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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 한번 써보실래요?

공저 쓰고, 공자 되다

by 카르멘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조지 버나드 쇼의 기막힌 묘비명으로 유명했죠.

사실 이건 그의 묘비명 원문은 아니고, 버나드 쇼의 유머와 철학을 반영하여 각색한 문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메시지란 점에선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내 묘비명은 뭐라고 적으면 좋을까?

혹은,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내 아이에게 남길 수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이가 세상에 홀로 남겨졌을 때, 무엇이 엄마를 떠올리게 할까?

삶의 굽이굽이 고비에서 무엇이 엄마의 존재를 대신해 줄까?

부동산이나 땅이 있다면, 아이에게 경제적 보탬이 되겠지만 아직은 내 손에 쥔 게 없고 앞으로도 장담할 수가 없으니 어쩌나.

내가 아이에게 무조건 남길수 있는건 뭘까?


우리는 그걸 '유산'이라고 부릅니다.

반드시 유언장에 적어야 하는 물질적 재산만이 유산은 아니겠지요.

부모로서 자식에게 남기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유산이니까요.


그 생각의 끝에 저는 유산을 써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남길 게 없었죠.

제게 무엇이 담겨 있는지 몰랐거든요.

제가 엄마로서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지 알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중도 제 머리를 못 깎듯이, 내 아이의 엄마라는 상황에만 매몰돼선 진짜 내가 아이에게 남길 유산이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엄마라는 공감대를 갖고 있되, 글로 유산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녀 서로를 냉철하게 봐줄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참여한 <공저>의 동기입니다.

그래서 <공저 작가>가 됐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유산: 우주의 핵은 네 안에 있어> 공동저자가 됐습니다.




지난 6개월의 과정 동안, 왜 '공저'를 써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제가 쓴 글은 비록 한 편이지만, 제가 배운 건 한 편의 글쓰기가 아니었으니까요.

혼자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게 글이고, 어쩌면 의견 조율이나 시간 조정 등의 부가적인 노동이 들지 않는 지름길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저의 길을 걷는다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혹시나 '공저작업'에 대해 궁금하고,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저는 한 번쯤 그 길에 서보시길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공저란 공자의 말을 비로소 몸으로 배우게 되는 방법 중 하나거든요.

제가 이번 <엄마의 유산> 공저작업을 통해 배운 세 가지 공자의 명언이 있습니다.


01. 인간의 천성은 비슷하나 습관의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性相近也, 習相遠也.

《논어》, 양화(陽貨) 2


우리는 사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누군가는 눈이 조금 크고, 누군가는 코가 조금 높고, 누군가는 입이 조금 클지 몰라도 이목구비의 기능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게 우리 오감의 평균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도 거기서 거기죠.

괜히 '작심삼일'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겠죠?

매일 한 편씩 글을 써보자, 마음먹어놓고 삼일이 지나면 노트북을 켜는 행위조차 미루게 됩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어보자, 마음먹어놓고 도서관의 연체 독촉문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됩니다.

그게 우리 의지의 평균치입니다.


하지만 '함께하면 달라질 거야'라는 나이키 우먼의 캐치프레이즈처럼,

함께 읽고, 함께 쓰니 조금은 다르더군요.


매주 어떤 시간에 줌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어떤 시간에 글을 쓰고,

매번 서로의 글을 읽고 첨언을 해주다 보니,

공동의 '습관'이란 게 자리 잡습니다.


우리의 오감도, 의지도 평균치이지만 공동의 습관이라는 게 생겨나면

평균치가 공동상승 함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개인에게 유산처럼 남습니다.


02.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나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德不孤, 必有鄰.

《논어》, 이인(里仁) 25


글을 쓴다는 건, 참 외로운 일입니다.

누군가는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노트북을 열고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한낮의 해를 등지고 글감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가죠.

또 누군가는 모두가 잠든 시각 비로소 갖게 된 고요한 시간에 사유를 합니다.


이 모두가 혼자 하는 일이죠.

읽고, 쓰고, 사유하는 모두는 혼자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래 하기는 쉽지 않죠.

순간순간 의심이 듭니다.

나 지금 혼자 뭐 하는 짓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의심이 드는 순간 고개를 들면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건너편에 있습니다.

아무도 말은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책을 읽으며 줌화면에 동지들이 있습니다.

공저를 함께 하는 글쓰기 이웃들이죠.


저는 비록 이 활동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만, 함께 한 작가들은 입을 모아 그 순간의 위대함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아, 거기 있군요!


그 순간의 든든한 힘에 대해.


03.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논어(論語)》, 술이(述而) 7


마지막은 역시나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만큼 큰 가르침은 없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읽은 책에서도 배우고, 그 사람이 쓴 글에서도 배우고, 그 사람이 내뱉는 말에서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 모든 행위를 하는 태도에서 배웁니다.


누군가는 회식 자리에서 마감기한에 맞출 글을 썼다 하니, 실행에 대한 태도를 배웁니다.

누군가는 새벽마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철학책을 읽었다 하니, 배움에 대한 태도를 배웁니다.

누군가는 시차가 다른 시각에도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 하니, 협동에 대한 태도를 배웁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한 명은 스승이라지요.

우리는 열두 명의 작가, 한 명의 기획자, 한 명의 시인 총 열네 명이 함께 공저라는 길을 걸었으니

스승이 몇 명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었고, 제자였으니 매우 남는 장사였다 장담합니다.


그렇게 공저라 쓰고, 공자라 읽을 만큼 배움의 장이였던 6개월의 공저작업.


그 배움의 현장이 당신을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시간 2>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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