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의 오마쥬]
기차는 앞으로 가고 있다.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후진을 하거나 철길 위를 이탈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로지 앞으로 그리고 또 앞으로 목적지까지 지속적으로 갈 뿐이다. 그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또는 시간이 앞으로만 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가 점점 어른이 되듯 기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달리는 말처럼 멋지게 쿠쿵, 쿠쿵하며 출발하여 터득 터득 터득 터득하는 박자에 맞추어서 기차는 빠른 속력으로 멋지게 앞으로 간다.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서 어지간하면 늦는 법이 없는 것이 기차다.
그래서 그는 타지방으로 출장을 갈 때에는 오로지 기차를 이용한다. 특히 야간열차를 이용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좋아한다. 고요하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사색을 즐기거나 잠이 오면 그대로 잠들 수 있어서 좋다. 낮의 기차는 잠들지 않은 아기와 같다. 운치와는 조금 멀어지며 사람들의 이동도 잦다. 그래서 낮 기차는 그와 맞지 않았다.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가는 기차를 그는 언젠가부터 택하게 되었다. 밖에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고 기차의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는 것은 어쩐지 양수 속에 들어가 있는 따뜻한 안온 감이 들었다. 누군가의 품에 쏙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든다고 그는 터무니없지만 생각했다.
터득 터득 터득 터득하는 일정한 소리를 내며 바퀴를 굴려 꾸준히 지치지 않고 달려가는 야간열차에 그는 오늘도 몸을 파묻고 출장길에 올랐다. 좀 웃기지만 열차의 터득 터득하는 소리는 그래 맞아, 그래 맞아, 그래 맞아.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혼자서 외투에 목을 집어넣고 혼자서 킥킥거렸다. 누군가 볼까 봐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에도 지방에 거래 건으로 갈 땐 기차만 한 게 없다. 더 정확하게 야간열차 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야간열차의 여운은 운치가 있어서 더욱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운치라고 해봐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둡고 긴 밤의 기운이 드리운 야외에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 불빛이나 인공광원이 만들어내는 허술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그는 떠올렸다. 시들어가는 상상력을 부풀리게 했다. 어두운 겨울밤의 공기도 그렇지만 기차에 올라타면 위기의식 같은 것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아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렇게 야간열차는 꾸준하게 달려 새벽 2시에는 영주의 간이역에 잠시 정차를 하고 15분간 대기를 한다. 그는 그 시간에 잠시 내려 따뜻한 가락국수를 한 그릇 사 먹을 요량이었다. 이것이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길목의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어린 시절을 자연스레 생각나게 만드는 간이역에서 쑥갓이 들어간 짭조름한 가락국수를 먹는 것.
겨울에 유독 어울리는 간이역의 가락국수.
그래서 아직 잠들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야간열차의 실내는 어두웠고 고요했다. 기차가 철길 위를 달리는 소리만이 리듬감 있게 들렸다. 그래 맞아, 그래 맞아, 하며 말이다.
영주의 간이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야간열차는 스르륵 미끄러지듯 멈추었다. 그는 간이역에 내렸다. 기차 밖의 날은 코끝이 아플 만큼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상당한 양으로 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와서 그런지 입김에서 비린내가 조금 났다. 그는 내리자마자 간이매점으로 달렸다.
"가락국수 한 그릇이요." 그는 어깨를 모으고 추워서 발을 동동 굴렸다. 그가 주문함과 동시에 가락국수 장수가 일 분 만에 가락국수 한 그릇을 말아 주었다. 그래 이거야, 하며 그는 세상에서 제일 빠르고 맛있는 가락국수를 받아 들고 후후 불어서 후루룩 먹었다. 가락국수의 면발, 쑥갓은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로지 야간 기차 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가락국수 맛은 어떤 맛과 바꿀 수 없었다. 가락국수 그릇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세상을 다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짭조름하고 뜨거운 국물이 입안에 들어가서 체내로 퍼지면 몸 안은 뜨거운 기운으로 따뜻해졌다. 조미료가 가득 들어간 뜨거운 가락국수 국물이 위장으로 흘러들어 가는 기묘한 느낌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좋았다.
그는 국물을 마시면서 생각을 했다. 시대가 이렇게 발전을 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촌스러운 간이매점에서 가락국수를 팔다니. 그는 무척 묘한 기분이었다. 간이역은 오래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천장의 형광등도 가락국수 장수가 입고 있는 옷도, 손에 들고 먹고 있는 가락국수 그릇도 아주 오래 전의 모습처럼 보였다. 요즘 이런 촌스러운 기하학무늬의 멜라민 그릇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니. 그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하면서 기이했지만 간이역의 가락국수 판매대에서 서서 가락국수 한 그릇을 진지하게 먹었다.
가락국수를 먹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나올 법도 한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 혼자 서서 가락국수를 후후 불어서 먹었다. 차가운 겨울의 밤, 간이역의 간이매점에 서서 뜨거운 가락국수를 후루룩 먹는 기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국에 몇 명 없을 것이다. 입안에 가락국수를 가득 넣어서 입을 오므리고 5분 만에 다 먹고 얼마냐고 묻자, 매점의 가락국수 장수가 500원이라고 했다.
에? 놀라서 그가 고개를 드니 인심 좋게 생긴 가락국수 장수가 아주 두꺼운 외투를 입고 양팔에 촌스러운 토시를 한 채 웃고 있었다. 그는 갸우뚱 거리며 천 원을 꺼내서 가락국수 장수에게 건네주며 잔돈은 됐다고 했다.
세상에 가락국수가 500원이라니. 질이 안 좋은 면이나 재료를 사용한 것일까. 그리고 외투는 뭐지. 아무리 봐도 20년은 더 된 의복 같았다.
그가 다시 야간열차에 뛰어 올라서 자리를 찾아서 걸었다. 뭐랄까. 열차 안의 분위기가 기차에서 내릴 때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뱃속에 들어간 가락국수의 뜨뜻하고 더운 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차 안의 온도차 때문인지 기차의 유리면에 성에가 뿌옇게 껴 있었고 그동안 맡아보지 못한,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의 냄새가 녹록히 의자에서 느껴졌다. 시간의 냄새는 순수하게 났다. 아주 오래전부터 의자에 있었던 것처럼 순수한 시간의 냄새가 있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생성되자마자 사멸되는 관념이다. 반복이다. 그 말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아주 무섭고 그 속에서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어째서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는 고개를 계속 갸우뚱 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자신의 자리로 갈수록 쌍방향의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라고 정의하기에는 많은 모자람이 있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자리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으니 맞은편에는 곰이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어이없지만 곰이었다.
곰? 이라니. 맙소사.
곰은 주둥이가 일반 곰에 비해서 길었고 얼굴은 굉장히 컸다. 그에 비해서 눈은 작아 보여서 개그맨의 인상을 풍겼다. 그는 그러면 안되지만 순간 큭큭 하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놀라서 입을 막았다. 곰은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어서 아주 따뜻하게 보였다. 곰은 신문에 집중을 하다가 그를 한 번 보더니 읽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저 큰 손으로 신문을 어이없지만 잘 도 접었다. 신문을 보니 83년도 신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전 그리즐리 베어입니다. 네, 분명 보고 계신 것처럼 곰이 맞습니다."
그는 입을 조금 벌리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아직 소화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꿈틀거리는 가락국수가 다시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곰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라거나 흥분을 하면 먹은 음식이 소화가 되지 않고 역류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화불량 때문에 늘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다. 시험을 볼 때는 늘 긴장 탓에 이전에 먹은 음식이 시험을 보는 도중에 자꾸 올라와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선을 보는 자리에서도 그는 음식물이 올라와서 화장실에 몇 번을 다녀오는 사이에 상대방이 그대로 집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늘 지는 인생이었다.
"함고동 씨, 저에 대해 자세한 소개는 좀 있다가 하겠지만 먼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넋 나간 모습으로 곰을 쳐다보고 있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평일, 새벽의 겨울 시간대라 몇몇 안 되는 손님들이 잠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제 이름은 함고동이 아……."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네, 곧 차표 검열이 올 겁니다. 제가 지금 기차표 없이 기차에 올라타버려서 제 차비를 좀 계산해 주십시오."라고 곰이 말했다. 저 툭 튀어나온 주둥이로 잘도 말을 했다.
