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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의 미학? 과정의 미학!

<정오의 필라테스>

by 카르멘


필라테스는 과정이에요.
결과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알고,
내가 낼 수 있는 힘을 바르게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해요.


나의 필라테스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과정”이다.


물론 필라테스에도 가장 이상적인 포즈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를 위해서 승모근을 잔뜩 세우면서 힘으로 찍어 누른다든가,

허리를 쓰면서 다리를 높이 올렸다 내렸다 한다던가 하는 건

아무 소용없는 허우적거림에 불과하다는 것.


그때부턴 필라테스가 아닌,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필라테스의 본래 목적.

바른 몸의 정렬과 코어의 힘을 기르기 위해선

승모근은 아무 일도 해선 안 되고, 엉덩이와 복부 코어 힘으로 들어 올릴 다리를 엉뚱하게

허리로 들어 올려 허리통증을 부러 만들어내선 안 된다.


그러니, 매우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워도 본래의 힘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팔을 올릴 땐 어깨로 올리지 않는다.

등의 견갑골에서부터 힘을 뽑아 올린다.

우리 몸의 전면과 후면의 이어짐, 그 과정을 의식한다.


다리를 들어 올릴 땐 허리로 올리지 않는다.

배꼽아래 힘을 먼저 준다.

그리고 고관절로부터 다리를 뻗어 올린다.

우리 몸의 상체와 하체의 연결, 그 과정을 인지한다.


사실은 그게 바른 몸의 구조이고,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태어났지만

과정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않아서 왜곡된 결과들을 만들어냈다.


척추측만과 협착, 허리 디스크, 목 디스크, 만성 두통 등등.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내 몸의 연결을 인지하고,
결과가 아닌 과정에 힘쓰는 오늘의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게 내가 느끼는 필라테스.



과정의 인지는 '상상력'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다.


누워서 다리를 천장으로 들어 올려보자.

누군가 내 다리를 천장에서 잡아당긴다고 상상해 보자.

허벅지 안쪽을 끈으로 꽉 묶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배꼽에 힘이 들어간다.

숨을 ‘흡-’하고 참고 배꼽을 넣는 게 아니다.

붙어있어야 할 허벅지 사이가 붙고, 구부러진 오금 사이를 펴내니

자연스럽게 배꼽, 코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상상력, 그게 필라테스에서 가장 중요한 힘이다.


상상을 잘할수록, 몸을 잘 쓸 수 있게 된다.

우리 몸은 우리 뇌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 뇌가 어떻게 상상하고 쓰이느냐에 따라 몸도 바뀐다.


다리를 찢고 싶다면,

미간에 힘을 팍 주고 고관절을 찢어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깨에 힘을 풀고, 발끝을 내 몸에서 최대한 멀리 보낸다 생각하는 거다.

내 다리가 길어진다 상상하는 거다.


그 과정이 오늘, 내일, 모레 모이다 보면 다리가 찢어져 있다.

과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올뿐이다.


참고로, 터널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은

손목을 꺾지 않고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간과하는 손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가장 작은 '새끼손가락'에 있다.

봉을 잡거나 바를 잡을 때 '새끼손가락'에 힘을 더 주면 손목의 정렬이 맞혀진다.

새끼손가락이 없어지면, 악력이 50%나 감소한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니 20% 일 것 같지만 아니다.

바로 이 새끼손가락이 '척골신경'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 우리가 손끝으로 느끼는 촉감, 손가락을 세밀하게 움직이는 능력을 관장하는 신경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끼손가락마저 이렇게 온몸의 연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필라테스는 우리 몸 구석구석의 연결됨을 아는 과정, 과정, 과정이다.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대우주의 모든 원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력이 인간 자신을 항상 모든 원리의 절반과만 동일시하기 때문에, 나머지 절반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며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 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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