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엄동설한에도 필라테스를 간다고 하면 대단한 자기관리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연비 좋은 몸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근력이 쉽게 붙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다.
내 몸은 늘 아침부터 나를 애먹인다.
아이 등원시키고 나면 이미 하루의 절반을 산 기분이고,
점심시간까지는 라떼 한 잔으로 버티는—권장할 수 없는—습관을 여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
엔진 경고등이 켜진 채로 출근하는 날도 잦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하의 바람을 뚫고 정오의 필라테스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필라테스를 다녀오면
바닥까지 떨어졌던 내 몸의 연비가,
정말 ‘서서히’ 차오르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건 에너지를 써서 고갈되는 느낌이 아니다.
움직여서 더 피곤해지는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하이브리드 같은 몸의 구조를 잠시나마 회복하는 느낌에 가깝다.
필라테스는 이상한 운동이다.
온몸을 다 쓰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평소에 얼마나 특정 부위를 안 쓰고 살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연비가 낮은 차일수록
연비가 조금만 올라가도 변화가 또렷하듯,
쓰임이 적었던 부위일수록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의 반응은 더 분명하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느라
접힌 채 굳어 있던 고관절을 움직일수록,
그 시원함은 거의 카타르시스에 가깝다.
손이 앞에 달려 있는 구조 때문에
늘 굽어버린 어깨와 등을
의도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
명치 끝이 쭉 펴지며 숨이 들어오는 감각.
“아, 내가 이만큼 안 쓰고 살았구나.”
필라테스는 늘 그 사실을 몸으로 먼저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필라테스를 ‘운동’이라기보다
연비 회복 시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체력이 좋은 사람이 더 강해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체력이 낮은 사람이
다시 하루를 버틸 연료를 채우는 시간.
영하의 날씨에도 필라테스를 가는 이유는
의지가 강해서도, 목표가 거창해서도 아니다.
그저
움직이지 않으면 더 빨리 방전되는 몸이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오의 필라테스는
내 하루를 더 빼앗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오후와 저녁을 살아낼 연비를
미리 회복해두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자기합리화라면,
영하의 날씨쯤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그리고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끌고 다녀오면, 내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바로 그 찰나의 바람을 맞는 순간만이라도.
나는 전적으로 몸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몸에 속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