"하지만."
"이천 원이면 됩니다."
"엣? 이천 원이요?"
"네, 이천 원이면 아마 잔돈을 거슬러 줄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라서 제가 계산을 해 드리면 되는데, 요즘은 기차 요금이 이천 원으로는……."까지 말했는데 곰은 신문을 들어 보이며 지금은 83년도라고 했다. 그는 곰이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기차의 복도 끝에서 은하철도 999의 차장처럼 복장을 한 직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간에는 할인이 된다고 해도 자신은 4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기차표를 구입한 것으로 아는데 이천 원이라니.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차표를 꺼내서 차장에게 보여주고 앞의 곰이 차표를 잃어버렸는데 계산을 하겠다고 하니 표정을 알 수 없는 차장은 천구백 원을 내라고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이천 원을 꺼내서 차장에게 주고 백 원을 건네받았다. 간이 기차표를 받아서 곰에게 건네주었다. 곰은 두툼한 손으로 기차표를 그에게서 잘도 받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이 주머니인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배가 위치한 곳의 털 속으로 기차표는 들어갔다. 곰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함고동 씨,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아, 네. 그런데 제 이름이 함고동이 아니고 그러니까……."
곰은 비좁아 보이는 의자에 용케도 앉아서 몸을 잠시 흔들었다. 곰이 자신의 앞발을 들어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곰의 발바닥을 처음으로 보았다. 검은 발바닥은 오랫동안 땅바닥에 닿아서 굳은살이 켜켜이 쌓여 거칠하게 보였다.
"알래스카에 있었으면 지금은 동면을 하고 있을 기간입니다. 그런데 급하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차비도, 수행원도, 아무도 없이 혼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으로 와서 처음으로 도움을 받은 분이 함고동 씨 당신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 역시 행운아였습니다."
"곰님은 이름이?" 그는 이렇게 물어보는 자체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알래스카에서 온 그리즐리 베어입니다. 이름이 있지만 그건 너무 어려워서 부르기가 힘들 겁니다. '그리즐리'라고 불러 주세요. 저의 나이는 아주 많습니다. 함고동 씨가 상상하는 그 이상입니다. 겨우내 잠을 푹 자 둬야 봄에 풀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면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다른 곰들의 공격에도 방어를 해낼 수가 있어요. 우리들, 보기에는 이렇게 험상궂게 생겼지만(그는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식을 아주 사랑하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단체로 움직이지 않아요, 가족 내지는 개인적으로 움직여서 힘을 기르는 겁니다. 알래스카의 겨울은 지금 이곳 겨울의 몇 배나 춥습니다. 아주 혹독하게 춥죠. 땅이 얼어버립니다. 그러면 생명이 전부 끊어져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겨울의 향연이 지속되죠."
그리즐리는 잠시 말을 끊었다. 곰은 그의 옆자리에 놓여있는 가방의 주둥이에서 비어져 나온 물병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시선을 물병에 박은 다음 잠시 미동 없이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질적이었다. 침묵은 꽤 농도가 짙었고 손을 집어넣었다가는 다시는 빼지 못할 것 같은 침묵이었다. 그는 물병과 그리즐리의 눈을 번갈아 본 다음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서 그리즐리에게 건네주었다.
"하하, 뭐 이런 것까지. 단지 목이 좀 마르군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함고동 씨 당신은 참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군요. 당신처럼 좋은 사람은 드문데 전 정말 운이 좋은 곰입니다. 인간들이 오랫동안 곰을 사냥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당신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군요. 하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회사 업무 보기도 바쁜데 곰 사냥에 열을 올릴 시간이 있나.
사냥? 사냥은 또 무엇인가.
단어만 알고 있었다. 그건 있는 사람, 즉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자들의 특권일 뿐이다. 게다가 말하는 곰이라니. 곰은 티브이 속에서나 봤지 실제로 곰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동물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말을 하다니. 그의 의식과 생활 활동 반경에서 곰이라는 존재는 의미도 의식도, 그동안 자신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즐리라는 곰은 물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그래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그에게 좋은 사람이군.라고 말을 했다. 경리를 보는 어린 아가씨도 대리님은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라는 말로 부탁이나 명령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그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가버리고 말았다. 범위가 넓고 제대로 의미가 모호한 말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좋은 사람이 되었다.
"아, 맛있습니다. 풀 맛이 나는데요. 아주 좋아요. 이런 물맛을 이 먼 곳에서 맛보게 되다니. 이런 곳에는 그저 수돗물이라는 것만 존재하는 줄 알았거든요."
곰은 보기보다 어느 정도 이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곰의 얼굴에 표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면 표정은 있지만 그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터득 터득하는 기차가 질주하는 소리와 기차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는 소리와 가끔 깊은 잠이 들어있는 사람들의 피곤한 코골이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알래스카가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땅이 얼어버릴 듯했던 추위가 요즘 들어 예전 같지 않아서요. 이대로 가다가는 20년 후에는 알래스카가 변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모든 나라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은 겨울에 좀 따뜻하면 어때. 그럼 좀 더 깊게 잠들지 않아도 되고, 다른 동물들은 먹이를 못 찾아서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라고 하겠지만 말이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겨울에 굉장히 춥지 않으면 뭐랄까, 땅의 깊은 바닥이 시기에 맞지 않게 풀들을 밀어 올려서 나중에 풍성하게 되어야 할 시기에는 다 말라죽어버린다거나 병이 들어 버립니다. 그대로 죽어 버린 동물의 사체 때문에 대지는 균을 가득 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죠. 병들어 죽은 사체를 먹은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로 앓다가 그대로 픽 쓰러지고 말죠. 땅 밑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땅 밑에서도 여러 가지 활발한 활동이 지층 간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겨울에 혹독하게 추워야만 그 지층의 움직임도 둔해졌다가 다시 겨울이 오기 전까지 움직이며 여러 가지 웅덩이라든가, 새로운 물이라든가, 그런 자연 생성물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겨울이 아주 춥다고 할 수 없어졌어요. 우리들은, 그러니까 알래스카의 동물들은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결론은 알래스카의 겨울을 혹독한 추위로 지켜주는 돌이(그리즐리는 양 손으로 돌의 크기와 모양을 만들며)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지구에 살고 있는 동물들의 도움으로 사라진 돌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그 돌은 바로 여기, 이 나라로 흘러들어 왔더군요."
그리즐리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물병은 작은데 물은 계속 나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돌이 이곳에 머무른다면 이곳은 반대로 겨울이 너무나, 어마어마하게 추워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불편하겠죠. 교통수단이 지금보다 더욱 열을 내며 달릴 것이고 무엇보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도 춥습니다. 1년이 거의 고통스러운 추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겨울이 되면 생각 이상의 추위가 이 나라를 덮칠 겁니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10년 후? 20년 후에는 겨울에 집 밖으로 아예 나가지도 못할 정도의 추위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리즐리는 그의 앞으로 한층 다가와서 말했다. 눈에 보이는 그리즐리의 눈동자는 아주 맑았다. 매일 아침에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신의 눈동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그리즐리의 말을 듣고 조금은 공감이 갔고 전적으로 동감했다. 환경오염에 대해서 그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심각한 문제임은 확실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돌이라니?
"그리즐리 베어 씨?"
"네, 함고동 씨, 말씀하시죠. 당신은 참 좋은 분이십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려다가, 또 저의 이름은 함고동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그런데 아까 신문을 저에게 보여주신 것은 뭣 때문에?"
그리즐리는 자신의 옆에 놓인 신문을 들고 거짓말 같은 손가락으로 이것 말입니까, 하며 신문을 펼쳐 보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함고동 씨께서 기차의 차표 값을 잘 못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요즘의 기차표 값을 알려 드리려고 신문 날짜를 보여드린 겁니다. 지금은 83년도거든요. 개의치 마십시오." 그리즐리는 신문을 다시 접어서 옆에 두었다. 그의 시선은 신문을 향했다. 지난달에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총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를 했다는 내용도 보였다. 그는 등을 의자에 푹 기댔다.
