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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MH Nov 01. 2020

조금은 의아한 그들의 대처방법

시대에 따라 교육법은 변화한다. 우리가 자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호주는 문화나 언어가 우리와 다르므로 어린이들의 행동에 대한 대처방법이 다른 것은 당연할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대처와는 정말 다르구나하고 느꼈던 경우가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친구가 자기랑 놀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그로 인해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릴 때나 우리의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놀아주지 않는 아이에게 왜 놀아주지 않느냐, 우리 다 친구니까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등의 잔소리를 덧붙이면서 서로 같이 놀도록 해 주었었다. 그래야 왕따를 당하는 것을 방지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그럴 경우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에게 약간은 단호하게 왜 꼭 그 아이와 놀아야 하냐고 되묻는다. 너랑 놀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와 놀지 말고 다른 아이를 찾아 놀라고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같이 놀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억지로 특정 친구와 놀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서로 뜻이 맞아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일방적인 친구 사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맞는 친구를 찾는 것부터가 아이들이 스스로 배워가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한 아이를 왕따 시키는 것이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왕따가 아니라 서로 맞지 않으면 굳이 같이 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이 지나친 슬픔을 표현할 때의 대처 방법이다. 어떤 아이는 큰소리로 울어대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구석에서 흐느끼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자신을 좀 봐달라는 신호인 것은 분명하다. 안정시키고 우는 이유를 물어보면 어른들이 듣기에 매우 사소한 이유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아주 서럽거나 슬픈 일 일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여러 가지 말로도 계속 투덜대거나 징징거릴 때 교사들은 매우 단호하게 ‘세상이 끝나는 일도 아니잖아’라는 말로 그들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대해 버리는 부분이었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그렇게 자신의 일을 시시콜콜한 일로 치부하는데 대해 삐칠 것 같았으나 의외로 잘 듣는 마법의 말이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대단히 큰 일 때문은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 그들이 감정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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