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에세이
제철에 먹는 송이의 맛은 좋다. 일품이라는 맛이 어울린다. 송이는 제철이 아니더라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맛있다. 송이는 정말 희한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버섯은 어딘가 음식에 곁들여서 굽거나 삶겨서 옵서버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송이는 도대체 뭔가? 송이는 왜 그런지 굽거나 삶아서 먹기보다 생으로 죽 찢어서 먹는 게 더 좋다. 송이가 밥상 위에 오르는 순간 다른 모든 음식이 송이를 위한 곁들인 밑반찬이 된다.
죽 찢어서 입에 넣으면 아침에 바로 구입한 초초한 두부처럼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채 오로지 송이가 간직하고 있는 그 맛을 전부 느낄 수 있다. 정말 희한하고 대책 없이 귀하고 맛이 좋다. 송이의 맛을 굳이 따지자면 ‘맛있다' 보다는 ‘맛이 좋다’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떤 무엇인가가 가미되어서 단맛, 짠맛, 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아아 정말 맛있어가 아닌 참 맛이 좋네, 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이 송이다. 그렇게 생으로 먹다가 참기름 장에 살짝 찍어서 먹으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건 아무래도 음식이 가지는 기묘한 힘인 것이다.
송이의, 송이 만의 향과 맛이 마치 뇌를 깨끗하게 청소를 해 줄 것만 같다. 최상급 자연산 송이는 비싸다. 자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송이가 택배로 날아오면 고기와 함께 먹어서 그런지 송이는 육류와 잘 어울린다. 송이에는 기묘한 흐름이 존재한다. 송이를 먹고 나면 건강해진다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송이와 함께면 고기도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걸,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주 나쁘면서 절대 놓치기 싫은 그 사람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송이를 먹고 나면 괜히 힘이 들어가고 막 달리고 싶어 진다.
그런 기류를 형성하는 여러 음식이 있다. 그런 식재료에는 플라세보가 강하게 작용한다. 먹고 나면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마치 뽀빠이가 된 것만 같다. 게다가 누가 그러던데 이거 먹고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 그렇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버섯은 음식에 들어가 음식의 풍미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데 송이는 당당하다. 송이 자체로 맛을 내고 사람들이 찾기 때문이다. 자태 또한 도도하며 색감 역시 깊고 진하다. 송이가 가지는 저 색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맑은 산속의 공기를 그대로 입안으로 들이는 기분을 송이는 느끼게 한다. 먹는 순간 온후하고 웅숭깊은 자연의 맛을 송이는 보여준다. 자연의 온전한 물산이 코를 어루만지고 혀를 주무른다. 환절기에 먹는다면 버석거리는 코 속이 송이의 향으로 촉촉해지는 기분도 든다.
송이는 거개 구워 먹어도 맛이 좋지만 역시 생으로 죽죽 찢어서 향을 듬뿍 느끼며 먹는 맛이 좋다. 향으로 한 번, 입으로 한 번 먹을 수 있는 게 송이다.
오늘도 내 마음대로 선곡.
비틀스 녀석들이 아직 기타의 에프 코드도 겨우 잡을 때 런던의 내놓으라는 연주 클럽에서 15세의 기타 신동이 나타나서 런던을 평정했다. 그게 바로 에릭 클랩튼이었다. 에릭 클랩튼은 비틀스, 조지 헤리슨과 절친이었다. 얼마나 절친이었냐 하면 에릭 클랩튼은 절대 자신의 기타를 누구도 못 건드리게 하는데 ‘와일 마이 기타 젠틀리 웹스’를 조지 헤리슨이 만들 때 기타도 조지에게 줘 버린다. 그래서 조지가 몹시 좋아했던 일화도 있고, 조지의 아내를 에릭 클랩튼이 너무 좋아하니까, 또 조지는 자신의 인형 같은 아내, 패티 보이드(는 그 당시 정말 인형 같은 외모였다. 비틀스의 팬으로 따라다니다가 조지에게 손등인가? 별표 표식 같은 낙서?를 받아서 친해지게 되었다가 결혼까지 한 걸로 안다)까지 에릭 클랩튼에게 준다. 기타도 나눠 갖고, 아내도 나눠 갖는 참으로 기묘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이지만 지구를 파괴할 정도의 예술이 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에릭 클랩튼은 70년대 일본에는 자주 가서 공연을 했다. 엄청난 자본이 흘러넘쳐나는 당시 버블시대라 한 번 공연을 하면 돈을 마구 뿌렸다. 그래서 70년대의 일본은 그야말로 공연이 포화상태일 정도였다. 카펜터즈, 에릭 클랩튼, 비틀스까지 대단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하루 전에 도착해서 서울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잠시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편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노래는 아들이 4세 때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고 난 후 만든 노래다. 에릭 클랩튼은 세계 3대 기타리스트에 반드시 들어가는데 그 이유가 속주 같은 연주가 아니라 소울이 깃든 리듬 앤 블루스 연주라고 그렇다. 그래서 그 기타 연주를 가장 볼 수 있는 노래가 ‘라일라’이며 이 노래가 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지만 오늘은 ‘티얼즈 인 해븐’을 들어본다. 에릭 클랩튼 씨, 코로나 끝나면 또 한국 와줘요, 예? 한국사람들만큼 당신의 연주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