지금이?
가락국수 값부터 이상했다. 열차 내부의 분위기도 이상했고 차장도 이상했다. 그는 요즘 휴대전화기로 기차를 예매하는 시대인데 자신은 기차역에서 표를 구한 것뿐이다. 휴대전화를 그리즐리에게 보여주려고 주머니를 뒤졌지만 휴대전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은 가락국수가 소화가 되지 않고 자꾸 올라오려고 했다. 곰 하고 대화를 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즐리 몰래 자신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돌' 이라니.
무슨 돌이 여기로 흘러 들어왔다는 말인가. 그는 돌을 떠올렸다. 그리즐리가 양 손으로 가늠했던 만큼의 돌을 머릿속에서 나열했다. 그저 돌멩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 돌 때문에 알래스카가 재난이 오고 한국에는 빙하기가 온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때렸다. 역시 아팠다. 이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관념에 고개가 숙여졌다. 몸이 순간적으로 불쾌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좌절감이 들었다. 좌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얼마 큼의 크기인지 분간도, 가늠할 수도 없었다. 그리즐리는 고개를 숙인 그에게 다가와서 손인지 앞발인지 그것을 그의 어깨에 올리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나.
그렇지만 곰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곰을 바라보았다. 곰의 눈은 아기의 눈동자처럼 검고 반짝였다. 가까이서 보는 곰의 얼굴은 정말 컸다.
"그리즐리 베어 씨, 당신은 그래서 어디까지 가시는 거죠?" 그가 곰을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곰은 그가 괜찮아 보였는지 앞발을 그의 어깨에서 내리고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다음 잠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열차 안이 유난히 추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뚜껑이 없는 오픈 기차를 타고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력으로 겨울의 밤을 달리는 것처럼 추웠다. 그는 몸을 오들오들 떨었고 양팔의 팔짱을 꼈고 몸을 말았다. 추위가 얼굴을 아프게 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히터에 문제가 생겨서 밖의 추운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어 몹시 추우니 수리를 할 동안 따뜻하게 옷을 껴입고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다. 기차는 점점 가속도가 붙는 듯했고 기차 안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훅훅 나왔고 뾰족한 얼음이 날아와서 몸을 찌르는 것처럼 추웠다. 냉기가 냉동 가스실처럼 흘렀으며 입이 덜덜 떨려서 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렸다.
"함고동 씨, 당신은 지금 몹시 추워하고 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의 품에 안기십시오. 전 온몸이 털로 뒤덮여있어서 추위는 막을 수 있습니다. 히터를 고치는 동안 이쪽으로 와서 기대십시오. 그리 따뜻하지는 않더라도 춥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즐리는 양팔을 살짝 벌렸다. 그는 내심 고민이 되었다. 곰에게는 동물의 냄새가 심하게 날 것인데 그 비린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이며, 비린내가 난다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면 무례하게 보일 것이다. 게다가 곰인데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 입안에는 연어도 순식간에 찢어버리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을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것은 한입에 물어뜯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를 먹기 위해 곰이 하는 연극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열차 안은 너무 추웠다. 냉동고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가끔 뉴스에 나왔는데 그 기사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의 사고가 돌아가기 전에 먼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체감하는 추위는 태어나서 난생처음이었다. 극심한 고통이 동반되는 추위였다. 발가벗고 얼음 바위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너무 추웠다. 고추는 얼어서 짜부라 들었고 치아는 서로 부딪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리즐리를 어렵게 고개를 들어서 쳐다보았다. 고개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왜인지 그리즐리는 웃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몸을 움직여 그리즐리의 품에 들어갔다. 품에 안기는 순간 칼바람 같은 몹쓸 추위가 단절되어 버렸다. 그리즐리의 품은 오랫동안 방에 불을 지핀 아랫목처럼 따뜻하고 아늑했다.
아아 이것이 진짜 안온감이다. 무엇보다 포근했다. 냄새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의 몸을 감싸는 그리즐리 털의 감촉이 유난히 따뜻했다. 약간 거친 듯 털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의 연약한 몸뚱이를 데워주었다.
"어떻습니까, 그런대로 괜찮지 않습니까?" 라며 그리즐리는 웃었다. 그는 품에 안겨 고개를 들어 위로 올려다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고동 씨, 그러면 다시 이어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저는 그 돌이 있는 곳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돌은 봉화와 안동을 지나 청량산의 청량사 밑에 축융봉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 돌을 가지고 제가 있는 알래스카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단지……." 하고 그리즐리는 틈을 두었다. 기차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기차를 타면 으레 터득 터득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멍하게 터득 터득하는 소리에 맞춰 고개를 흔들거나 거기에 맞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리즐리가 열차에 타고 언젠가부터 그 터득 터득 터득 터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지 돌은 아주 거대한 괄태충이 가지고 있는데 싸워서 그 돌을 가져와야 한다는 겁니다."
괄태충? 이건 또 무엇인가.
그는 괄태충에 대해서 또 잠시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야 사전적 의미의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거대한 괄태충이란 무엇일까.
"그 돌을 알래스카에서 거대한 괄태충이 꺼내갔던 것이더군요. 어째서 이 나라의 축융봉 근처에 옮겨다 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괄태충에게서 그 돌을 빼앗지 못한다면 곧 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입고 다닐 날이 곧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리즐리는 고개를 숙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즐리의 눈동자는 정말 검고 맑았다. 나이가 많다고 했지만 눈동자는 이제 태어난 지 일, 이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는 새끼 곰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함고동 씨, 당신도 저와 함께 같이 돌을 되찾아오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그리즐리의 뜬금없는 부탁으로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겨우 내려갔지만 소화가 되지 않던 가락국수가 다시 식도 근처까지 왔다.
“하지만 전 내일 거래처에 들러야 하고 그 일 때문에 먼 곳에서 밤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전 싸움이라면 엉망……." 기차는 히터를 고쳤는지 열차 안의 대기는 히터에서 나오는 깨끗하지 않은 더운 공기가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즐리의 털 속이 무엇보다 아늑하고 따뜻해서 좋았다. 모성애가 느껴지는 그 털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면 정말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을 것이다. 정해져 있는 규범 같은 것은 그리즐리의 털 속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을 거니는 듯 확정 지어지지 않는 추상적 꿈이 거대한 그리즐리의 품 안, 털 속에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리즐리의 품속에 마냥 안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계속 품속에 있다가는 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괄태충과 싸움이라니, 그는 할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아주 찌질 한 인생이었다. 싸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 몸으로 터득한 바였다.
하지만 때때로 살면서 싸움을 해서 이기고 싶은 인간이 있었다. 죽어버렸음 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런 인간들과 당당하게 싸워서 이기고 싶지만 싸움은 그와는 멀리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싸움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몸에 힘이 몽땅 빠져나가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욕이라도 듣게 되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자리에서 무서워 오줌까지 쌌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두고 있던 정혜마저 나를 외면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고여 있는, 맛 떨어져 버린 썩기 직전의 물처럼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싸워야 할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피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는 그리즐리의 품에서 나와 맞은편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기차는 터득 터득(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몸이 리듬감 있게 흔들렸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창밖은 어둠뿐이라 가끔씩 멀리 보이는 알 수 없는 불빛만이 눈에 들어왔다. 터득 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함고동 씨 어떻습니까? 같이 싸워주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정말 뿌듯하지 않을까요. 당신이 당신 나라의 미래를 조금 구했으니까 말이죠."
"조금이라구요? 그럴 바에는……."
그리즐리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비비더니. "네, 그렇습니다. 뭐랄까 자연재해나 지구가 망해 가는 것을 함고동 씨가 조금은 미뤄 두는 것에 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자연을 조금씩 파괴만 할 뿐입니다. 하늘을 자꾸 가리고 땅 밑을 끊임없이 파헤칠 것입니다. 인간 위에 인간이 누워 자고 그 위에 또 인간이 누워 잠듭니다. 이러한 반복을 순차적으로 매일매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위험한 상황이 도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반대편에서 소수지만 그런 현상의 위험성을 알리고 투쟁을 하며 환경이니, 자연이니, 출산에 대하여 소리를 높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개발이라는 명목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죠?"
