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필라테스>
천식, 구루병, 류머티즘 열병을 앓았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얼마나 자신의 몸에 열등감을 느끼며 컸을까?
혹은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갈망했을까?
그 소년은 자라나 1차 세계대전 중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간호병으로 일했다. 그는 팔다리가 잘리고, 썩어나가는 병상의 환자들을 보고 회복 운동법을 고안했다.
그 운동법은 컨트롤로지(contrology), 즉 '조절학'으로 명명됐다. 그의 이름은 조지프 필라테스이며, 조절학은 현대 필라테스의 기원이다.
브런치로 인연을 맺은 한 작가님이 내게 물어왔다.
"허리디스크인데 필라테스를 해도 될까요?"
나는 필라테스 강사가 아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기에 확답은 드릴 수 없었다.
다만, 필라테스가 전쟁터의 환자들을 위해 고안됐기에 '회복'에 집중한 운동임은 말할 수 있었다.
'재활치료'란, 재활할 대상을 목적으로 한다. 애초에 건강한 사람을 위해 고안된 건 아니라는 말.
필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I must be right. Never an aspirin. Never injured a day in my life."
(나는 틀림없다. 내 삶에서 나는 한 번의 부상도, 한알의 아스피린도 필요하지 않았다)
필라테스는 6가지 원리를 갖고 있다(주 1)
01. 집중 concentration
각 움직임의 세부사항에 구체적인 주의를 기울임.
내가 필라테스 수업에서 '집중'의 힘을 느끼는 건 두 순간이다.
처음은 '시작' 시간.
필라테스 기구인 리포머나 체어 등엔 스프링 spring이 달려있다. 색깔도 빨강, 파랑, 검정, 하양 등이 있는데 색깔마다 스프링의 강도가 다르다. 그리고 하나 거느냐, 두 개 거느냐에 따라 당신의 사지가 멀쩡 할지를 결정짓는다.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 운동강도와 목적에 따라 선생님의 큐잉(가이드)에 집중하지 않으면 엉뚱한 색깔의 스프링을 걸거나, 하나 걸 스프링을 두 개 걸어서 자신을 고문시키는 경우가 있다.
두 번째 순간은 '수업 중 모든 때'다.
하나의 동작을 할 때도 본래 그 동작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부작용이 생기는 게 필라테스다. 때문에 선생님의 큐잉을 집중해서 듣고 내 몸에 적용시키는데 집중해야만 '정도'를 구현해 낼 수 있다.
집중을 못하는 순간? 선생님이 귀신같이 알고 내 옆으로 온다. 앗, 들켰다!
하지만 사실은 안다. 집중하고 있는 나와 집중하고 있지 않은 나를 아는 건 내가 먼저다. 그래서 필라테스는 인지과학일지도 모른다.
02. 중심잡이 centering
중심근육인 코어근육을 사용하며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
내가 필라테스 수업 중 가장 많이 듣는 '어'는 다름 아닌 '코어'다.
"코어 잡으세요" "코어 풀렸어요" "배꼽, 배꼽, 배꼽!"
보통 코어를 배꼽부위로 해석하며, 우리는 배꼽에 온신경을 두지 않기 때문에 종종 배가 볼록 나온다. 하지만 필라테스는 코어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코어를 잡는 게 중요하므로 다른 건 몰라도 코어를 잃는 순간, 나는 유죄가 된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엄마뱃속에서 모체와 유일하게 직접 연결된 부위가 배꼽인데 어쩌면 그만큼 배꼽은 우리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부위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순간 망각하고 마는 나의 중심.
코어부위를 '하우스(house)'라고도 표현하는데, 내가 땅 위에 지은 하우스는 못 사도 내 몸 위에 짓는 하우스는 지켜야지 하는 마음을 먹곤 한다.
내가 내 몸의 하우스를 잃는 순간, 마치 집 없는 설움과 마찬가지로 팔다리의 모든 관절들이 고생하게 돼있다.
03. 호흡 Breathing
호흡은 움직임을 보완하며, 최적의 신체적, 정신적 효과를 위해 최대한 가쪽(흉곽) 호흡을 권장함.
우리는 평상시 내가 호흡을 하고 있나? 의식하지 못한다. 숨을 참아야만, 아 내가 숨을 쉬고 있었구나 안다.
