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
복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 복도의 벽에는 어떤 그림이나 글씨나 문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삭막하지는 않았다. 단지 소리가 소거되어서 이상할 뿐이었다. 대략 20분이나 걸을 수 있는 복도를 지닌 건물이 있을 수 있나? 아마 없을 것이다. 시간을 보니 30분을 걸었나? 아니 모르겠다. 모르는 일은 어느 순간 모르게 된다. 굳이 알려고 들 필요가 없다. 그때 복도는 순간 자줏빛이 나더니 벽이 온통 자주색으로 바뀌었다. 계단이 나왔다. 드디어 1층으로 가는구나. 계단도 자줏빛이 돌고 벽은 자주색이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도 1층은 나오지 않았다. 나가는 문이 없었다. 아무리 내려가도 나가는 문은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계단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런데 계단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계단이란 머무는 곳이 아니다. 계단에 머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계단에 머무르면 세상이 조금 달리 보인다. 계단에 벤치가 있으면 앉아 보고 싶고, 계단에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면 집중이 잘 된다.
계단에 서서 창으로 밖을 보면 풍경도 다르게 보인다. 계단에서 먹는 햄버거는 더 맛있다. 계단 오르기를 하면 어떤 운동보다 운동이 많이 된다. 사람들은 계단을 지나치는 하나의 통로로 생각한다. 계단을 빨리 통과하고 싶어 한다. 엘리베이터를 놓치고 계단을 오를라치면 인상부터 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분명 계단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일상에서 계단에 머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계단에 대해서 다시 깨달았던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영화 보러 갈 때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를 바랐다. 여름에 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혀도 계단을 고집했다. 다른 사람들과 확실히 달랐다. 우리는 13층이나 되는 계단을 걸었다. 5층과 6층 사이의 계단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작아진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구경했다. 그녀는 계간에 서서 하는 키스가 좋다고 했다. 그렇게 키스하다가 놓친 영화가 여러 편이었다. 어느 날 키스를 하다가 그녀가 나의 입술을 물어뜯어서 입술에서 피가 철철 났다.
피 맛을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나의 피 맛을. 나는 피를 흘려서 턱 밑으로 전부 붉게 물들었다. 피가 옷에 스며들면 물감의 붉은색이나 다른 붉은색과 다르다. 이건 피야, 하고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냈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경찰이 왔고 응급실에 갔다. 그 뒤로 경찰이 몇 번이나 연락을 했다. 이 도시의 극장이란 극장은 전부 갔다. 극장보다는 극장이 있는 건물의 계단을 전부 올랐다. 마음에 드는 계단이 있는 극장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아니 극장 관계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계단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벤치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그 건물의 계단에 한두 시간씩 머무르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 모습은 초등학교 복도에서 그림을 보던 소녀의 모습이었다. 가끔 아파트 계단에 앉아서 노는 아이들을 본다. 앉아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왜 그렇게 보였을까. 어째서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을까. 왜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그저 아이들이 계단에 앉아서 놀고 있을 뿐인데.
계단만 있으면 아무리 높은 곳이라도 오를 수 있다.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지만 계단은 고장 날 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고장 난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지금 이 계단은 고장 난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내가 고장이 났거나. 둘 중 하나다. 계단이 고장 날 리가 없는 확률이 더 크기 때문에 내가 고장이 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고장 난 것도 모른 채 지금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다가 고장이 났을까. 이 시대에 사람들은 들고 다니는 기기가 많아졌다. 전부 충전을 해야 한다. 충전해주지 않으면 폰이나 태블릿이나 무선 키보드나 이어 팟이나 스마트 시계는 죽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충전을 하느라 전쟁을 치른다. 왜냐하면 들고 다니는 기기가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매일 하루 종일 충전에 열을 올리는 것뿐이다.
정작 그러다 보면 자신의 충전에 소홀하게 된다. 자신의 충전을 미뤄두고 기기충전에만 집중을 하다 보면 자신이 고장 나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나에게 철저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 1이 주어지면 폭력 1까지 주어진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녀가 나타나 나에게 자유를 하나씩 더할 때마다 나는 내 몸에게 하나씩 폭력을 행사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지금 고장 난 상태다. 그래서 끝없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그렇게 두렵지 않다. 세상은 정말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아마 이대로면 지하 100미터까지 내려갈 수 있다. 지하 100 미터면 어떤 세상일까. 영화나 소설 같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저 깜깜하고 딱딱하고 벌레들이 우글우글거릴 뿐이다.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계단은 온통 밝은 자줏빛이고 이상하지만 마음이 편했다.