"돈이죠. 자본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면 인간은 어떠한 행위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지금 괄태충이 가지고 있는 돌이 지구 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돌이라는 것을 인간이 알게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가지려고 할 겁니다. 돌은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돌이 이탈한 자리부터 망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것 따위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가지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동물이 죽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사람이 몇 명쯤 죽는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리즐리는 곰의 탈을 뒤집어쓴 환경학자일까.
"하지만……. 내일 거래처에……. 저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
"그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함고동 씨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저를 믿어보세요. 전 인간을 믿지 못하지만 당신은 믿어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틈이 있었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덧입혔다. 지금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찌질 한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고 회사에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고 그런 자신에 대해서 비관하는 모습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국의 한 작가가 말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이 늘 비슷하고 항상 읽고 있는 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5년 후의 모습도 지금과 다를 바 없다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 5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이 나은 삶인가 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혀 발전이 없었다. 돌을 던지면 바닥에 닿지도 않을 정도의 깜깜한 우물의 밑바닥 같은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
그래 좋아! 말하는 곰이야! 어때! 믿을 만 해! 그리즐리를 믿어도 좋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는 거대한 괄태충에 대해서 생각을 했지만 거대한 괄태충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괄태충이라는 건?"
"그놈은 아주 큽니다. 저보다도 덩치가 클 겁니다. 아마 내 몸집의 세 배나 네 배 정도로 클 겁니다. 온몸이 미끄덩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여있습니다. 그놈의 입에서 나오는 점액이 살갗에 닿으면 상처가 깊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무섭습니다. 저야 털이 거칠고 두꺼워서 함고동 씨보다는 좀 덜할지도 모르지만." 그리즐리의 말에 그는 상당히 긴장을 했다.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점액이 뭔지, 그 점액에 닿으면 상처가 난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즐리는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일선에서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그리즐리보다 더욱 거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놀랐지만 여전히 그 생김새나 크기가 확 와 닿지 않았다.
"아마도 그놈은 돌을 자신의 몸뚱이의 배 밑에 깔아 두고서는 돌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함고동 씨는 그놈 가까이만 가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놈은 돌을 지키느라 얼마 동안 잘 먹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의 흙이 맛있고 영양분이 높아서 이곳으로 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동굴에서 겨우 지내고 있을 거라는 것이 우리의 분석입니다. 그래서 그놈의 몸뚱이는 내 몸의 고작 세 배나 네 배 정도 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놈이 배가 부르고 힘이 강하면 내 몸의 열 배는 큰 괄태충이 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전 아직 그러한 크기의 그놈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죠."
그는 그리즐리의 말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제가 아마 그 괄태충을 본다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움직이지도 못 할 겁니다. 전 저를 아주 잘 알거든요. 좁쌀 같은 좀팽이에다가 간은 작아서 불의를 보면 정의롭게 그저 지나칩니다. 얼마 전에는 집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돈까지 빼앗겼습니다. 그런 제 자신이 너무 싫습니다. 아마 그리즐리 베어 씨가 말하는 그 괄태충을 본다면 전 아마도 겁을 엄청나게 집어먹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리즐리 씨에게 방해만 될 겁니다."
그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학창 시절에 매일매일 왕따를 당했다. 어눌했고 가만히 있어도 그는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자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유 없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도 아이들은 싫어했다. 모든 것이 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그(him) 자체가 왕따를 불렀다. 그에게 잘해주는 친구마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존재감 없는 그를 선생님들도 싫어했다.
자신감은 점점 쪼그라들어 점처럼 변해버린 지 오래됐다. 여자와 잠을 잔지도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옷을 사러 들어가서 점원이 권하면 그저 권해주는 옷을 사들고 나올 뿐이었다.
그런 나 자신이 괄태충과 싸움을 하는데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
"하하,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괄태충과의 싸움은 일대일로 제가 합니다. 제가 괄태충과 격렬하게 싸움을 하고 돌을 가지고 나올 겁니다. 단지 괄태충은 배가 고파있을 상황이라고 짐작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냄새가 자신 가까이에서 나면 정신없이 그 냄새 쪽으로 갈 겁니다. 함고동 씨는 괄태충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을 가시면 됩니다. 10미터 이상 떨어져서 도망을 가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하지만 굼벵이처럼 보여도 그놈은 한순간에 낚아챌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괄태충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촉수를 끊을 겁니다. 그러면 괄태충은 방향감각이 없어져서 그다음부터는 수월하게 진행이 됩니다. 물론 저의 계획이지만 계획이라는 게 계획처럼 다 되지는 않겠죠. 그놈도 그동안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모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전 함고동 씨 당신을 지켜 드릴 겁니다. 게다가 괄태충은 당신에게서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 테니, 당신의 작은 용기로 저의 나라와 당신의 나라를 구하는 겁니다."
"하지만……."
터득 터득. 기차는 어쩐 일인지 쉬지 않고 달렸다. 터득 터득 거리는 느낌만 있을 뿐 소리는 일찌감치 소멸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앞에 앉아있는 그리즐리가 웃고 있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 기차가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려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거래처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저 실은 이번 거래를 연장시키지 못하면 전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구하는 그리즐리 씨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전 회사에서 쫓겨나면 앞이 캄캄하다고요. 이 나이에 다시 회사를 들어가기가 쉽지도 않고 새로운 일을 하기에 저의 내성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습니다. 처음에 말을 하는 그리즐리 씨를 봤을 때,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한다면, 그리즐리 씨를 따라서 동화 같은 나라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함고동 씨. 당신을 비롯해서 인간들의 문제는 인간만이 말을 할 줄 알고 세상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마다 다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소통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서 신이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제 일 순위를 내려주고 인간들의 생활 영위에 따라서 동물을 사육하고 포식하도록 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삶을 나아가기 위해 오래전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 신은 인간과 제일 가까운 것이다.라고 짐작을 한 것이죠. 신이 어떤 형상을 띠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이 그저 신의 형상을 인간으로 본 따 만들어놓고 신과 인간의 동격화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신이 만약 지구 반대편의 인간보다 더 발달한 문명인들에게 당신들은 지구인보다 더 위에 있으니 만물의 영장인 지구인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조약을 체결해 버리면 외계인들이 지구의 여자를 종처럼 부리고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니다가 불판 위에서 팔다리를 뜯어 구워 먹는 장면을 봐야만 인간들이 아,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게 될까요?"
그는 그리즐리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리즐리가 말하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글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비슷한 영화를 봤거나. 그때에도 그는 금발의 섹시한 여자가 말라빠진 몸에 눈두덩이만 큰 외계인의 손에 개처럼 끌려 다니고 고어의 그림처럼 팔다리가 잘려 먹히는 장면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하하, 예, 압니다. 언어는 인간만이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제가 말하는 언어는 교류와 관계가 깊은 전달체계를 말하는 겁니다. 어찌 되었던 인간은 언어를 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결국은 말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지금 세계를 돌아보면 말 때문에 서로 총구를 겨누고 목숨을 앗아갑니다. 함고동 씨 주위에도 말 때문에, 말을 잘못해서 속앓이를 하고 사기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말을 아끼며 아무 말이나 하지 않는 함고동 씨를 믿어 버렸습니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걸러서 말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합니다. 우리 동물들은 정말 필요한 언어만 합니다. 우리 같은 곰이 좀 기이하기는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직면한 문제를 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의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릴 겁니다. 제가 당신을 믿는 것처럼 당신도 저를 믿어 보세요. 저를 믿는 마음이 들었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십시오."
그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잊었다. 밖은 아주 깜깜했다. 요즘에는 저렇게 밤이 깜깜하지 않은데,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역시 83년도의 밤은 밤다웠구나. 창밖으로 보이는 밖의 검은 풍경 속에는 인공광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둠은 아름다웠다. 짙었지만 제대로 된 밤의 색이었다. 탁한 색이 혼합되지 않은 어둠, 오로지 어둠이었다.
