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눈으로 보이는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 마음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될까.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 일상에 변화를 얼마나 줄까.
아주 오래전 케이비에스에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개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다큐를 한 달 정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마지막이 ‘용서’ 편으로 6부작의 막을 내리게 된다.
1편 ‘마음’ 편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마음이 몸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지배하는지. 그래서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아프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마음이 아픈 사람을 주위 사람들이 마음으로 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마음이 아픈 것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되기도 한다.
한 여성이 인터뷰를 한다.
화면은 병동에서의 간질환자의 발작하는 모습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보여준다. 정보가 없는 사람이 옆에서 본다면 무서울 것이다. 간질은 뇌에 손상이 있거나 종양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정상인의 뇌를 가지고도 간질 증상을 보이는 여성이 인터뷰에 응한다.
그리고 인터뷰 도중 간질 증상을 보인다. 말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굳어지더니 점점 말을 못 하며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곧 간질 증상이 나타난다.
주치의는 말한다.
뇌에 손상이 없더라도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던가 자기를 봐 달라는 표현의 마음이 뇌를 이용해 간질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 여성의 뇌는 아픈데 몸이 아프지 않으니 뇌가 나만 아플 수가 없다며 겉으로 표현되는 게 간질로 나타난다고 한다.
‘애정’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인다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유형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무형의 단어가 인체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 한 실험을 통해서 보여준다.
토끼 여덟 마리씩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실험을 한다. 한 그룹에게는 먹이를 줄 때 사람들이 아기처럼 안아주고 칭찬해주며 애정을 쏟으며 먹이를 준다. 또 다른 한 그룹에게는 먹이를 줄 때 호랑이 소리를 들려주며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며 먹이를 준다. 그리고 스트레스군의 먹이에게는 콜레스테롤이 2% 들어있다. 인간이 하루에 삼겹살 4킬로를 먹는 것과 흡사하다.
실험 일주일 후 토끼들에게 사람들이 다가가자 친밀군의 토끼도 경계심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군은 맹수들의 울음소리에 잔뜩 긴장한 모습이다. 눈에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고 4주 후.
스트레스를 받으며 먹이를 먹던 토끼들에게는 혈관이 막히고 각막이 혼탁해지는 등 안구가 손상이 많이 된다. 두 마리 정도는 녹내장에 이르렀고 이런 상태로 두 달이 지나면 안구가 터진다고 한다. 반면 애정을 받으며 먹이를 먹던 친밀군 토끼들은 그런 현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을뿐더러 사람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안긴다. 먹성도 왕성하다.
애정과 따뜻한 마음이 물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비롯 이런 현상이 토끼들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용서는 기억을 하면서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편히 하고 용서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한데 이 마음은 어디에서 나올까?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가슴, 즉 심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고. 정말 그럴까.
어릴 때 아버지에게 폭력으로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여성이 20년 동안 떨어져 살다가 아버지가 나타나서 그동안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성인이 된 여성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용서를 한다.
정말 용서를 했을까. 진짜 용서가 될까.
사실 여기서 용서라는 건 과거의 여성 자신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용서를 해야만 한다. 과거의 폭력으로 시달렸을 때의 여성 자신만이 그 용서가 가능하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로 돌아가지 않고 입으로 용서를 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용서의 작용은 마음, 가슴이 아니라 뇌가 작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지내면서 폭력의 트라우마 때문에 운거지퍼가 된 것일지도 모르는 여성이 쉽게 그간의 상처를 용서라는 한 마디로 원래대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운거지퍼라는 말은 독일어로 벌레, 갑충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여기서 이 소설을 떠올릴 수 있다.
이 표지는 카프카의 ‘변신’ 초판의 표지다. 1914년인가 카프카가 표지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책의 표지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을 안 읽어본 사람도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유명한 고전 명작이다. 작가 문지혁의 유튜브를 보면 이 소설에 대해서 잘 설명을 했는데, 소설이라는 건 본디 답이 확실하지 않기에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야 한다고 한다. 카프카의 변신 역시 확실한 답이 있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던지는 질문이 훨씬 많은 소설이다.
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변신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 역시 제대로 변신을 이해하지 못한 출판사도 있다. 그런 출판사에서 나오는 변신의 표지에는 벌레나 해충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다.
최초 카프카가 초판 표지를 만들 때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절대로 표지에 벌레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벌레가 어디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백석의 시를 알려면 백석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백석의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처럼 카프카의 변신을 잘 읽으려면, 제대로 읽으려면 카프카를 알면 변신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카프카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이 소설을 독일어로 썼는데 그레고르 잠자를 ‘운거지퍼’라고 표현을 했다. 해충이라는 이 말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가리켜 운거지퍼라고 했다. 카프카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살아있는 동안 꽤 고심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는 아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치 운거지퍼를 보듯 했다. 카프카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금융업에서 일을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소설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첫 소설을 들고 아버지에게 갔더니 아버지는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거기(테이블) 놓고 가,라고만 했다.
카프카는 그로 인해 세 번이나 파혼을 하는 등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는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여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 내지는 소설가는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유희로서,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으로 썼다. 그리하여 친구였던 막스 부르트에게 내가 죽으면 소설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이 없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일을 하고 생활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이,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침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시작한다.
학자들은 벌레나 동물이 되는 소설을 ‘비커밍 언 애니멀’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로의 변신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자아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벌레라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읽어버린 인간'을 말한다.
사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나 환경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인격체의 한 부분인데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을 말한다. 그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정체성을 ‘호모 사케르’라 하는데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영화로 친다면 봉준호의 영화에 이 호모 사케르가 잘 나온다.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기능을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유효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기생충에서의 근세가 그렇다.
그레고르 잠자 같은 호모 사케르가 인간 사회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요컨대 치매환자, 노숙자, 장애를 가진 사람을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벌레 보듯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최초의 이야기에서 말한, 마음이 아픈 사람도 사람들은 냉대하며 운거지퍼로 대한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아픈 것 가지고 이거 못한다, 저거 못한다, 징징댄다며 호모 사케르로 치부한다. 즉 인간의 기능을 잃어버린 자로 나락시킨다. 전혀 애정을 가지며 보호하려 들지 않는다.
변신이라는 것은, 변신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무엇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다.
호모 사케르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사람들 또는 자신을 모르는 이들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방된 자라고 문지혁 작가는 말한다. 마음이 아프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추방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였다.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벌레라고도 인간이라고도 하지 못하지만 아들이긴 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벌레라고 한다.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보고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벌레 보듯 한다. 내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면서도 누군가를 운거지퍼 취급을 하는 것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의 말미는 아주 끔찍하다. 돈 잘 벌어오던 잠자가 죽고 난 후 가족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소풍을 간다. 딸을 바라보며, 다 컸구나,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라며 운거지퍼였던 그레고르 잠자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호모 사케르를 사위로 맞으려 한다. 그렇게 없어진 자리가 메워짐으로 이 사회는 유지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 애정이 담긴 말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나머지는 전문가들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위의 마음이 아픈 사람을 추방시키지 않는 일이다. 언젠가는 나도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아파서 누군가의 애정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