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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절의 Feb 02. 2024

피할 수 없다면, 즐기진 못해도 그냥 하자.

산부인과 의사의 난임 클리닉 첫 방문기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미래를 계획하는 것을 좋아했다.

운전대를 잡느라 여념이 없는 남편에게 나의 육아관, 교육관을 세뇌시키고자 끊임없이 내 생각을 떠들었다.


넘어지더라도 다친 데 없는지 쓱 확인하고는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울 수 있도록

나의 사랑과 관심을 잔뜩 쏟아붓고 싶었다.


나와 남편이 즐겨하듯,

아이와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찾아

각자가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빌려와

따뜻한 채광이 쏟아지는 카페 테이블에 책을 쌓아두고

맘껏 읽고 싶었다.


거기에다 나의 커리어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는 한 명만 갖겠다며 첫 출산 이후 내가 미레나를 넣겠다, 아니 네가 정관 수술을 하자며  남편과 아옹다옹 떠들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헛물 한 번 시원하게 켰구나 싶다.

난임 부부 타이틀을 거머쥔 지 3일 차,

처음의 충격은 어느 정도 기화되었지만,

내 주변에 우울의 감정이 안개처럼 낮게 깔려있는 기분이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평일 휴무, 눈 뜨자마자 남편과 난임클리닉으로 향했다.

오전 7시 30분 예약이었지만, 그래도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편한 우리는 씩씩하게 난임 클리닉의 유리문을 열었다.


그러 소문으로만 들은 광경이 펼쳐졌다.

초조한 내원객을  안락하게 감싸줄 폭신한 카우치가 이미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넘쳐나는 대기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나머지 공간마저 접이식 간이 의자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리닉 오픈 30분 전부터 이미 사람들이 가득해서 앉을자리를 수색해야 했다.


아마도 대부분은 출근 전에 진료를 받기 위해 오신 직장인 분들일 것이다.

난임 진료 특성상, 정확한 일정을 알 수 없고

그저 매일 내원하여 초음파로 나의 자궁과 난소가 약에 잘 반응하는지 등의 확인을 해야 한다.

직장인들이 그나마 직장에 구애받지 않을 시간인 이른 아침, 난임 클리닉은 문을 연다.


나 또한 다음번 진료부터는 혼자 새벽에 나와서 일찍부터 대기를 할 것이다.

진료가 늦어지면 연신 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보며

혹시라도 나의 진료(의료 공급자로서의 나!)가 늦어질까 봐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아! 겪어보지 않았지만 눈에 선히 그려지는 나의 미래!


나는 모든 걸 내 계획대로 통제해야 하는 피곤한 성격이다.

따라서 시술의 통증과 난소과자극증후군 등의 불편함보다는

혹시라도 직장에 지각을 하지 않을지, 민폐가 되지 않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읽었듯,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직장에서는 유감을 표하고 바로 다음 대체 인력을 구할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시일까!)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나의 가정과 행복이므로 직장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짝사랑은 우선 막아두고,

나와 이름 모를 수많은 난임 동지 여성들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우리, 부디 원하는 대로  잘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첫 진료를 마치고, (내가 산부인과 의사인 건 얘기 안 했다. 난임은 내 전문이 아니기도 하고, 안 물어봤는데 얘기하기 부끄럽기도 하고..)

우리는 바로 남편의 수술일을 잡기 위해 비뇨기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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