그을린 밤공기의 빛이 이제는 퇴색되어 밤마저 잿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둠이었다. 해프닝을 바라는 군상들이 모여 낮과 같이 만들어버린 밤의 세계가 가득해서 그는 밤이 되면 얼른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재의 밤에 비해 그가 바라보는 창밖은 그야말로 흑발이 가득했다. 기차는 그런 컴컴함을 뚫고 터득 터득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도무지 마을이라든가, 가로등의 불빛이라든가. 강이라든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세차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창에 박혀있던 시선을 그리즐리에게 돌렸다. 그리즐리는 조금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그래, 괜찮아, 용기를 내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즐리 씨,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기대는 마세요. 전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져갔다. 그리즐리는 그 큰 앞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프지 않았고 큰 앞발이 움직이는데도 자연스러웠다. 열차는 간이역에도 쉬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동안 잠이 들었던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그가 말했다.
"지금 기차는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기차 칸 하나뿐입니다. 아까 함고동 씨가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때 승객들은 다른 칸으로 이동을 했고 그 다른 칸은 원래의 철로로 목적지까지 잘 갔을 겁니다. 차장에게도 이 한 칸은 빌려야 한다고 말을 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우리가 가는 청량사의 축융봉까지 어떻게 가겠습니까. 봉화에 내리거나 안동에 내려서 그 새벽에 버스를 타겠습니까, 택시를 타겠습니까(그리즐리는 자신의 몸집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당신을 무서운 곰을 부리는 사람으로 본다거나, 저처럼 거대한 곰을 보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기차를 타고 축융봉의 밑까지 가는 것이죠. 그 밑까지 철로가 나있습니다. 아주 다행입니다."
뭐야, 이미 차장에게 말했다고? 언제 말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다. 차장에게 기차를 빌릴 정도면 나에게 굳이 차표 값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잖아. 하지만 사정이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와서 표 값이니 83년도니 해봐야 눈앞에 곰이 말을 하는 상황에 무엇이 일어난 들 이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괄태충의 형태를 만들어내느라 사고(思考)하는데 에너지를 쏟았다.
기차는 쉬지 않았다. 소변도 마렵지 않았다. 한 칸이라서 그런지 반동도 심했고 터득 터득 거리는 소리가 묵직함에서 벗어난 듯했다. 물론 소리로써 가 아닌 느낌으로 말이다. 터득 거리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는 것처럼 서서히 여명이 그 붉은빛을 저 멀리서 드러내려고 했다. 조금씩 날이 밝아오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온통 산이었다. 아주 깊은 산속 같은데 기차선로가 놓여있었다. 실지로 선로가 놓여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즐리는 목적지에 가까워 오자 말수가 줄어들었다. 목소리 톤도 한껏 가라앉았고 긴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그리즐리는 그에게 자신의 그러한 긴장을 전달하지 않으려는 듯 미소는 여전히 머금고 있었다. 그와 그리즐리는 긴장된 순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아직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 괄태충과의 격투를 생각했다. 괄태충이라. 일단은 달팽이 과에 속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을 것이다. 달팽이는 자웅동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습한 곳에 서식하며 연갈색의 미끄덩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여있는 그것의 크기가 아주 크다고 단정 지었다. 그 외에는 거대한 괄태충에 대해서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전투기가 지나가듯 잠시 형상이 생성되었다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기차는 산속으로 비스듬한 길을 잘도 올라갔다. 그렇지만 평지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한 것에서 여지없이 벗어나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바로 나뭇가지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기차의 창문은 오래 전의 것으로 창문을 올리면 십 센티미터 정도만 올라갔다. 더 이상은 위험해서 올라가지 않았다. 고양이가 빠져나갈 정도로 올라간 창문 틈으로 산속의 차갑고 상쾌한 겨울의 내음이 기차 안으로 확 들어왔다. 그리즐리도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나무의 냄새는 아주 좋았다. 죽어있지 않은 생동감이 무럭무럭 느껴지는 냄새였다. 이렇게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산속의 나무들은 견디고 있었다. 만약 돌을 괄태충에게서 찾아오지 못한다면 그런 나무들도 전부 죽어버릴 정도의 추위가 닥친다니.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겨울의 아침 공기에 몸이 떨린 것인지, 괄태충 때문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겨울의 차디찬 기운이 몸을 얼어붙게 만들지만 정신은 번쩍 뜨이게 하는 겨울의 차가운 맑음이 창문의 틈으로 4번 타자의 타구처럼 들어왔다. 기차는 산 위로 계속 올라갔다. 올라 갈수록 1월 달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여봐란듯이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 올라갔을까.
기차는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수도꼭지의 물줄기가 좁아지듯 기차는 천천히 움직이더니 멈추었다. 미미한 미동도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는 긴장으로 온몸이 경직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살면서 느끼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시험 시작 전, 발표가 나기 전, 어렵게 이어진 소개팅을 하기 바로 직전, 중요한 전화를 받기 전, 늘 그런 기분이었다. 그저 긴장되는 기분 그 이상의 기분.
어째서 소멸하지 않고 잊을만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상황이 닥치는 것일까.
"함고동 씨,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자." 하며 의자에서 일어날 것을 그리즐리는 권유했다. 결전의 시간? 그동안 살면서 몇 번의 그런 순간이 있었지만 그 순간에 결전의 시간이라는 말을 대입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리즐리의 입에서 결전의 시간이라는 말을 들으니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지금 상황이 실제인지, 이곳에 있는 자신이 실재인지 구분도,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히 꿈이지 않을까 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또 한 번 있는 힘껏 괴롭혔다. 살며시 괴롭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마 양쪽의 허벅지에 '로어셰크'의 가면에 생기는 얼룩처럼 멍이 들었을 것이다.
"이건 꿈이 아닙니다. 함고동 씨. 당신은 저를 도와서 당신의 나라를 구하는 겁니다. 당신이 구한 나라는 당신이 오랜 후에 사망하고 나면 또 다른 당신이 나타나서 당신의 나라를 또 구하러 올 겁니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하는 겁니다. 유전자처럼 대물림되는 것이죠. 당신이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자 어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내일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그리즐리를 따라서 기차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기차의 한 칸은 어쩐지 초라하고 작아 보였다. 그저 작은 승용차만 한 크기처럼 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날이 조금 밝아진 사이, 밖에서 보는 그리즐리의 몸은 정말 컸다. 이렇게 큰 곰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리즐리보다 괄태충이 크다면 도대체 그 크기가 얼마 큼이란 말인가. 그는 상심이 쿵 하며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리즐리는 길을 아는지 고개를 돌려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대한 곰이 인간처럼 걸었지만 어색한 부분은 없었다. 곰은 네발로 걸어야 하지만 그리즐리는 두발로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청량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걸었다. 그리즐리는 자주 와본 곳처럼 산속의 길을 잘도 헤치며 길을 걸었다.
"그리즐리 씨? 그리즐리 베어 씨? 그런데 길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겁니까? 저 만약 그리즐리 씨와 헤어진다면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는 겨우 말을 했다. 숨이 여름을 훌쩍 지난 계절에 비행하는 모기처럼 위태했다.
"곰의 본능입니다. 동물은 본능이 강해서 동물 감각이 본능에 움직이게끔 프로그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함고동 씨, 당신도 위험이라는 큰 벽과 맞닿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그 벽을 파괴하는 본능이 나오게 됩니다. 함고동 씨도 그러한 본능이 일깨워질 겁니다. 누구에게나, 인간에게나 곰에게나 그 본능이나 본성은 깨어나기 마련일 때가 있지요."
정말 곰이 맞을까. 단군 신화에서 말하는 곰이 아닐까. 아니면 외계인이거나 곰의 모형을 뒤집어쓴 사람이거나……. 외계인이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그래, 곰이 분명해. 곰이야.
