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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이나 자세요

by 카르멘

01. 나의 이야기


삶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적은 없다.

다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을뿐.


내가 기억하는 유년시절부터 내가 아이를 낳기 전까진

1년 동안 감기를 1번 걸릴까말까 했다.

시판이유식, 분유, 각종 시판음식을 먹으며 커온 나지만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었다.

감기? 그까짓거 정신력 문제지!

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1년 365일 중 체감상 360일쯤 아이는 감기에 걸린다.

같이 먹고, 같이 자는 엄마가 감기에 걸리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엊그제 목감기가 제대로 왔다.

아이가 코감기에 걸려 일요일 소아과 대란(8시20분에 이미 대기 60번)을 나홀로 치른(아빠 근무 ㅠ)

다음날이었다.


앉았다 일어서는 데도 골이 울려댔다.

침을 삼키거나 물을 마시는 것 자체가 고역.

열을 재보니 37.7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필 월요일이라 어쩔 수 없이 휴가를 내고 내과를 다녀왔다.

문제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는 것.

결국 아이를 데리고 내과에 가서 진료를 봤다.

열과 몸살 기운으로 아이와 놀아주고 안아주고 할 기력이 없었지만,

아이도 그런 사정을 봐줄 여력은 없다.


엄마는, 아파든 안 아프든, 그냥 엄마다.

아이는 엄마가 아픈게 싫다.

(엄마도 아이가 아픈게 너무 싫다)


아이가 눈이 아프다하여, 그날 오후 또 상가 소아과에 갔다.

상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모습은,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시세끼 먹이고, 간식 주고, 씻기고, 같이 낮잠과 밤잠을 잤다.

나는 한끼 겨우 챙겨 먹고, 씻지도 않고, 아이가 잠든지도 모른채 죽은 듯이 잤다.


다음날 새벽 또 하루가 밝아

어제보단 나은 오늘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며

아이를 등원 시키고, 출근했다.


언젠가 나도 옷을 골라 입고, 신발만 골라 나서면 되는 출근길이

이렇게 힘든 일이 될 줄 몰랐다.


쇼펜하우어 글 중 ‘피곤할 땐 반성하는 자학 따위 말고, 잠이나 자라’는 말이 있다.


나도 그러고 싶다.

잠이나 자고 싶다. 진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대로,

인생은 원래 고통이 전제돼 있으니 어찌하리오.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고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면,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한, 나는 행복한 존재다.라고 정신승리!)



02. 그(쇼펜하우어)의 이야기


누군가는 그의 책을 읽고, 세상없는 ‘비관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그는 유복했고 똑똑했다.

다만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그에게 학자보다는 상인의 길을 권했고, 그러다 아버지가 죽었고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사교계에 진출해 아들인 그는 상심했으며

대학교수로서 그의 강의가 인기가 없자 절망했다.


그러니 그는 좋은 조건도, 그다지 좋지 않은 조건도 모두 갖고 있는 인생.

그냥 보통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택한 사유의 방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의 말 그대로가 아닌 내가 읽기 쉬운 방식으로 약간 편집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싶은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인생'이라는 두글자를 고통으로 덧칠하는 주체, 권태로 변화시킨 주범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이 세상과 사회가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의 문제고,

내가 존재한다는 건 오직 나만의 문제다.

나는 이 세상에 있고 싶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쓸데없는 말로 그것이 나의 존재라고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한다면 불멸을 위해 나는 내가 가진 것 중 단 한 가지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우울증


현대의 우울함이 두려운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울의 덫에 빠져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없다.

기술이 문명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불감증처럼 사회적 인습 전반에 무기력해져 자기 생각과 감정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망상에 빠진다.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망령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우울의 망령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나면 사람의 영혼엔 오직 분노만이 남게 된다.

외로워서 화가 나고, 피곤해서 화가 나고, 남들이 행복해서 화가 나고,

마침내 화만 나는 내가 싫어서 미칠 듯이 화가 난다.


#타인에 대한 인정


타인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와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람을 나와 구별되는 개인으로 판단하여 그 사람을 나처럼 자유로운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인데,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정확히는 부모가 자녀를 바라볼 때,

부모가 타인에게 허락하는 기본적인 인정조차 자녀에겐 허락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인처럼 자녀가 구별되지 않아서다.


부모는 자녀를 개인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자녀의 속성이 자기 안에 갇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사랑에 빠진 거룩한 대가로서 주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녀 또한 타인과 마찬가지로 나와 구별되는 하나의 개인임을 인정하는 부모는 매우 드물다.

자녀를 개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자녀를 향한 애정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부모도 많다.


자녀를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녀도 그에 대한 상호반응으로 부모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개인임을 인식 못하는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인식한다.

부모에겐 개성도, 감정도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일생을 내 노예처럼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주는 하나의 물건으로 부모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됐음을 상기한다면,

사랑이야말로 한 사람의 일생을 추락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


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보단, 가난하지 않겠다는.