고작 커피를 늦게 마실 뿐인데 뭐. 커피 정도 하루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진 않아. 사실 커피 맛도 잘 모르잖아. 가장 저렴한 가격에 진하게 마실 수 있는 샷을 하나 추가하는 것뿐이다. 고작 그 정도의 커피를 하루 정도 마시지 못하는 것뿐이다. 커피 정도 하루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되진 않아. 분명 커피도 계단에 서서 마시면 맛도 더 좋을 거야. 모습도 더 멋지겠지. 계단은 무취고 소리도 없다. 내가 내는 소리까지 이 계단은 먹어 버렸다. 언젠가는 끝이 난다. 그 끝이 너무 멀게만 느껴져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대로 멈추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라면 배가 고프지도 않을 것이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 그런 세상이라면 변기에 앉아서 시간 들여 배설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는 전부 허구다. 주인공들은 카페에서 레스토랑에서 자주 먹으면서 화장실에 가는 장면은 없다. 먹으면 배설하는 게 본능이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생명체는 모두 그렇다. 영화는 생략하는 게 많다. 영화니까. 그녀는 배설하는 모습도 내가 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세상에 왜 그런 모습을 봐야 하는 거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까지 볼 수 있어야지!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인간은 참 모순적이다. 더러운데 깨끗하고, 착한데 못됐다. 다정한데 나쁘다. 섹스는 환멸적일 때도 있지만 섹스를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인간만큼 모순적인 게 이 세상에 있을까. 그녀는 가끔 나의 팬티를 입고 지냈다. 사각의 팬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안 맞을 거 같은데 잘 맞았다. 헐렁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집에 불이 났는데 가스를 마신 후 죽고 말았다. 사고였다. 장례식장을 지키는데 조문객이 거의 없었다. 그녀도 없었다. 나는 장례식장에 앉아서 그녀의 어머니 조문객을 맞았다. 하지만 누구도 오지 않았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옆의 장례식장에서는 곡소리가 들렸고, 다른 장례식장에는 염불소리도 들렸다. 그녀가 집에 불을 낸 것을 안다. 가스를 열어 놓은 채. 나는 알고 있다. 경찰이 나에게 왔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녀는 내가 안 된다거나, 싫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거절당하는 게 싫어서 미리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자해를 했다. 모두가 질려했다고 그녀가 말했다. 너는 왜 다른 사람처럼 질려하지 않느냐고 울면서 말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혼란은 그녀의 머리를 흔들었다. 혼란이라는 벌레는 머리 저 안쪽으로 들어가서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서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떤 날은 걸리적거리고 더럽다며 잠을 자고 있는 나의 바지를 내려 사타구니의 털을 전부 깎았다. 왜 그러냐고 말하면 그녀의 가위질이 날카로워질 것 같아서 가만있었다. 잠이 한 번에 달아났다. 실컷 가위질을 하던 그녀가 얼굴을 거기에 파묻고 잠이 들어 움직이지 못했다. 계단은 이어지고 있다.
이대로 계단이 끊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어떤 통로를 통해 다른 세계로 빠지는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동참할 수 있다. 나는 변하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지만 그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녀가 내 앞에 최초에 나타난 건 분명 초등학교 복도에서다. 영혼의 모습을 한 채로 말이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무엇 때문인지 광기를 드러내며 나의 곁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녀의 어머니는 정말 그녀의 어머니였을까. 어쩌면 그녀를 감시하는 감시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또 다른 감시자의 눈을 피해 나에게 와서 머물다가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연결하고 보니 마음이 편했다. 마음이 자꾸 편한 쪽으로 믿게 된다. 그런 점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버틴다. 그녀는 진짜 살아있었다. 허구가 아니었다. 영화가 아닌 것이다. 영혼만 살아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만지고 비비고 할 수 있는 살갗을 가지고 있는 진짜였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그걸 바라고 있는 또 다른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지도. 그녀는 나의 일상을 전부 파괴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는 사실 아무렇지 않게 매일 반복된 일상을 보내지만 그녀가 보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덮인 피로는 그녀의 방호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방호벽을 거둬냈다. 나는 얼마나 내려왔을까. 계단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올라갈 수조차 없다. 계단은 위로 오르거나 밑으로 내려가는 길 뿐이다. 나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다. 계단,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복도에 이어 계단도 이름이 멋지다. 자식을 낳아서 이름을 계단으로 짓는다면 멋지지 않을까. 하지만 당사자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자식에게 욕을 듣게 될까? 아들이면 괜찮은 이름이 아닐까? 하지만 딸이라면? 오히려 유니크해서 더 나을지도 몰라. 만약 딸이 그녀를 닮았다면 나는 더없이 예뻐해 줄 것이다. 반은 그녀를 닮고 반은 나를 닮을 것이다.
그녀처럼 광기의 끝을 달리는 행동은 하지 못하게 내가 막는다. 딸에게는 예술 따위 가르치지 않을 거야. 예술은 숨어 있는 광기를 끌어낸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크게 웃었다. 그녀는 나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아이는 갖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망가졌다는 것을 나에게 자주 말했다. 하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설령 신이라도 미래에 일어날 일은 모른다. 그때 주머니에 꽂혀 있던 텀블러가 떨어졌다. 텀블러를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니 계단에 미세한 금이 보였다. 이질적인 금이었다. 금이 간 부분을 손으로 밀었다. 그랬더니 그곳이 밀리면서 문이 나타났다. 드디어 계단의 끝이다. 문을 여니 1층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맑고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카페의 주인과 인사를 하고 텀블러를 건넸다. 그때 폰이 메시지를 울렸다. 그녀였다. 나는 커피를 받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그녀가 집에 와 있었다. 이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방법을 제대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