그리즐리는 산 위로 계속 올라갔다. 그는 거대한 곰의 등을 보며 한눈팔지 않고 따라 올랐다. 운동을 하지 못한 탓에 겨울임에도 땀이 샘처럼 흘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즐리가 걷는 속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한눈을 팔거나 집중을 하지 않았다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산에는 마른 나뭇잎이 바닥을 점령했고 때때로 얼어붙은 작은 눈이 밟혀서 기도 비닉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무들은 겨우내 영양분을 못 빨아먹었는지 뼈다귀처럼 앙상하게 말라서 보기 흉했지만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개체수가 상상 이상이어서 나름의 빼곡한 자연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움막 같은 곳도 지나쳤다. 아마도 사람들이 등산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산상 터에는 등산객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갖다 놓은 로프도 보였다.
그리즐리는 지치는 기색 없이 산을 올랐다. 그는 기력이 아주 모자랐음에도 그리즐리를 따라가는 것에 격한 무리는 없었다. 분명 숨은 턱까지 찼다. 하지만 보통보다 약간 빠르게 걷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그것이 참 기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기이한 일은 곰이 나타났을 때부터다.
어느새 해발 800미터까지 올라왔다. 산 위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운무의 잔재가 뿌옇게 그림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와 그리즐리는 그렇게 산 위를 오른 끝에 두 개의 봉이 보이고 그것이 축융봉이라고 그리즐리는 말해주었다. 축융봉에서 바라본 장인봉과 하늘다리도 비록 흐리기는 했지만 보였다.
"아직 새벽이라 사람들이 없습니다. 축융봉의 밑으로 내려가면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굴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괄태충이 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지금부터 절벽 같은 바위벽을 기어내려 가야 하니 위험합니다. 함고동 씨는 나의 등에 매달리십시오." 그리즐리는 허리를 약간 굽혀서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그는 '어떻게'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즐리는 그의 두 다리를 잡고 그리즐리의 등으로 밀어 올렸다. 그는 엇? 하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그리즐리의 등에 올라탔다. 등에 올라타니 안정감이 들었다. 그리즐리는 등에 그를 매달고 축융봉 밑의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굴 하나가 나타났다. 굴은 시작부터 음험했으며 괄태충이 살아서 그런지 아주 습한 기운과 누린내가 기분 나쁘게 풍겼다. 그는 그리즐리의 등에서 내려왔다. 굴의 입구에서부터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고 기분 나쁜 굴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몸이 덜덜 떨렸다.
"그놈도 추운 걸 싫어해서 굴의 아주 깊은 곳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여기는 입구 근처라 아주 안전합니다. 안심하세요, 함고동 씨. 한참 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 어서 갑시다." 그리즐리는 굴 안으로 개척자와 같은 모습으로 들어갔다. 그는 굴 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그리즐리의 털을 붙잡고 따라 들어갔는데 굴의 입구가 보이지 않게 되자 두려움이 장막처럼 그를 엄습했다. 굴 안은 야간기차를 타고 내다봤던 밖의 어둠처럼 컴컴했다. 암순응이 풀렸는지 서서히 굴 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즐리의 눈은 야광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동굴 안이 환하게 보였다. 겨울의 차가움과는 또 다른 서늘함이 굴 안에는 흡착되어 존재해 있었다. 서늘함을 등으로 느끼며 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축축한 공기의 냄새가 전해졌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끄으으응'하는 아주 더러운 소리가 났다. 정말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달달하고 시큼한, 짜증 나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마도 그리즐리가 말하는 괄태충의 냄새인가 보다고 그는 생각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러머가 그의 심장에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새로 나온 지우개를 포장해서 정혜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때 이후로 이렇게 심장이 뛰기는 처음이었다.
냄새가 진동할수록 심장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그리즐리가 앞발로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100미터 앞에 그놈이 있습니다. 자, 이제는 허리를 조금 굽혀서 가세요, 동굴 벽에 묻어있는 그놈의 점액질이나 타액이 몸에 닿으면 곤란하니까 말입니다."
그리즐리는 거대한 몸집을 아주 가볍게 허리를 숙인 다음에 앞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는 몸에 긴장이 너무 많이 되어서 몸이 뻣뻣했고 걷는 것도 힘겨웠다. 그는 문득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거래처에 가는 것이 맞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내 인생은 밝은 날도 없었지만 이대로 끝나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억울했다.
뭐 이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는 곰과 거대한 괄태충. 정말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닌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무슨 나라를 구한단 말인가.
"함고동 씨!"
함고동이라니, 이름이라도 바로 불러줘야 할 것 아닌가.
저 곰은 왜 자꾸 나를 함고동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내 이름은 말이야! 내 이름은? 그러니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름이 뭐였더라?
"함고동 씨, 이제부터 당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제가 저놈 머리 위의 동굴 천장에 매달려 저놈의 시선을 당신에게로 돌릴 겁니다. 자, 잘 들으세요. 저 괄태충이 당신을 보는 순간 허기로 미쳐 당신을 잡아먹기 위해 함고동 씨 쪽으로 달려올 겁니다. 하지만 괄태충은 아주 느립니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가세요. 괄태충은 빨라봐야 어린아이의 걷는 수준이니 다가오면 한 번에 너무 멀리 달아나지 마시고 십 미터 간격을 유지하면서 달아나세요. 그럼 제가 돌을 들고 당신을 구하러 올 테니까 말이죠. 나를 믿으세요, 함고동 씨."
그는 마지막에 와서 결심이 굳어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동굴의 깊은 곳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무엇인가 해결되지 않아서 괄태충에게 먹힌다면 난 시체도 깔끔하게 지구 상에서 없어지는 꼴이 된다. 아직 제대로 여자와 잠도 자보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드니 허탈했다.
기운이 한순간에 송두리째 몸에서 쑥 빠져나가 동굴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그는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즐리는 몸을 숙여 그와 눈높이를 같이 한 채, 그에게 소리 없이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리즐리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저 반사 신경 같은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에게 의지는 없었다. 순식간에 그리즐리는 큰 몸을 날려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공. 백.
그리고 침묵.
그리즐리가 부재한 동굴 안의 공백은 거대하고 몹시 곰삭았다. 공백과 비슷한 크기의 두려움이 그에게 몰려왔다. 소리 내서 울고 싶었다. 그 짜증 나는 냄새는 더욱 역겹게 몰려왔다. '끄으으응'하는 소리가 확성기에 대고 나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맙소사.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소리도 더욱 크게 뛰었다. 괄태충의 소리는 손톱이 꺾이면서 유리면을 갈아대는 소리보다 더 기분 나쁜 소리였다.
끄으으으으응.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동굴 안은 어두웠지만 몇 미터 앞까지는 미미하게 보였다. 그는 커져만 가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앞을 주시했다.
끄아아아악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리더니 소리가 눈앞까지 온 듯했다. 아마 그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팬티 끝이 촉촉해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그것은 괄태충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었다. 크라켄보다 더 흉측하고 마다가스카르 히싱바퀴보다 더 징그러웠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얼굴은 없었다. 달팽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몸뚱이는 구더기처럼 허연 몸으로 미끄덩거리는 점액이 온몸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정면으로 보이는 괄태충의 얼굴은, 얼굴은,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울고 싶었다. 왜 그동안 큰 소리로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것일까. 세상에 태어나서 크게 한 번 울지도 못해보고 저 허여멀건 하고 징그럽고 무섭고 더럽게 생긴 괴물에게 잡혀 먹힐 판이었다.
거대한 괄태충은 큰 흡열 판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날카로운 촉수 같은 송곳니 수백 개가 흡열 판을 돌아가며 촘촘히 박혀있었고 다가오면서 돌멩이나 동굴의 불필요한 장애물을 다 씹어 삼키며 그에게로 돌진했다. 눈도 없었다. 귀나 다리, 여타 상상할 수 있는 신체기관은 모조리 배제되어 있었다.
그리즐리의 다섯 배는 더 커 보였고 중요한 것은 그리즐리의 말처럼 아기 걸음이 아니라 어른이 달리는 것 같은 속도로, 아니 그것보다 훨씬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백 미터 앞에 다가온 듯하더니 어느새 오십 미터 앞까지 왔다. 저 멀리, 동굴의 깊숙한 곳에서 그리즐리의 소리가 들렸다.
