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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로 파주읍 - 봉서산 - 선유삼거리 - 화석정  

율곡의 향기를 더듬으며

2019년 7월 17일 제헌절입니다.

우리는 또 북으로 갑니다. 북쪽 끝까지 가고 싶지만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 

여기는 파주읍입니다.

삼송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걸립니다.

파주 먹거리시장이 있네요.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쉽당~ 동네 밥집에서 먹는 것도 걷는 재미중의 하나이거든요.


아침먹지 않고 온 분이 있어 배를 속일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따근한 밥에 김치찌개는 없어도 방금 만든 떡이 맛있습니다.

온 갖 복 많이 들어있는 떡에다 시장이라는 반찬도 있어 잘 먹었습니다.


봉서산 산림공원에 왔습니다.

파주향교입니다.

오늘 공휴일이라 문을 닫았습니다. 

돌아갈까 하다가 아쉬워 담을 돌아가보았습니다.

작은 쪽문이 열려 있습니다.


향교 중심인 대성전입니다.


툇마루에 앉아 커피와 자두를 먹습니다.

셋이 다니다보면 오래 사귄 친구라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성격이 맞는 듯, 안 맞는 듯, 그러면서도 서로 잘 맞추어가며 잘 걷고 있습니다.

커피가 카페에서 대화나누며 마시는 음료라는 걸, 저 사진보며 새삼 실감합니다.


향교에서 신문, 신을 위한 문이 있다는 것이 좀 의아합니다.

신은 유교의 개념과 대치되지 않나요?

조상을 신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고 .......


향교에서 나와 봉서산으로 올라갑니다.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잘 닦여진 임도를 따라 가는 길과 산길을 따라 가는 길.

우리는 산길로 갑니다.


봉서산 정상입니다.

안개때문에 파주읍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전망대가 있습니다.

이런 건물에 지붕이 있으면 정자이고, 없으면 전망대이지요.

그럼 영어로는 뭐라고 할까요?

정자는 pavilion입니다. 그런데 지붕이 없는 건 뭐였더라~

같이 다니면서 서로 단어잘난 척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아 승부요~ 뭐, 어린 제가 져드리는 편이지요 


봉서산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처음 걸을 때는 무심히 지났던 저 이야기들이 갈수록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전설따라 3천리를 라디오로 듣던 세대라서 그런가요?


시계가 맞거나 말거나 

우리의 배꼽시계는 늘 울립니다.

꼬르륵, 꼬르륵, 밥 줘~

오두산이라는 식당입니다.

좀 이른 시간에도 손님이 제법 있습니다.

메밀국수, 녹두전,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배채웠습니다.


근처에 통일공원이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흔적입니다. 그리고 최초의 전장터이기도 합니다.

수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가슴아픈 일이지요.


교과서에 보았던 육탄 10용사의 동상입니다.

무엇이 사람의 목숨을 저리도 쉽게 버리게 하는 지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죽음으로 뛰어들게한 전쟁이 무섭습니다.

만일 저라면 저들처럼 뛰어들까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저 분들에게 경건한 묵념을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럴 필요가 이 땅에서 없기를 바랍니다.


통일공원을 지나 중에교를 건넙니다.


아~

학이 고고하다니 정말 그렇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저 곳에서 우뚝 앉아있는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고고하다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렇게 살고자 했지만, 저저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 사진 건진 걸로 보람을 다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면 저렇게 오래되어 퇴색하고 버려진 건물들이 많이 보입니다.

저 정도의 건물이면 한 때 이 동네에서 꽤나 커다랗고 사람꽤나 꼬였던 곳일텐데 말입니다.

선유리를 지나갑니다.

산업단지가 있는 동네라고 하지만 생각 밖의 큰 동네입니다.


의주길 안내판입니다.

오늘 우리는 화석정까지 걸었습니다.

다음에는 저 길을 마무리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강화길로 갑니다. 에헤라 디야~ 걷세 걷세 젊어서 걷세~~


의주길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표지판입니다.

역사적인 길을 역사적인 세 사람이 역사적인 여정을 걷고 역사적인 글과 사진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분은 역사의 산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요양원입니다.

저기 계신 모든 어르 신이 조속히 건강을 회복하시기 기원드립니다.


절입니다.

대웅전입니다.

불국사, 조계사같은 큰 절도 있지만, 저렇게 초라한 대웅전 하나로만 이루어진 절이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드디어 화석정에 도착했습니다.

임진왜란의 참담함과 선조들의 선견지명이 같이 있는 곳이지요.


화석정 :

이 정자는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강안의 벼랑 위에 입지하고 있는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이 아득하게 보인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국사(國事)의 여가와 퇴관(退官)후에 항시 들러 시를 짓고 연구와 명상을 하며 학문을 논하던 곳이라 한다. 원래 고려 말의 문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이 자리에 1443년에 율곡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에 의하여 정자가 건립된 것을 1478년(성종 9)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고 몽암(夢菴) 이숙함(李淑 )이 이 정자를 화석정(花石亭)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정기(亭記)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서(別墅; 한적한 곳에서 쉬면서 농사도 지을 수 있도록 만든 집)인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중에 보이는 `화석(花石)’을 따서 정자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그후 율곡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하던 이 정자는 당시에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음시청유(吟詩淸遊)하였다고 하는 일설이 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그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근래에 와서 1966년 파주의 유림(儒林)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금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물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화석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가진 팔작지붕으로서 사각형의 방주에 내부는 우물마루로 짜여져 있다. 기둥의 머리에는 주두가 없이 그대로 대들보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소로수장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기둥사이의 수평재인 창방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화반을 놓아 상부하중을 받고 있다. 건물의 내외부에는 화려한 단청을 했고 내부의 화반 위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花石亭重建上樑文)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화석정에서 보는 임진강 전경입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네요. 

아 그런데 갑자기 그 때 궁금했던 사항이 지금 떠오릅니다.

화석정있는 동네가 율곡리입니다.

율곡선생이 태어난 곳이라 율곡리일까요, 동네 이름을 따서 호를 율곡이라고 지었을까요?

이 글 다 쓰고 나서 검색해보아야 겠습니다.


화석정에서 내려오니 건물위에 자전거가 올려져 있습니다.

그냥 올려져 있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 자전거타고 하늘로 날라가는 ET가 떠오릅니다.

쥔장~ 감사합니다.

댁의 자전거로 인하여 저에게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떠오려졌습니다.


이제 오늘의 일정도 마치고 문산읍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문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갑니다.


의주로 만세, 파주만세, 율곡선생 만세, 김대현 만세, 김민주 만세, 홍재화 만세~

더운 데 수고하셨습니다.

여러 분 보셨죠? 뒤에서 율곡선생님이 우리를 웃으면서 응원하고 계시는 걸요.


근데 맨 왼 쪽 사람의 배꼽 잘 생겼네~



그리고 저는 자연주의 맨발신발, 필맥스 신발을 신고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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