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 그림은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 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책 속에 등장하는 곳의 지도이다. 제목이 다른 것은 하루키의 소설은 출판사에서 시간이 지나면 다른 제목으로 재출판하는 편법(이라 말하긴 뭣 하지만) 같은 것 때문이다. 문학사상의 '어둠의 저편'도 시간이 지나 다른 출판사 비채에서 '애프터 다크'로 나오거나 단편소설은 내용을 섞어서 다르게 출판하기도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같은 제목으로 시간이 지나 책의 두께가 줄어들어 재출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루키의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이런저런 방법으로 출판을 하고 있고, 나 같은 인간은 덥석 구입해서 읽고 있다. 참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도 내용은 같은데 제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서 출판하는 경우가 있다. 김진명의 소설 역시 제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서 시간이 지나 출판하기도 했다.
일각수의 꿈이 85년도 출간이니까 꽤 오래된 책이다. 나는 95년에 처음 접하게 되어서 매년 한 번씩(물론 건너뛴 적도 있었다) 읽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10번은 넘게 읽었다. 한 소설책을 열 번 이상 읽은 나도 참 무식하지만 그렇게 읽게끔 써놓은 하루키는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양 출판사의 '일각수의 꿈'으로 나온 1, 2권짜리 책은 너무 꼬질꼬질 닳아서, 재작년에 다른 제목의 문학사상사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시 구입하여 읽고 있다. 대부분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또 읽고 시간이 지나서 다른 출판사의 다른 번역본을 구입해서 읽는 것과 흡사하다.
한 책을 열 번도 넘게 읽으면 세세한 것 까지 자세하게 기억을 해야 마땅하겠지만 머리가 돌인지 읽고 난 후 10개월이 지나면 백지장처럼 하얗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소설의 또 다른 세계는 스산한 분위기가 깔려있다. 나는 뭣에 홀린 듯 매년 찬바람이 부는 11월이 되면 이 책을 꺼내 들어서 습관처럼 읽는다. 거참 알 수 없다.
하루키는 평소에도 약도 그리기를 참 좋아한다. 에세이나 수필집을 읽어 보면 타인에게 어떤 장소를 알려주기를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야무지게 약도를 그려 주었다고 나온다. 그래서 그 실력을 살려 일각수의 꿈에 나오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이렇게 그림으로 탄생시켰다.
수필집 ‘먼 북소리’를 읽어보면, 일각수의 꿈을 집필할 때에는 그리스의 크레타섬의 아주 황량하고 스산한 곳에서 고독과 싸우며 하루에 17시간씩 움직이지 않고 글을 썼다고 나와있다. 그곳의 사람들은 딱딱한 나무 같았고 바람은 살을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고 한다. 아내를 일본에 남겨둔 채 동네의 개들도 차갑게 느껴지는 크레타 섬의 황량한 곳에서 고독과 싸워가며 이 글을 썼다는 부분은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히며 극동의 사할린 섬의 어둡고 추운 곳에서 외로움과 싸워가며 글을 쓴 안톤 체호프가 떠오른다.
하루키는 정말 꼼꼼하고 빈틈이 없는 글을 써내지만 에세이를 읽어보면 언제나 구멍이 뚫린 것 같아 보인다. 하루키가 그린 세계의 끝의 마을의 그림은 그래서 조금 뭔가 엉성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픽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겠지만, 좌측 위쯤의 '구병영'의 모습은 투시도를 보는 듯하다. 1 소실점으로 건물을 그렸다. 잘 그렸다.
그런데 '서쪽 다리' 밑의 '관사'는 단면도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건물을 그렸다. 평면도에 가깝다. 그리고 관사 옆의 '주물공장' 역시 투시도인데 1 소실점이 구병영 과는 반대편으로 그려져 있다. 역시 밑의 '직공 지구'는 단면도이고 그 위의 '공장가'는 다시 투시도이다.
고로 이 그림은 역시 쉬르리얼리즘이다. 초현실이라는 것이다. 초현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저쪽 세계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초현실의 세계이며 그곳을 그린 지도 역시 초현실인 것이다. 꼼꼼한 하루키는 이 모든 걸 간파하고 저 지도를 그린 것일까. 너무 지도답게 그려놓으면 초현실이 아니지, 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