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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사회생활 잘 하셨네요

by 카르멘

오전 8시.
요즘 따라 아들이 늦잠을 자긴 했지만, 그래도 8시??

허겁지겁 아들 밥을 먹이고 8시 40분에 등원시키고,

9시에 차 시동을 거는 순간 경고등이 깜빡였다.
타이어 네 개 모두가 저압이라는 신호였다.
별일 없을 줄 알았는데, 꼭 이런 날에 이런 일이 생긴다.


그 순간, 마음의 방향이 또렷하게 바뀌었다.
‘오늘 강의 잘 해야지’에서
‘제발 무사히만 도착하자’로.


30분의 운전시간 동안 강의 내용을 머릿속에 정리하려던 계획은 도서관 근처 블루핸즈를 찾는 일에 밀려났다.


저속주행으로 북토크 30분 전 도착.

지하 1층 강의실 문을 밀고 들어선 순간, 조금 전에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조용히 가라앉았다.


“강사님이신가요?”
문헌정보과 학생이 먼저 말을 건넸다.
과제 때문에 왔다며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는다.
그 한마디에 묘하게 마음이 다독여진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9시 50분.
여전히 강의실에는 나와 그 학생뿐.
잠시 뒤 도서관 직원분과 담당팀장님이 들어오며 말했다.
“보통은 5~10분 전에 많이들 오세요.”

16명 신청 중 절반만 와도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10시 정각이 되자 10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찼다.


당신의 페르소나는?


사실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건 “여기 왜 오셨어요?” 그 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기보다 내가 먼저 추측을 건네보기로 했다.

평범한 엄마이자 직장인이 어떻게 책을 썼지?
워킹맘이 힘들다던데 혹시 진짜 꿀팁이 있나?”

아마 그런 마음으로 오셨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흘렀다.


두 가지 축으로 강의가 이어졌다. 엄마가 작가가 되면 나타나는 효과와 방법,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제도와 마인드.


무엇보다 이번 북토크의 핵심 키워드는 ‘페르소나’였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얼굴을 갖고 있지만, 그중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싶은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작가’와 ‘워킹맘’이라는 페르소나를 꺼내 놓았다.
지금의 나를 이룬 두 개의 길이자, 올해 내가 낸 두 권의 책이 향하던 방향이었다.


“우리, 왜 죄책감을 느끼죠?”


PT는 1시간 5분만에 마쳤고, 자유 질의응답에 들어가자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진심 덕분에 무려 30분이 훌쩍 흘렀다.

외국에서 일하다 한국에 온 워킹맘이 조심스레 물었다.


“외국에서는 응급실 가도 죄책감이 없었는데
한국에서는 회사 다니며 자꾸 죄책감이 들어요. ‘애 아픈데 야근하면 어떡하냐’는 말도 듣고요.
왜 한국의 엄마들은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까요?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답했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문화 때문이에요. 아이가 아프면 1차적으로 ‘엄마 몫’이라는 인식.

일하는 아빠에게는 절대 하지 않는 말을 일하는 엄마에게만 묻죠.

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 상사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이를 실제로 돌보며 일해본 경험이 없기에 그 감정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는 거죠.”


그리고 덧붙였다.


“죄책감을 벗어나는 방법은, 내가 아이에게 어떤 ‘정신적 유산’을 남길지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에요.
죄책감은 엄마를 가해자, 아이를 피해자로 만듭니다. 그 감정이 쌓이면 결국 둘 다 상처를 입어요.

아이에게 피해의식을 남길 것인지, 아니면 일하는 엄마의 당당한 모습을 남길 것인지.
그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 일하는 엄마는 절대 가해자가 아닙니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동반자


일면식도 없던 브런치 작가님(@퉁퉁코딩)이 아내와 함께 와주셨다. 아내분이 부드럽게 손을 들었다.

“일하면서 아이를 키울 생각인데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요. 남편 역할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중요해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부부는 ‘공동양육자’가 됩니다.

최근엔 남편과 제가 휴가를 퐁당퐁당 나눠 쓰고 있어요.
‘오늘은 내가 쓸게, 내일은 네가 써.’ 이 말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관계라면

그게 훌륭한 팀워크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내가 아프지 않도록 일상의 여백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글쓰기와 운동이 제겐 숨구멍이었는데, 남편은 그 시간을 ‘낭비’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덕분에 아내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해줬죠.”


옆에 앉은 남편분을 향해 조용히 응원의 눈짓을 건넸다. 그리고 작가님 북토크 때 나도 꼭 가리라.


다시 채워진 공기압


참여자들에게 자신의 페르소나와 필명을 적어보게 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작은 엽서와 봉투까지 준비해왔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결국 꺼내지 못했다.
다음 기회가 온다면 그때 꼭 해보고 싶은 소망으로 남겨두었다.


북토크는오랜만에 마음 깊숙이 설렘을 데려왔다.
내 책을 읽고 찾아와 궁금한 점을 물어주는 사람들.책을 품에 안고 와 사인을 받는 손길.

그 모든 장면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그런데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도서관 직원분의 한마디였다.

“작가님, 정말 사회생활 성공하셨어요. 요즘 누가 회사 후배가 자기 시간 내서 이렇게 와주고 꽃다발까지 챙겨와요?”


그날, 임신 준비로 휴직한 후배가 와줬다.

와준 것만으로도 벅찬데, 예쁜 꽃다발까지 건네주었다.

그래, 나 사회생활 헛으로 하지 않았구나.


‘엄마의 유산 사회생활 호흡법’에 쓴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었구나.
‘빽 없는 워킹맘의 생존 비책’이 허상이 아니었구나.


참 설레고, 참 기뻤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참 오래된 일처럼 느껴졌다.

북토크를 마친 뒤 후배와 칼국수를 한 그릇 나눠 먹었다.
곧 엄마가 될 그녀의 앞날에 오늘의 시간이 작은 방향키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전, 셀프로 타이어 공기압을 다시 채웠다.

공기가 다 채워지자 삑삑삑 소리가 울렸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속에도 삑 소리가 울렸다.

조금씩 빠져나가던 나의 공기압도 다시 빵빵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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