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산 프로젝트>
안녕, 아들.
지난 편지에 '눈치게임'에 대해 너에게 말했어.
그런데 엄마 자신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 편지는 너에게 와닿지 않을 듯해.
그래서 이렇게 다시 쓴다.
<엄마의 유산 2> 프로젝트
엄마가 너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눈치'는 뭘까?
눈치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야.
그때그때 미루어 알아낸다니, 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행위가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느껴지는 그 마음을 짐작하는 행위가 눈치를 보는 거네.
어때? 눈치라는 게 생각보다 꽤나 추상적이고 허술한 녀석이라는 게 느껴지니?
그런데 만약 눈치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
타인의 감정과 사고행동을 이해하는 도구를 잃게 되지. 그건 네가 살아가며 겪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게 될 확률을 높이는 일이지. 타인의 감정을 모르면, 너의 감정을 타인에게 오롯이 전달하기 힘드니까. 타인이 화가 난 상태에서 너의 좋은 감정이나 신난 마음만을 전달하면 타인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니?
마찬가지로 타인의 의도가 담긴 사고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관계에서 기대되는 행동을 해내지 못해. 그런 경우가 쌓이면 그 관계는 결국 깨지고 말지. 그건 너의 일부를 깨뜨리는 일이기도 해. 관계 역시 너의 일부니까.
1단, 눈치는 필요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2단, 그럼 누가 눈치를 더 볼까?
엄마는 가치관에 따라 눈치의 수준이 달라진다고 생각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되지.
어떤 하나의 사실 또는 사건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어. 사람마다 가치관이라는 필터를 통해 사실이나 사건을 인지하고 해석하니까.
예를 들어, 네가 학교나 회사에서 이동을 하게 됐다고 생각해 보자. 너의 의도와 상관없이 말이야. 그럼 너는 새로운 친구나 동료, 선배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지. 이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변화를 ‘긍정’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주변의 눈치를 적당히만 봐도 될 거야. 새로운 이들과의 적응에서 필요한 수준의 눈치로. 왜냐면 이 변화는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변화가 아니니까. 하지만 변화를 ‘부정’으로 보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새롭게 변한 주변의 눈치를 과도하게 보게 될 거야. 왜냐하면 변화는 나에게 위협이기 때문이지. 변한 환경 속 많은 요소들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들로 인지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눈치가 엄청난 일을 해야만 하지. 눈치가 사회적 지능에서 생존지능으로 바뀌어버리는 거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겪게 되는 수많은 변화들을 대하는 너의 가치관(價値觀)이 곧 너의 눈치관(官; 감독 관)이 되는 거야. 네가 부정적 가치관을 갖고 있을수록 더 많은 눈치관들을 두게 되는 거지.
눈치를 더 많이 보는 사람들의 심리엔 ‘유아적 욕구’가 존재하기도 해.
유아적 욕구는 타인 의존적인 욕구지. 무슨 일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남 탓을 하거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남이 떠맡기길 바라는 욕구. 때문에 이 유아적 욕구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기도 해. 나의 욕구를 누군가가 들어줘야 한다는 자기 중심성의 반증이야.
예를 들어 동료가 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 ‘저 친구는 왜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지? 내가 혹시 무슨 잘못을 했나? 요새 저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 그때부터 그 친구의 눈치를 보는 거야. 그 친구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게 나와 연관이 있는지, 혹은 일련의 사건이 인사의 여부와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 대부분의 눈치가 그렇듯, 눈치의 실체는 그때그때 미루어 짐작할 뿐. 한 번쯤 볼 눈치를 하루 종일 보고, 여기저기 내 눈치의 정당성을 구걸하고 다닌다면 이때부터는 눈치에 과부하가 걸리지.
여기서 내 눈치의 발단은 친구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겠지. 하지만 이 눈치의 발단은 바로 나 자신이야. 나는 언제나 인사를 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고, 자신의 변화를 누군가 알아차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 나의 욕구를 친구에게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거지.
부모와 자식 간의 눈치도 마찬가지야. 작은 아이가 엄마나 아빠의 눈치를 보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야. 생존권이 부모에게 달려있으니까. 아이들이 눈치가 생기기 시작하면, 울만할 때만 우는 거 알고 있니?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은 상황엔 울지도 않아. 아이들에게도 눈치가 생긴 거지. 그런데 다 큰 어른이 부모님의 눈치를 매사에 보는 건 다른 이야기야. 이땐 그 사람에게 유아기적 욕구가 여전히 강렬하다는 걸 뜻하지. 부모가 나의 성과를 반드시 인정해 주고, 부모가 나의 선택을 무조건 지지해 주고, 부모가 나의 의견을 언제나 들어주길 바라는 욕구. 그 욕구가 강렬할수록 부모의 눈치를 더 많이 볼 수밖에 없어. 부모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하지 못한 사람이지.
유아기적 욕구에 휩싸여 부모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못한 성인은 부모만큼 가까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눈치를 많이 보게 돼. 그 사람들 역시 자신을 평가하고, 지지해 주는 세력이 되길 바라니까. 유아기적 욕구의 연장선이지.
억압받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게 마련이다. 즉 자신의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내려 한다.
실은 자신이 뭔가를 원하면서, 남이 자신에게 바라고 있다고 느낀다(칼 융)
결국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사람은 타인의존적인 사람인 것 같지만 이는 곧 매우 자기중심적이라는 말도 돼. 눈치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모두 헤아려주길 바라고, 자신의 행동을 지지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하거든.
때문에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마음을 왜곡하는 일이 되기도 해. 왜냐하면 눈치의 시작과 끝이 ‘나’에게만 맞춰져 있거든. 시작은 ‘나에게 필요한 이해와 지지를 얻고 싶은 마음’이고 끝은 ‘타인에게 내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거든. 그 중심엔 그냥 ‘나’만 있는 거야.
결국 눈치를 과도하게 보는 건, 나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마음이 없다는 방증 아닐까. 그건 결국 타인을 이해하고, 지지할 마음도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눈치는 어린아이 때부터 자연스레 성장하는 사회적 지능이야. 공감능력의 일부니까. 눈치를 보지 않는 건 공감능력이 없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워. 그러니 당연히 눈치는 봐야 해.
그러나 과하게 보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지. 엄마가 앞서 말했듯 눈치를 어떤 상황에서 누가 더 많이 보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엄마는 이쯤에서 눈치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려 볼까 해.
어릴 눈嫩, 깃발 치識.
어린 깃발.
어리다는 건 단단하게 굳지 않았다는 뜻이지.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거야.
부드럽고 유연한 깃발, 그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한 우리는 눈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
필요한 만큼, 적당히.
하지만 그 깃발이 굳어버려 어떤 바람에도 펄럭이지 않거나, 깃대가 통째로 뽑혀 이리저리 치이는 상황이 된다면 눈치를 제대로 볼 수 없지. 굳어버린 깃발이 어떤 바람에도 펄럭이지 않는다면 그건 사회와의 소통이 닫혔다는 거고, 깃대가 통째로 뽑혀 이리저리 치인다면 그건 눈치가 과도해 너의 중심을 흔들어 뽑았다는 이야기가 될 거야.
그래서 엄마는 다음 편지에서 이 깃발의 깃대인, 주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해.
너의 깃대는 존재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깃발이 펄럭일 수 있을 테니까.
어때? 엄마의 편지가 너의 마음에 닿았니?
(혹시 눈치챘니? 엄마의 이 질문도 너에게 인정받고 싶은 엄마의 욕구에서 기인한 ‘눈치’의 결과란다. 그러니 매번 재차 묻진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