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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17. 2020

불어 터지고 식어빠진 라면

추억으로 먹는 맛

마우스로 그려 본 아따맘마의 가락국수



티브이에 삼대 천왕이라는 음식 프로그램이 유행이었을 때 전통시장 표 고로케를 먹은 EXID의 하니가 눈물을 흘려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대체로 보기 불편했다는 시선이었다. 그 장면에서 하니의 눈물은 연출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먹었던 고로케가 추억이 되어 이불처럼 덮이면 충분히 그렇게 된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테지만.


대부분 라면은 갓 끓여낸 꼬들꼬들한 면발을 좋아한다. 맛도 좋고, 식감도 좋다. 이상하지만 나는 불어 터진 라면도 좋아한다. 그게 맛이라는 것에서 분명 멀어졌을 텐데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불어 터져 죽처럼 되어버린 라면 맛이 좋다.


게다가 식어버린, 라면이 국물을 전부 빨아들여 국물이 하나도 없고 떡처럼 되어 버린 그런 라면,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을 써야 하는 그런 ‘불어 터지고 식어빠진 라면’이 좋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곧잘 해 먹지는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도 있고. 멍게를 정말 좋아하지만 멍게를 자주 먹지는 않는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집 앞이 바닷가인 나는 언제든 멍게를 먹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정말 좋아하는 건 희한하게도 자주 볼 수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 회사원이었던 아버지는 늘 새벽 5시면 일어나서 회사로 갔다. 그 시간에 어머니가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리고 반찬을 만들고 할 수 없기에 아버지는 라면을 끓여서 먹고 나갔다. 나가면서 나를 위해 라면 한 그릇을 떠 놓곤 했다. 내가 눈을 뜨면 이미 라면은 불어 터지고 식어버려서 계란과 면과 국물이 한 몸이 되어 푸딩화 되어 있었다.


어릴 때는 그것이 먹기 싫었다. 식었고 젓가락질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고, 숟가락으로 이렇게 탁탁 갈라서 뜨면 떠지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라면은 먹기 싫었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인가, 후루룩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아버지는 라면을 드시고 있었다. 이미 한 그릇을 나를 위해 떠 놓았다. 그때 이렇게 보니, 내 그릇에 담긴 라면이 뜨거우니까 아버지는 계속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식히는 것이다.


나는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를 달고 태어나서 뜨겁거나,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 소화가 되지 않으면 속만 거북한 것이 아니라 머리도 아프고 이상해진다. 아버지는 그게 미안해서인지 그냥 놔두면 식어버릴 라면을 후후 불면서 식히고 있었다. 식어빠지고 불어 터진 라면에 마법이 걸렸는지 그 뒤로 그 라면이 맛있었다.


군대에서 라면 회식을 하면 금방 덜어낸 꼬들한 라면은 졸다구들 먼저 먹게 하고 시간이 지나 불어 터지고 식은 라면을 먹었다. 나는 그게 맛있었는데 다른 아이들 눈에는 고참이 희생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건 그것대로 가만히 있다 보니 좋은 소리까지 들었던 적이 있다.


제대 후 아버지는 이런저런 안부도 없이, 인사도 없이 먼지가 되었고 나는 순천으로 여행을 갔다가 오리 고기 집에 저녁 늦게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었는데 카운터에서 나이 든 주인장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여행객인데 같이 먹자고 하니 괜찮다시며 혼자서 카운터에서 식사를 하셨다. 이렇게 보니 냄비에는 식어 빠지고 불어 터진 라면이었다.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조금 달라고 했다. 주인장은 난처해했지만 한 그릇을 떠 주었다. 그것을 숟가락으로 한 입 퍼먹었는데 뭔가 손끝으로 코끝을 띵하게 때리는 기분이 들었다.


중학교 때 먹던 그 맛이었다. 아버지의 맛. 아버지가 일일이 식혀주던 맛.
그때 일행이 맵냐고 했는데(눈물이 핑 돌아서),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다. 리틀 포레스트 겨울 편에서 두 번째 음식에서도 이치코가 먹는 설탕 간장에 담긴 떡은 추억의 맛이다. 추억이 낫토 떡에 입혀진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생존에 관여된 부분이 크지만 그 음식점에 너와 함께 가서 음악을 들으며 같이 먹었다는 추억, 그 추억이 고스란히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대 천왕에서 하니는 시장표 고로케를 한 입 먹는 순간 아주 작았던 하니가 힘든 시기에 고생하며 만든 엄마의 고로케를 먹었던 추억이 밀려왔을 것이다.


추억의 맛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주 해 먹을 수는 없다. 추억에 기인한 음식이 있다. 그런 음식은 추억의 맛으로 먹게 된다. 추억의 맛에 빠지면 그 음식을 일부러 찾기도 한다. 추억으로만 먹게 되는 맛은 마치 달력의 뒤편처럼 늘 가까이 있지만 달력을 넘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아름답지만 안타깝고 쓸쓸한 맛이기도 하다.



 

이치코의 추억의 맛


국물이 없어진 불은 라면만의 추억의 맛이 있다



이렇게 먹으려면 한 시간 정도 둬야 한다. 아버지의 맛을 느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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