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3일 삼남로 제9길 진위고을길에 이어 제10길 소사원길을 걷는 날입니다.
날씨는 영하로 춥다고 하더니만 그래도 맘먹고 나오니 기온도 우리의 열기를 못 막습니다.
용산에서 평택역까지 급행전철을 타고 가서, 평택역에서 지제역까지는 다시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 올라왔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지제역에 와보겠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큰 역입니다. SRT가 정차해서 수서역, 부산, 목포로 갈 수있는 역입니다.
버스 정거장에서 우리들의 시작점인 갈원 (칠원동광아파트)으로 갈 버스 16번을 기다립니다.
갈원의 안내 푯말입니다.
이 곳에는 옥관자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갈원 :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가장 대표적인 원院이었다. 이곳은 대백치 너머에 있었고, 진위현의 읍치에서 20리 거리여서 원이 설치됐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거나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유적으로는 이괄의 난 때 관군에게 패한 이괄이 숨어 있었다는 ‘이괄의 절터’가있고 공주로 피난 가던 임금이 물맛에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는 ‘옥관자정’이 있다. 1728 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 난’에는 갈원의 토호 김정현과 박영동이 주민들을 동원해 난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중심이어서 옥관자정 옆 에 칠원1동 새마을운동공적비가 남아 있고, 진위현령 이혜주의 송덕비도 함께 있다. 갈원 은 19세기 전후 원院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민간 점막店幕들이 들어서면서 역할을 대 신했다. 점막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하나 둘씩 사라졌고 현재는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자 슬슬 걸어볼까요?
햇님도 짱짱하고, 우리도 짱짱합니다.
멀리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이지요.
그런데 마을, 칠원동이 조용합니다.
빈 집도 많고요.
아하, 이 동네도 개발되는 모양입니다.
뭐가 개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변화는 기대와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에게 만족한 해법을 찾아내었으면 좋겠습니다.
ㅋ 팔로워의 즐거움이란 게 있습니다.
저는 팔로워입니다. 리더가 가자는 곳을 따라가면 됩니다.
지금 저 앞의 리더는 어디로 가야할 지, 지금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가니 과수원 지역이 나옵니다.
아니 그런데 배나무를 덩쿨이 칙칙 감아서 모두 말려버렸네요.
이 곳 소사벌은 배나무과수원이 많았군요.
소사벌택지지구가 평택배가 처음 재배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평택의 시화가 배꽃이랍니다.
무당의 집이군요.
지금은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토착 종교입니다.
외래 종교가 번성한 우리 나라에 이런 토착 종교도 우리에게 인정받고 우리 문화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 고유의 샤머니즘을 비하하지만, 전 이 또한 우리 고유의 지켜야할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좀 걸었습니다.
이 곳에서 오징어 덮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시골스러운 들판 한 가운데서 현대식의 해물 밥집을 보니 약간 뜻 밖이기는 합니다. 반찬도 깔끔하고 종류도 여러가지 나옵니다.
생산구이는 쫄깃하게 잘 구워졌습니다.
식후 현관 앞에 있는 원두커피 기계서 나오는 커피의 맛과 향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비워져 가는 보온 커피 통에 리필도 했습니다.
주인장, 감사합니다.
또 걷기 시작합니다.
어, 그런데 지난 번에 이어 좀 특이한 모습의 묘지가 보입니다.
아, 양성이씨 세장산 시조묘역이라고 합니다.
양성 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 조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배다리저수지가 있는 소사벌지구 공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길이 막혔습니다.
뚫렸으면 뚫린대로, 막히면 막힌대로 길가는 게 나그네의 여정이지요.
지도를 보니 갈 길은 많습니다. 다만, 지도대로 가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현촌근린공원이 널찍하고 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공원 근처의 집들도 서양 주택을 본땃는지, 조금은 이국적인 모습니다.
아, 저 분을 찾는 저 플랭카드는 여러 군데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미 실종된지 20여년이 되었는데도 가족을 잃은 슬픔은 엷어지지 않습니다.
부디, 저 분이 가족의 품으로 건강하고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길을 걷다보면 과거의 기쁨과 즐거움은 물론 현재의 가슴아픔도 볼 수 있습니다.
대동법 시행령기념비입니다.
쌀이 많이 나는 평택 벌판에서 쌀로 세금내는 대동법이 처음 시행된 것도 우연은 아니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항이 많았습니다.
역시 개혁과 기득권은 변화에 저항합니다.
하기사 변화가 늘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대동법 :
조선 중기인 광해군-숙종 시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토지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을 통일하여 부과하게 되었다.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데 100여 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담이 급증하게 되어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이며, 이때 걷은 쌀을 대동미라 한다.
대동법의 실시를 놓고 논란이 확산되어 김육, 김좌명, 김홍욱, 이원익 조익등의 찬성파 외에 안방준, 김집, 송시열 등의 반대파가 팽팽히 맞서게 된다. 육 생전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그 뒤 조선 숙종 때 가서야 제주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아, 그리고 대동법 시행비를 보러 오기 전에 근처에 있는 역사유물 공원을 들르면 좋습니다. 우리는 대동법 시행비를 먼저 보고 공원으로 갈려니 좀 헤맸습니다. 마을로 들어갔는데 도무지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빙~ 돌다가 저 곳의 울타리가 벌려져 있어 겨우 들어갔습니다.
역시 다니면서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합니다.
찍은 사진이 많다보니 기억할 것이 많아져 글이 길어집니다.
이 곳부터 성환역까지의 여정은 다음에 .......
(같이 걸은 사람 : 김민주, 김대현, 홍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