건강보다는,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놀기보다는, 욕을 먹지 않도록.

이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 수칙이다.


머릿속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제거하면 이 수칙들을 좀 더 쉽게 지킬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속담 중에 ‘더 좋은 일은 정말 좋아하는 일의 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건 피로 탓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모든 원인은 피로 때문이다.

삶에 지쳐버렸을 땐 냉정한 반성이 불가능하다.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한심스레 여기고 있으며, 타인을 증오하는 중이고,

영혼과 육신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이럴 땐 그저 쉬는 게 최선이다.


반성은 자기혐오다.


자시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인간은 뭔가 반성할만한 건수가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무턱대고 반성하며 자아를 성찰한다.

그럴 바에야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잘먹고, 잘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


#행복의 입증


행복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행복을 활동 그자체로 본다.

행복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잘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잘 산다고 느끼는 까닭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요약하자면 행복은 ‘잘하고 있다’는 지속이다.


예를 들어 애벌레가 번데기,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어 날개를 펼치는 순간,

나비는 지금뿐만 아니라 인고의 절정이었던 번데기로서의 시기까지 ‘잘해온 것’으로 입증된다.

다시 말해 나비로 완성되어 형태의 궁극인 비상을 이뤄낸 바로 그 시점에서,

생명체로서의 모든 시기가 행복했던 것으로 입증된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등 뒤에 서 있다


우리의 삶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간수는 채찍과 몽둥이를 들고 창살 밖에서 우리를 감시한다.

간수의 정체는 권태다.


권태는 언제나 우리 등 뒤에 서 있다.

간수의 채찍질에 우리 몸은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다.


의지가 신의 의지로 여겨질 만큼이어야 인간은 불안을 떨쳐 수 있다.

이와 달리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의지는 방주가 되지 못한다.

살아가는 내내 불안과 고통은 필연처럼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인생에 대한 극복과 인생에 대한 굴복이다.

숨 쉬는 모든 존재에게 길은 이 두 가지뿐이다.


#불행이 지나간 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원칙.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해봐야 소용없다.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태만, 무모함, 불성실을 후회하기도 늦었다.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건,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


명백한 실수를 변명, 축소, 미화할 필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머나먼 항해를 떠난 배는 바다에서 풍파를 만난다.

풍파 없이 배가 항구에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시련은 전진하는 자의 벗.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처럼 지루한 것이 또 있을까.


번민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번민은 욕심에서 태어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욕심보다 강한 무기가 있다.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보다 약해질 때 우리는 정의라는 단어를 잊게된다.


#나의 말


‘고독’과 ‘권태’는 나의 말이 되었다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말’이 있다.

늘 마음속에 그 말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 말을 혀와 몸과 의지로 표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말’이 처음부터 생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 영혼이 이 ‘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의 생명이 된다.

간혹 도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돌아온다. 이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오직 이 말뿐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나에게 이 말은 ‘균형’.

감정에 압도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기인한 균형,

상황이나 분위기에 압도되어 변명이나 핑계를 구차하게 늘어놓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탄생한 균형.

~해서 죽겠네,~해서 죽겠다 같은 클리셰한 말을 습관처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구한 균형.

그 모든 전제 하에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나의 마음이 구하는 말, 균형감.


내가 오랜 시간 겪어온 마음의 부침, 성년이 되어 경험한 좌절과 분노 등을 잠재우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고

(아니 보다 정확힌, 요가가 그냥 내게 걸어왔다)

약 10년 동안 요가수련을 통해 난 먼저 몸의 균형감을 익혔다.

그리고 사바사나(시체처럼 누워서 비워내는 명상시간) 등을 통해, 요가 선생님이 말해주는 아사나 동작과 수련의 의미 등을 통해 마음의 균형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내이름 석자만을 갖고 살아온 35년의 자아는 제1의 균형감을 이뤄냈다.


그리고 내가 낳은 제2의 존재가 내가 기존에 갖고 구현했던 제1의 균형감각을 모두 깨트려놓으면서

또다시 제대로 갈구하게 된 것이 바로 제2의 균형감.


제1의 균형감이 나 외에 존재를 나와는 분리해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여 지켜낸 것이었다면,

제2의 균형감은 쇼펜하우어 말처럼 내속으로 낳은 자식을 개인의 인격으로 나아가 타인으로 인정해야 지켜낼 수 있는 균형감일 것이다. 이것은 아이가 어릴땐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매일 부침을 겪는다.


제2의 인격(엄마, 아내 등)으로 산 세월이 3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3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온 제1의 인격(그냥 나)도 30대에 찾은 제1의 균형감을 벌써 찾았을리 없다.

그래, 지금 나의 부침은 당연한 거다. (위로가 되는군)


당신의 '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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