽음으로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을까요?

나: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왕가위는 장국영, 아비를 그렇게 그리고 싶었나 봐요.

한동안 생각 대화가 끊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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