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0일의 공백.
그 공백의 시간 동안
채워지는데, 비워지지 않았다.
소비되는데, 생산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내 심신의 건강 측면에서는 그랬다.
하늘이 열린 날부터 한글이 만들어진 날까지 먹고 먹고 또 먹고,
아이를 안고 안고 또 안다 보니
배 속이 가득하고 등허리는 곱게 말아졌다.
마치 펭귄 한 마리가 알을 품듯, 캥거루 한 마리가 새끼를 주머니에 넣듯.
그 채움의 행복이 쌓일수록 비움의 행복력은 고갈되어 간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모두 양극성을 가진다.
그러니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추석 무렵 ‘다이어트’ 검색어가 치솟고,
‘급찐급빠’ 피드가 넘쳐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인간의 의식은 양극적이다.
이것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완전하지 못하게 만든다.”
—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 달케
속세의 인간인 나 역시 수요일쯤 되자 ‘필라테스 가지 못하는 부자유’를 느꼈다.
뱃살은 찌고, 허리와 어깨는 뻐근하게 신호를 보낸다. 아이가 영화를 보는 동안 요가 매트를 꺼냈다. 한동안 접어 두었던 그 위에 발을 디디니 발바닥부터 안정감이 번져왔다.
태양자세, 수리야 나마스까라, 나무자세, 쟁기자세.
잊고 있던 몇 가지 동작들을 소환해 본다.
나무자세로 서면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고, 머리로 서면 혈관들이 경고등을 켠다.
단 다섯 번의 수리야 나마스까라만으로도 땀이 흐르고 머리가 어지럽다.
요가 지도자 자격증까지 따며 요기니로 살았던 세월이 무색하다.
하지만,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다 문득 전신을 훑는 감정이 느껴졌다.
내가 요가를 사랑했던 마음.
그건 떨리기 위한 마음이었다.
내가 요가 매트 위에 서는 이유는 내 버틸 힘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직면하기 위해서였다.
두 다리로 단단히 서는 건 익숙했지만, 한 다리로 서는 순간, 발목이 떨리고 전신이 흔들린다.
고작 발 하나 뗐을 뿐인데, 그 버팀의 힘이 얼마나 작은지 절감한다.
발바닥으로 서있던 내가 머리로 거꾸로 서는 순간 팔꿈치가 흔들리고 혈액이 머리로 쏟아진다.
고작 매트 위에서 머리로 버티는 일조차 이토록 어렵다니.
그러나 사실, 버티지 못하는 건 내 육신이 아니라 내 마음이다.
발끝이 땅을 완전히 벗어나기도 전에, 그저 무릎을 구부려 발을 떼려는 그 순간 불쑥 스며드는 의심.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
변화를 버티지 못하는 마음.
넘어져도 뒤로 구르면 그만인데, 내 팔뚝의 힘을 믿지 못하는 마음.
할 수 있을까?
고작 매트 위일 뿐인데, 세상의 공포가 내 몸에 달라붙는다.
넘어질까 두려워, 나 자신의 가능성을 버텨내지 못한다.
펴지지 않는 건 오금이 아니라 마음이고, 균형을 잃는 것도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안돼도 그만인 아사나 하나에 불안과 두려움과 불신이 숨을 쉰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마다 버텨야 하는 건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필라테스로 몸의 체형을 교정하느라 몰두했던 지난 3년 동안 잊고있던 또다른 마음.
왜 요가를 ‘수련’이라 부르는지, 요가엔 '연습'과 '과정'만 있을 뿐인지.
매트를 접으며 오랜만에 좋아하는 시를 하나 꺼내본다.
류시화 시인의 <요가 수행자의 시>
매일 아침 나는
삶에 대해 ‘네’라고 말하며 절한다.
어둠 속에서 웅크렸던 몸을 펴고
미지의 하루를 향해 두 팔을 내민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심장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
두 발을 모으고 산처럼 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벗이 되어줄 호흡에
마음을 얹는다.
한 다리로 서서
내가 대지에 뿌리내린 나무임을,
세상이 나를 흔들지만
결국 나를 흔드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안다.
금잔화처럼 해에게 드리는 경배는
내 목과 정신을 곧게 세우고,
그 빛 속에서는 행복도 고뇌도 눈부시다.
매일 밤 나는
다시 삶에 대해 ‘네’라고 말하며 절한다.
계획대로 되길 기도하는 대신
계획에 없던 일들을 준비해 달라 기도하며
깊이 죽은 자세로 잠든다.
내일 내가 살아 있다면,
완전히 새로운 몸과 정신으로 깨어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