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싸구려 김밥을 먹고 위로를 받는다고 하니 옆에서 이만 원짜리 김밥을 먹으면 위로를 몇 십배는 받겠네,라고 했다. 참 뭘 모르는 말이다. 이만 원짜리 김밥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싸구려 김밥에 든든해지는 것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이만 원짜리 김밥을 먹고 든든해지지도 않고 맛도 이만 원 어치만큼 나지 않으면 위로는커녕 불만 가득한 식사시간일 것이다.
내가 조깅을 하는 길목에는 김밥 튀김을 파는 곳이 있다. 역시 김밥 튀김도 나를 위로해준다.
김밥 튀김은 뜨거울 때보다 식은 김밥 튀김에 와사비를 듬뿍 뿌려 먹는 게 맛있다. 하나에 사백 원, 다섯 개 이천 원. 사천 원이면 김밥 튀김이 열 개다. 맥주와 함께 홀짝거리며 먹다 보면 꽤 기분이 좋다. 미나리 무침과 함께 같이 먹다 보면 분명하게 위로를 받는다.
이만 원짜리 김밥에서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다. 넌 김밥은 싸구려를 먹으면서 이어폰은 뱅 앤 올룹슨을 쓴다며 핀잔을 들었다.
다이소에서도 이어폰을 판다. 오천 원이다. 다이소에서 급한 김에 조깅을 하다가 두 번 구입을 했지만 하나당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뱅 앤 올룹슨이 주는 위안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싸구려 김밥이 주는 위로도 존재한다.
세계는 그런 위로들이 공존하고 있다. 공존을 위협하고 공존을 깨트리는 건 둘 중에 하나만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각각의 사정이란 게 있고 우리 모두는 그 각각의 사정에 따라 사고하며 지낸다. 그리하여 성격이 비슷한 사람은 있으나 같은 사람은 없다.
싸구려 김밥이라고 해서 맛 까지 저렴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