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제외하고 방구석에 뒹굴거나 쌓여있는 책들을 미친척하고 벽에 차곡차곡, 테트리스처럼 쌓아봤다. 책장에는 사진에서 보는 정도의 책이 꽂혀 있다. 책장에는 기억도 안 나는 고전문학-파우스트, 제인 에어, 대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스 신화, 달과 6펜스(이 책은 정말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책이 많아 보여도 책 좋아하는 사람은 이 정도의 책들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안 읽는 주위의 사람들은 내가 책을 아주 좋아하는 줄 아는데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거 할 게 없으니 책을 읽을 뿐이다. 나는 잘하는 것도 없고 라이선스도 운전면허증 하나 달랑 가지고 있다. 매년 만나는 영국 친구 죠의 가족이 있지만(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오지 못했다) 영어로 대화도 불가능하다. 죠의 아내가 나의 친구이며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좀 해, 언제까지 영어만 할래.라는 게 나의 입장이다. 무엇보다 비틀스 이후 영국 음악에 대해서 죠보다는 내가 월등히 많이 알고 있기에 그들의 나라 음악에 대해서 주절주절 하면 오오 아아 하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나는 한국어로 말하고 중간에서 죠의 아내가 통역을 하느라 진땀을 뺀다. 죠의 가족에 관한 글 https://brunch.co.kr/@drillmasteer/533
또 나는 당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고스톱이나 포커는 할 줄 모른다. 게임도 싫어한다. 조깅을 제외하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익사이팅한 스포츠도 별로다. 바이킹도 못 타는데 남이섬에서 번지점프를 한 번 뛰고 나서 세상에 할 수 있는 욕을 다 한 적도 있었고 제주도에서 보트에 묶인 낙하산을 타고 비행하는 내내 내려달라고 아이처럼 소리지르기도 했다. 나는 참 재미없는 인간 축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책을 읽게 되었다. 스키나 승마처럼 때와 장소가 맞아져서 하는 것 말고 잠을 자듯 매일 조금씩 할 수 있는 것, 내가 손을 뻗어서 잡을 수 있는 품 안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책을 읽으며 기다리면 지루하지 않다. 어떤 날은 상대방에 늦어져서 오히려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건 책이 한창 재미있어 지려 했기 때문이다. 만나봐야 이야기를 하고 듣고 한 잔 할 뿐이라 굳지 나오지 않아도 돼,라고 속으로 말하곤 했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재미라고는 없는 인간임에 분명하다.
책을 읽는 방법이라고 딱히 정의할 순 없지만 매일 책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어떻든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편이다. 시간이 날 때 책을 읽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매일 시간을 내서 밥을 먹듯 책을 조금씩 읽는다. 요컨대 아침에 집을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주차장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책을 좀 본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쌓이게 되면 큰 무리 없이 그 시간만으로도 한 달 정도만에 장편소설 한 권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느긋하게 시간이 나서 카페에 앉아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책을 읽으면 참 좋겠지만 나는 어쩐지 바쁠 때, 그 바쁜 시간 틈을 벌려 그 틈 속에서 책을 조금씩 보는 게 잘 읽히는 것 같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짜릿함과 다 읽은 후의 포만감도 꽤 가질 수 있다. 예전에는 개나리가 올라오는 봄이 되면 한두 시간씩 강변의 조깅코스를 천천히 책을 읽으며 걸었다. 그때 읽은 책들은 대체로 고전문학으로 체호프의 단편선 같은 문고본을 들고 읽었다. 읽다 보면 체호프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체호프는 의사이면서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인데 글을 쓰기 위해 사할린의 극지방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조금씩 죽여가면서 글을 썼다. 그렇게 썼던 글을 현재의 내가 읽고 있으니 조금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몸을 죽여가면서까지 쓴 체호프의 단편은 굉장한 의미의 소설이 아니라 러시아의 여러 마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마 레이먼드 카버도 그런 체호프의 단편소설에 조금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좀 똑똑해지거나 현명해지고 남들이 우러러 볼만한 사람이 되느냐, 전혀 그런 것과는 무관한 것 같다. 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나는 그렇게 똑똑한 편이 되지 못한다. 요즘은 ‘똑똑하네’라는 말에 사람들은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고 약간의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똑똑하지 않은 것보다 똑똑한 것이 어떻든 훨씬 낫다. 그 똑똑함이 어떤 식으로 쓰이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겠지만.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재미있는 것이 없어서 책을 읽을 뿐이고 보면 알겠지만 읽는 책들이 대부분 소설책이다. 인문학 책이 몇 권 있지만 자기 개발서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싶다. 나는 좀 못된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책에서마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볼래? 이렇게 하는 게 너에게 나을 것, 같은 말들을 죽 늘어놓은 책은 거부하게 된다.