"어. 서. 앞. 으. 로. 도. 망. 가. 시. 오."라는 말이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서서 달리려고 했지만 다리는 그만 자신의 역할을 잊어버렸다. 다리에 힘이 그대로 풀어져버린 것이다. 그래, 먹은 것이라곤 간이역에서 먹은 가락국수가 전부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지만 내 몸에는 에너지를 생성할 만한 영양분이 부족했다. 그나마 먹은 가락국수도 기차에 앉아있던 그리즐리를 보는 순간 소화기능 저하로 면발이 불은 채로 위장과 십이지장 어딘가에 원형을 유지하고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터질 것처럼 펌프질을 했다. 이대로 터져버려라. 그는 엎드린 채 넘어져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가오는 괄태충이 자아내는 냄새는 살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역겨운 냄새였다. 냄새는 소화되지 않는 가락국수가 입 밖으로 나오게 구토를 유발했고 속에서 뽀얀 노란 액체를 끄집어내게 했다. 다가오는 괄태충의 흡열 판 주둥이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끈끈한 액체에 천천히 내 몸이 부식되어서 녹아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괄태충은 20미터 앞까지 왔다. 그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물며 지금 닥친 이 상황에서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학시절 돈을 빼앗는 아이들을 보고 그냥 지나쳐가지도 못했다. 지나치다 자신에게 그들의 시선이 돌아오는 것이 무섭고 불안해서였다.
찌질 한 인생.
결국 찌질하고 남들보다 못하게 죽는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막상 죽는다고 하니 우습지만 마음이 어쩐지 조금은 편해졌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 않는가. 오늘 죽으면 내일부터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된다. 누가 한 말이더라?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이름처럼 누가 한 말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는 마당에 그 따위 것에 신경을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괄태충이 바로 앞까지 왔다. 대단히 크다. 몸속에 살고 있는 기생충이 뻥튀기하는 기계를 통과해서 공룡 만하게 환생한 모습 같았다. 아주 징그럽고 몹시 두려웠지만 체념을 하고 난 후 보니 괜찮아 보였다.
나름대로 귀엽기도 했고.
거대한 괄태충의 주둥이에서 점액 한줄기가 쏘아져 나왔다. 물 묻은 진흙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점액이 괄태충의 주둥이에서 나왔고 자신을 향해 뿜어져 나오는 점액이 닿으면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몸이 쪼그라들어 없어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상상했다.
그것은 도로시가 신고 있는 에메랄드 구두를 빼앗으려는 녹색 마녀 엘파바에게 물을 뿌렸을 때 쪼그라들며 죽는 모습에 오버랩되었다. 구두를 빼앗으려 한 엘파바가 나쁜 마녀지만 사실 도로시가 집을 타고 날아와서 자신의 동생인 동쪽마녀를 죽여버렸다. 어찌 되었던 동생을 죽인 도로시가 밉지 않았을까. 북쪽마녀인 착한 글린다가 도로시에게 옐로 브릭 로드를 따라가면 에메랄드 성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너를 캔자스로 데려다 줄 오즈의 마법사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글린다도 마법사인데 에메랄드 구두에 담긴 마법을 처음부터 알려주었다면 도로시도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글린다는 착한 마녀지만 어린 시절 온몸이 녹색이라는 이유로 엘파바를 따돌린 장본인이었다. 선과 악이 모호한 영화였다. 죽는 마당에 이런 생각은 정말 쓸데없다.
이제 나는 엘파바처럼 몸이 쪼그라들어 죽는구나.
그는 눈을 감았다. 괄태충의 점액이 그의 몸에 묻으려고 할 때, 몸이 앞으로 쑤욱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은 실제였다. 환상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그리즐리가 와서 누워있는 그의 몸을 앞으로 당겼다. 괄태충이 쏜 점액은 그가 누워있는 자리에 쏟아지더니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엑토플라즘을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 점액에 닿으면 타버립니다. 산성이 대단하거든요. 조심해야 합니다."라고 그리즐리가 말하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입구 쪽으로 같이 달렸다. 그리즐리가 이끄니 그의 다리가 어느 정도 움직였다.
"그리즐리 씨, 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네, 압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는 거죠."
"돌은 어떻게?"
"돌은 못 가져왔습니다. 저 녀석의 몸속에 있는 듯합니다. 게다가 저의 계산 착오였습니다. 저놈은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군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리즐리는 공중으로 한 바퀴 몸을 날리더니 괄태충이 있는 동굴 위의 천장으로 붙었다. 대단했다. 마치 3D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즐리는 무슨 희귀한 손동작을 하더니 무엇인가 괄태충을 향해서 마구 던졌다. 그것을 맞은 괄태충의 몸이 조금은 꿈틀거리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그를 향해서 소리를 내며 기어 왔다. 괄태충은 또다시 점액을 뿜어냈다. 놀란 그가 피했지만 그의 다리에 점액질이 조금 튀었다. 바지는 금세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고 살갗이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아주 미세하게 묻었는데 정강이 부분이 타들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심장이 더 이상의 펌프질도 감당하지 못해서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리즐리는 휘리리릭 몸을 날려 그의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희귀한 손동작으로 무엇을 만들어내더니 괄태충의 아가리를 향해 무엇을 던질 기세를 하고 있었다.
"따라 해 주세요! 마노스!"
그는 그리즐리를 아프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았다.
"마노스! 부탁이니 따라 해 주세요."
그는 얼떨결에 "마노스……."라고 했다.
"부탁이니 저처럼 아주 크게 외쳐주세요. 함고동 씨. 마노스!"
"마노스!"
그리즐리는 손에 빛이 나는 포자를 만들어서 괄태충의 아가리 속을 향해 던졌다. 괄태충은 점액질을 다시 발사했고 그리즐리는 그를 안고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갈락토만난!" 그리즐리가 외쳤다.
"갈락토만난!"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즐리는 손 모양을 또 한 번, 기를 모으는 포즈를 취하더니 빛의 포자를 괄태충에게 던졌다.
"상아야지만난!" 그리즐리가 쩌렁한 소리로 외쳤다.
"상아야지만난!" 그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목이 아프고 눈이 따끔했다.
괄태충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포자가 들어갔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괄태충의 몸이 심하게 요동을 쳤다. 급성 맹장염에 걸리면 저렇게 된다. 그리즐리는 그래 됐어!라고 하더니 다시 한번 손 모양을 희귀하게 움직였다.
"곤약만난!"
"곤약만난!"
그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목이 갈라져라 큰 소리로 그리즐리를 따라 했다. 그리즐리가 지속적으로 괄태충의 아가리 속으로 빛의 포자를 던졌다. 괄태충은 끄아아아악하는 듣기 싫은 소리와 역겨운 냄새를 심하게 풍기더니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서서히 굳어졌다. 10분쯤 지나니 괄태충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리즐리 씨,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제 힘이 다 빠져버렸다.
"이것은 글루코만난의 종류인데 분자량의 100만 분의 일로 된 고분자 화합물로 된 소화액입니다. 저 녀석도 생명이 있는지라 죽이지는 못하지만 저놈의 몸속에 소화액을 투화해서 몸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지금 저놈의 몸이 가수분해가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즐리도 힘이 드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쉭쉭 거리는 소리가 괄태충에게서 들렸다.
"그런데 저놈을 가수분해 시키는 일은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함고동 씨 당신이 같이 주문을 외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엣? 그런 말도 안 되는……."
"정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만화 같은 주문을 누가 같이 외쳐주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나를 믿어준 당신의 용기 때문입니다. 주문은 두 명이 선창과 후창을 했을 때 비로소 크게 발휘되는 주문입니다. '엘파바'에게 배워 온 주문입니다." 그리즐리는 씩씩하게 그에게 말했다.
엘파바?
이 단어를 생각하는 순간에 그는 정강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입에서 으윽 하는 소리가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다리는 점액이 묻은 부분이 벌겋게 되는가 싶더니 구멍이 날 정도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즐리는 털 속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그의 다리에 난 상처에 발랐다. 살갗이 타들어가는 것은 멈췄지만 그는 심한 오한을 느꼈다. 얼굴에서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저기, 그리즐리 씨, 돌은? 돌은 어디 있나요?"