하지만 필라테스나 요가 수업을 하는 동안은 내가 '열심히' 호흡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제대로 된 동작을 구현하기 위해선 호흡의 힘이 절대적이기 때문.
당장에 코어를 잡을 때만 해도 '후' 내쉬는 숨을 통해 배꼽이 척추에 닿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양껏 벌어진 갈비뼈를 닫기 위해서도 '후' 내쉬는 숨을 통해 체통 없이 확장된 갈비뼈가 줄어든다.
무의식적인 호흡은 무의식적인 불균형을 종종 갖고 오는데, 이를테면 좌측의 갈비뼈가 더 확장되어 오른쪽 척추측만을 강화한다. 반대로 의식적인 호흡은 의식적인 균형을 갖고 오는데, 이를테면 가슴을 바닥으로 꺼뜨리는 흉곽호흡을 통해 명치가 눌리고 갈비뼈가 닫히며 뒤로 빠진 골반이 제자리를 찾아온다.
내 몸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길잡이는 결국 내호흡인 셈이다.
04. 흐름 flow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부드럽게 넘어가야 함.
이전에 내가 했던 요가 중에 특히 좋아했던 요가가 '플로우 요가'다. 재즈나 클래식 등 음악에 맞춰 요가동작을 정말 끊김 없이 이어가는 '흐름'의 요가. 음악의 분위기, 음역의 높낮이 등이 내 몸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 참 근사했다.
이 흐름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흐름이 끊긴다'는 건 내 관절이 끊긴다는 거고, 내 호흡이 끊긴다는 이야기다. 관절과 호흡 없이 하는 운동이 있던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흐름을 타기 위해선 결국 집중해야 되고, 코어를 잡아야 하고, 호흡을 해야 한다.
사실은 필라테스의 모든 원칙들은 하나로 흘러야 한다. 의식적인 호흡과 집중이 흘러가는 게 내 몸이 되고 내 정신이 되므로.
05. 정밀 precision
신체 부위의 작동 여부, 위치, 정렬 하나하나의 모든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인식' 하는 것.
필라테스는 1미리(미터)의 운동이다.
"튀어나온 목을 뒤로 1미리만 집어넣으세요"
"발끝을 1미리만 늘려요"
"견갑골부터 팔을 1미리만 더 뽑아내세요"
과연 1 밀리미터를 집어넣고, 늘리고, 뽑아내는 게 눈으로 보일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이 의심이 드는 순간 1미리는 내 머리뿐 아닌 내 몸에서도 사라진다.
믿는 순간, 그대로 상상하는 순간, 내 머리뿐 아닌 내 몸에서 1미리가 드러난다. 선생님은 귀신같이 안다. 그 1미리의 차이가 자세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그 느낌의 차이를 나도 알게 된다.
06. 조절 control
각 동작은 특정 근육의 움직임과 호흡으로 제어된다. 이것은 곧 정신을 제어하는 것과, 움직임을 이끄는 것.
내 몸을 내가 조절한다는 게 머릿속으론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 몸이라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모르겠다면 아래 동작을 1~5분만 해보면 된다.
플랭크 1분 경과 후 미친 듯이 떨리는 나의 전신,
스쿼트 5분 경과 후 요동치는 내 허벅지.
혹은 아주 간단히, 눈을 감고 한 발을 무릎을 구부려 들어 올려보자. 당신은 몇 분이나 흔들림 없이 서있을 것 같은가?
장담하건대 눈을 감는 순간 먼저 흔들, 다리를 드는 순간 균형을 잃을 것이다. 이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미친 듯이 떨리는 내 팔다리는 어느 순간 나의 조절력을 벗어나게 된다.
조절력은 결국 통제력이다. 나의 신체의 나약함을 내가 조절해 내는 것.
결론적으로 우리 필라테스 학원엔 디스크 환자가 꽤 있다.
사실 나도 디스크 의심 환자기도 하다. 일자목, 일자허리, 척추측만 3종은 기본소양?으로 갖고 있다. 필라테스를 하는데 왜 이런 문제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필라테스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아마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걷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내 몸을 이제 민감하게 느낄 줄 알고, 조절하는 훈련에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의 이러한 약점 등을 극복하기보다는 조절하는 능력을 배양시켰다. 그게 필라테스가 내게 과학인 이유다.
주 1) 필라테스의 과학, 트레이시 워드, 2023, 사이언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