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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 여자와 스쳐 지나갔는데 5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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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자와 마주치기 위해 나는 마주치는 자리에서 어슬렁어슬렁했다. 일주일에 네 번 정도 마주친다. 하지만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기분이 묘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니 손을 뻗으면 언제나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만다. 모든 것들이 그렇다. 여자는 이주일이나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여자가 더욱 생각이 났다. 일상을 보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여자가 일하는 곳으로 올라갔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 속눈썹 가게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여자의 이름을 모르니 일일이 더 들어가야 했다. 덩치가 큰 여자가 여기 있나요? 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양손을 이렇게 크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속눈썹 가게가 거의 열두 군데가 넘었다. 몇 군데는 다른 미용시술을 같이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확인한 곳은 네 군데밖에 안 되었다. 나머지는 밖에서 서성거리며 안을 들여다봐서 안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전부 확인할 수 없었다.


덩치가 있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만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여자는 더 생각이 났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해도 여자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지끈거리다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눈을 있는 힘껏 감고 머리를 꽉 감싸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여자: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이지?

나: 도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혹시 자주 마주치는?

여자: 네? 마주쳐요? 어디서요? 당신 스토커?

나: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여자: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잘도 하시네. 흥.

나: 이게 왜? 머릿속에서 왜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죠?

여자: 그건 저도 모르죠. 저도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요. 이건 착각이 아니죠?

나: 네, 그런 것 같군요. 일단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나는 남자, 당신은 여자.

여자: 목소리를 들으니 할아버지는 아니네요.

나: 하, 할아버지라뇨! 그런 당신도 할머니는 아니군요.

여자: 흥, 웃기시네, 할머니라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하지만 당신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건 아니에요. 빨리 나가세요. 머릿속에서.

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나도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나도 당신의 목소리가 거북하다고요.

여자: 흥, 웃기시네.

나: 웃기시네! 밖에 할 줄 모르시네.

여자: 호호호 제가 그랬나요.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대화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나: 그러게요. 혹시 지금 어디서 생각하고 있나요?

여자: 저요? 저 지금 욕조에 있어요. 발가벗고 있다고요.

나: 네?

여자: 지금 상상했죠? 남자들은 늘 그렇다니까.

나: 아니요. 상상하지 않았는데요.

여자: 상상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거 보니 상상했네, 상상했어. 내 알몸 상상하고 있는 거 맞죠?

나: 아닙니다. 절대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잖아요.

여자: 아니, 나를 알면 알몸을 상상한다는 말에요? 이거 이거 안 되겠네. 당장 신고해야겠네.

나: 아니, 이봐요!

여자: 네?

나: 신고는 제발.

여자: 호호호,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고해요. 농담이에요. 이렇게 생각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야, 정말.

나: 생각 대화요?

여자: 네, 우리가 하는 대화가 생각으로 대화하니까 생각 대화죠.

나: 아, 그렇게 되는 건가요? 생각 대화, 뭔가 신선한데요. 그런데 생각 대화는 어떻게 끊을 수 있죠?

여자: 글쎄요, 저도 모르죠. 어떻게 우리가 생각 대화를 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끊어버리는지. 하지만 우리는 볼 수 없으니 말을 하지 않으면 그냥 끊어지는 게 아닐까요?

나: 그럼, 말을 하지 말도록 해봐요, 우리.

여자: 왜요? 이렇게 생각 대화를 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렇게 빨리 인연을 끊자고요?

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근래에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여자: 여자 문제군요. 저한테 털어놔 보세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나: 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갑작스럽네요.

여자: 뭐 어때요? 우리는 서로 모르니까 편견 없이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잖아요. 채팅처럼 말이죠.

나: 그럴 수 있겠군요. 지금은 말고 나중에 얘기할게요. 준비 없이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아요.

여자: 왜요? 약속 있어요?

나: 아니에요. 저의 문제입니다. 언제나 바로바로 대응하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목욕해야 하잖아요. 우리, 말을 하지 않으면 생각 대화가 끊어지는지 한 번 해봐요.

여자: 당신, 역시 나의 알몸을 상상하고 있었군요.

나: 아니라니까.

여자: 호호호. 좋아요. 저도 이제 본격적으로 비누칠을 하고 싶거든요.

나: 그것참.

여자: 호호호 어서 말을 끊어요. 시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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