"역시 당신은 본분을 잊지 않았군요. 자 보십시오."
그리즐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괄태충의 몸은 점점 작아져서 뱃속에 들어있던, 인간의 머리통만 한 돌이 나타났다. 검은색의 차돌처럼 반질거리는 아주 예쁜 돌이었다. 괴물 같았던 괄태충의 모습은 여느 민달팽이와 같아졌다. 그리즐리는 작아진 민달팽이를 가지고 있던 작은 유리병에 넣어서 뚜껑을 닿고 자신의 털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즐리의 털 속에는 무슨 장치가 있을까. 그리즐리는 돌을 집어 들었다.
"이제 나라를 구한 건가요? 그리즐리 씨?" 그는 오한에 몸이 벌벌 떨렸고 정신도 가물거렸다.
"그래요, 당신 덕분입니다. 함고동 씨. 당신이 우리나라와 당신네 나라를 구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영웅입니다."
영웅? 헛헛했다. 정신이 가물거려 눈앞도 흐렸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저는 이제 죽는 건가요? 그리즐리 베어 씨?"
"하하, 죽다뇨. 점액질이 묻은 상처가 나으려고 그러는 것이니, 자 이 알약 하나를 드세요. 그럼 잠이 푹 들 겁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모든 것이 제 위치로 돌아가 있을 겁니다."
그리즐리는 누워있는 그의 입에 알약 하나를 밀어 넣었다. 그는 이 알약을 먹고 나면 영영 잠에서 깨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저 멀리서, "당. 신. 은. 영. 웅. 입. 니. 다." 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작게 들렸다.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웬 퉁퉁한 여자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니 기차 안의 의자였다. 기차는 목적지까지 왔다.
"이 보세요, 당신은 악몽을 꿨나요?" 퉁퉁한 여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엣?"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봐요 당신. 제대로 땀을 흘리더군요. 덕분에 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느라 쉬지도 못하면서 이곳까지 왔어요." 퉁퉁한 여자가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당신, 이상한 이름을 외치면서 꿈을 꾸더군요. 그리즐리는 뭐죠?" 여자가 흥미롭게 물었다.
그리즐리? 그래, 난 그리즐리와 함께? 꿈이었나?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기차의 창밖을 보았다. 아침이었다. 기차는 야간 완행으로 가는 무궁화호였고 겨울의 차가운 아침의 풍경이 보였다. 창을 통해 아침햇살이 따갑게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퉁퉁한 여자는 버버리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아직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기 지금은 몇 년도인가요?" 그가 여자에게 물었다. 퉁퉁한 여자는 진홍색의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로 "2013년 2월이에요. 그래, 꿈속에서는 몇 년도에 갔다 오신 거예요?" 라며 퉁퉁한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구백팔십삼 년에? 간이역에서 가락국수를 한 그릇 먹고 올라타서……. 그리즐리는 만났는데……."
"83년도요?" 라며 퉁퉁한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그는 얼굴에 땀이 흘렀다는 느낌이 있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조금씩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 그 해는 제가 태어난 해에요. 그해 나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데요."
그가 퉁퉁한 여자의 말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는데 기차는 방송을 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으니 잃어버리신 물건이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잘 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방송을 들으며 정신을 차려보니 퉁퉁한 여자에게 기대에 있었다.
"덕분에 제 버버리 외투가 땀에 젖었네요"라고 했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너무 몸을 구기고 잠들어서 그런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여자에게 잠시 실례한다고 말한 후 전화를 받았다. 퉁퉁한 여자의 미소는 정말 낯익었다. 전화를 받으니 사무실에서 온 전화였다.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에게는 거래처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거래처에서 앞으로 5년 동안은 죽 거래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는 왜 갑자기?라고 말하려다가, 알았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즐리가 해결했구나.
그의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어머, 당신 웃는군요. 이제 좀 나아지려는 모양이지요. 악몽을 꾸고서는." 퉁퉁한 여자는 그의 웃음에 기뻐했다. 기뻐하는 모습도 진심이었다. 그는 이 퉁퉁한 여자에게 조심스레 호감이 갔다. 기차에서 사람들이 전부 내리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올라왔다. 퉁퉁한 여자는 아직 가지 않고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아가씨는 왜?"라고 그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퉁퉁한 얼굴에 비해 작았지만 눈이 아주 맑고 투명했다. 낯설지 않았다.
"악몽을 꾼 다음에는 잘 일어나지 못하죠. 당신을 기차 밖으로까지 무사히 데리고 갈게요, 그런 다음 전 가도 괜찮아요." 시원시원하고 막힘이 없는 말투였다.
"악몽을 꾼 다음에는 잘 못 일어나요? 어쩐지 소설 같군요."
"어머, 저 소설을 적고 있어요."
"그래요? 전 소설이라면 읽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의 말에 퉁퉁한 그녀는 입을 가리고 크게 웃었다. 길쭉하고 퉁퉁한 손가락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기분 좋은 치아의 모양새였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하얗고 뽀얗다. 손으로 피부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그는 기대고 있던 여자에게서 몸을 뺀 다음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녀의 말이 정말이었다. 그리고 다리의 통증이 느껴졌다.
"기차는 멈췄고 우리는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기차가 멈추지 않는 것이 문제지 이미 멈춘 기차에서는 느긋함을 가지세요. 봐요, 아직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청소를 하고 계시잖아요." 그녀가 그를 지듯이 보며 말했다.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다리의 통증이 화끈하게 올라왔다. 바지를 걷어 올려 정강이 부분을 보았다. 그곳에는 상처가 있었고 정의할 수 없는 허연 연고가 발려진 흔적도 보였다. 그리고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리즐리와의 일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뻤다. 그 일은 그에게로 하여금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에도 견뎌 낼 수 있는 용기 같은 것을 불어넣었다.
퉁퉁한 여자는 그의 곁에서 그가 천천히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퉁퉁한 여자가 부축해서 기차 밖으로 무리 없이 나올 수 있었다. 밖의 차가운 겨울 기운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낯설지 않았다. 이제 곧 봄이 온다.
그리즐리는 알래스카로 잘 갔을까?
"당신은 어디로 가죠?" 라며 퉁퉁한 여자가 말을 했다. 그녀에게 기대어 걸으니 아주 안정적이었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안온감. 포근한 기분. 이 여자에게 죽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적지가 없어졌어요. 저 오늘은 급하게 가야 할 곳이 없어요. 아무 곳에나 가면 됩니다.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어머, 그래요? 저도 그런데 말이에요. 그럼 모닝커피 어때요?"
"저, 그것보다……."
"네?"
"초면에 실례가 안 된다면, 저 갈비탕이 먹고 싶은데……."
호호호 하는 큰 소리의 퉁퉁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기차역에 기분 좋게 퍼졌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시원시원한 그녀였다. 중요한 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그녀의 기분 좋은 향을 맡으며 기차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서 역의 직원이 뛰어오면서 그녀를 불렀다.
"함고동 씨, 함고동 씨" 하며 뛰어왔다. 지갑을 두고 내려서 지갑 안의 신분증을 보고 알아봤다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지갑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그녀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내 이름이 좀 그래요. 하는 눈빛을 보이고 그를 부축해서 기차역을 빠져나갔다.
"저 그런데 어떤 소설을 쓰시죠?"
"소설은 읽어야죠. 들으려 하면 안 돼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알려드릴게요. 번개 맞는 인간을 쓰고 있어요. 번개를 5번이나 맞고도 죽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예요. 단편인데 이제 장편으로 만들어 볼 요량이에요."
"저에게도 읽을 수 있는 영광이 돌아올까요."
그들의 이야기는 기차역에서 점점 멀어져 조그맣게 들렸다.
"그런데 아까 83년도에 나라에 큰일이 닥쳤다는 것은 무슨 일이에요?"
그들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 점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태어난 해인데요……. 그때 나라에는……."
기차역을 빠져나가는 순간 그들의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겨울의 날은 차디찼고 맑았으며 신선한, 또 다른 공기와의 만남을 그와 그녀는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