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출산을 책임지는 '산과' 그리고 자궁과 난소의 질병을 다루는 '부인과'라는 분과가있다는 것이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없는 분과도 있다. 바로 호르몬을 다루는 '내분비과'이다. 난임 클리닉의 경우 여기에 속한다.)
전공의 시절을부인종양학으로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보냈기 때문에수술 범위가 뱃속 모든 장기인, 10시간씩 걸리는 부인암 대수술을 밥 먹듯이 보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수술에는 시큰둥해졌다. 전공의 시절당직으로 밤을 새우던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복통으로 배를 부여잡고 응급실로 향했다.근무중이었던 응급의학과 친구는 '밥먹자'라고 할 법한 담담한 톤으로 '수술해야겠네'라고 했고, 나 또한 '그래, 직원식당 어때'라고 대답해도 될 만큼 덤덤하게 '그럴 것 같더라'라고 대답했다.
그날 새벽, 안면이 익은 외과 교수님께 아픈 배를 맡기며
'오! 그래도 일주일은 당직 안 서고 푹 잘 수 있겠다!' 며 심지어는 기쁜 마음으로 사뿐히 수술대에 누웠었다.
그러고보니 대학생 시절, 부모님이 의사인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부모가 의사라 해서 케어를 많이 받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다르게, 웬만한잔병치레에는 '괜찮아 안 죽어' 하며 쿨(?)한 태도를 보이신다고 한다.
이런 차가운 태도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분명 처음부터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트레이닝 과정을 거치면서 환자가 싫어해서, 환자가 힘들까 봐 측은지심에서필요한 (고통스러운) 검사나 치료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힘들어도 필요하면 해야지>라는 가치관이 머릿속의 대들보가 되어판단과 생각의 기준이 된다.
우리 부부의 난임의 원인 중 하나는 정자의 퀄리티였다.
따라서 고환 조직을 수술적으로 채취해서 인공 수정에 쓸만한 정자를 찾아야 했다.(TESE, 정자채취술)
쉽게 말해, 고환을 찢어서 일부를 떼어내야 한다.
라섹 수술 얘기만 꺼내도 바들바들 떨던,
나의 토끼같이 귀여운 겁 많은 남편은
대견하게도 매도 먼저 맞겠다며
가장 빠른 일자로 본인의 고환 수술일 날짜를 잡았다.
의료인이 아닌 남편이, 그것도 고환 수술을 앞두고 느낄 두려움에 나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술? 별거 아니란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나렴' 껄껄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으니남편은 내색은 안 했지만 야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결단코 남편의 몸이라서 이렇게 대하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난자 채취를 위해 아마도 여러 차례 시술을 받게 될 것이다.솔직히, 통증은 걱정 안 된다.
'찌르는데 아프겠지 뭐'라는 건조한 생각만스쳐갔고,
여전히 나의 직장 생활과 난임 진료의 사이의 조율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남편은 시댁에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했다고한다.
남편과 숙제를 하듯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앉아 양가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릴 때 외에는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는, 싹싹하지 못한 며느리인 나는문득 시어머님께 전화가 드리고 싶어졌다.
몇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고,시어머님은 평소와 같이 반가운 목소리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전화를 받아주셨다.
나는 속상하실까 봐 나중에 말씀드리려 했는데,
남편이 이미 얘기했다고 하니 어머님 심경이 걱정되어 전화를드렸다고 말문을 열었다.
어머님은처음 난임을 알게 된 우리처럼, 혼란스러워하고 계셨다.목소리는 평소와 같지만, 혹시라도 남편이 어렸을 때 축구하다가 다쳐서인지,혹은 그가 즐겨 먹는 패스트푸드 때문인지 이유를 찾으려 하고 계셨다.
난임이 되었던 질병이 되었던대부분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요소인유전과 환경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혹시라도 자신이 어렸던 자식을 지키지 못해서, 뭔가를 잘 못 먹여서 그런 것인지 스스로부터 탓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