책 판매 도서 사이트에서도 소설책은 베스트셀러 안에 거의 들지 못한다. 대부분 자기 개발서가 10위 안에 몇 권씩 들어가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개발서는 인간생활에 유익한 것 같다. 나는 그런 유익함을 지금까지 용케도 거부하고 있다. 나는 고집이 없다고 주위에서 그러지만 실은 아주 고집불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나의 책선택 방식이 바뀔 것이냐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거의 바뀌지는 않을 듯하다.
새로운 책에 대한 갈망이 시간이 앞으로 갈수록 떨어져서 지금은 읽었던 책을 계속 돌려가며 읽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처음에 읽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다시 읽었을 때 마치 처음 접하는 듯한 신세계를 경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로 남한산성을 다시 읽을 때가 그랬다. 10년 전에 읽을 때는 몰랐지만 다시 읽어보니 모르는 단어 투성이었다.
그저 넘겨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이왕 읽을 거 모르는 단어를 알아보고 넘어가자 싶어서 그 뜻이나 의미를 토를 달기 시작했는데 김훈이라는 작가는 ‘도대체 대단하다(이런 말은 이상하지만)’라고 생각했다. 마치 김훈이라는 현재의 사람이 그 전쟁 통의 남한산성으로 가서 일일이, 하나하나 눈으로 본 장면을 열거해 놓은 것처럼 생생했다. 아주 생생했던 트루먼 카포트의 ‘인 콜드 블러드‘보다 더 날것이었다. 인 콜드 블러드는 실제 일가족 살인사건을 논픽션으로 쓴 소설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신문에 매일 연재되는 사건 칼럼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그보다 더하게 남한산성은 마치 전쟁의 그 처절함을 문장으로 생생하게 전달했다.
후에 남한산성 영화를 봤는데 영화 역시 좋았다. 남한산성의 소설을 그대로 영화 속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영화도 원작에 누가 되지 않게 잘 만들었고 소설 남한산성은 처절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다. 다시 한번 읽으면 이런 묘한 경험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떤 책의 제목인가? 책의 내용인가? 거기에 100년 후면 우리 모두는 없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실컷 읽다가 죽는 것이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도 소설가들이 많은데 소설을 출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그래서 베스트셀러에 겨우 들어가 있는 소설은 대체로 해외작가들 작품이다. 김영하 소설가의 소설도 사만 부 정도 팔린다고 한다. 자기 개발서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판매량이다. 그 점에 대해서 김영하 자신도 자신의 소설이 참 재미있는데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소설을 쓸 때 어떻든 작가가 제1의 독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기의 글이 쓰는 동안 재미있어서 견딜 수 없어하는 소설가들의 소설이 그렇지 못한 소설보다 훨씬 좋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도 그렇게 말을 한 것 같다. 문지혁 소설가의 유튜브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유튜븐데 조회수가 600회 정도 나온다. 먹방 유튜브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길고, 수동적이 아닌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찾아서 봐야 하는 영상이나 글은 외면한다. 유튜브 같은 경우 평균 시청시간이 2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5분이 넘어가면 사람들은 채널을 돌린다. 물론 예외도 있다. 15분이 넘어가도 50만 회 이상씩 조회가 되는 유튜브도 있다. 영화에 관한 유튜브가 그렇고 운동 채널이 그렇다.
코로나가 도래한 시대에 소설이나 영화나 운동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좋은 시간 때우기 들이다. 누군가는 이런 시기에 막 돌파구를 마련해서 자본을 긁어모을 거야, 그러려면 이런저런 방법으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작금의 시대에 읽고 싶은 소설을 실컷 읽고 그간 본 못 영화를 본다는 건 부분적으로나마 삶의 풍족을 채워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소설을 시간이 지나 읽고 또 읽는다. 너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소설책을 보고 있으면 뿌듯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나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고 있으면 주인공의 눈으로 나 아닌 또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게 된다. 그것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문학을 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문학을 한다든 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인 거 같다.
요즘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저자 염상섭의 소설들을 읽고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