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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 중간 어디쯤 Jan 19. 2021

몰래 먹지 못한 팥죽

오전엔 외래가 바빴고

점심시간에 첫째 유치원 선생님과 전화 면담이 있었다. 점심 먹을 타이밍을 놓쳐 그냥 굶어야지.. 하고는 회진을 위해 병동에 갔다.


오늘 바쁘셨나 봐요, 오전에 안 오시고 점심시간 다돼서도 안 오셔서 기다렸어요


매번 반갑게 맞아주시는 보호자분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기다렸다고 하시니.. 뭔가 할 이야기가 있으셨단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하니


짜잔~ 팥죽을 꺼내 주신다.


우와!! 감사합니다!!!

배가 고팠던 상태라 이 만큼만 먹을게요 해놓고선

딱 그만큼을 세 번 더 먹었다.


맛있게  잘 익은 갓김치도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꿀맛이란 말이 딱 맞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그릇까지는 아무 생각 없다가

세 번째 그릇부터는

나도 모르게 계속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손으로 그릇을 살짝살짝 가리게 되었다.


아버님~~ 이거 정말 맛있네요!!

아버님도 드셔야 하는데..

저만 먹어서  죄송해요..


환자분이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많이 먹으란 입모양을 내신다.


루게릭병.

입으로 드실 수 없는 상태라 위에 구멍을 내어 위루관을 통해 식사하시는 그분  바로 앞에서 맛있게 먹으려니 참 마음이 이상했다.

예전에 위루관으로 드시던 다른 환자분의 삼킴 기능이 좋아져서 소원이었던 곰장어를 함께 먹은 적 있었다. 그때에는 환자분도 같이 드셨기에 죄송한 마음이 없었는데..


이 분의 병은

진행하는 루게릭병이다.

앞으로 입으로 드실 수 없을 것 같다..

죄송했다..


참.

배가 채워지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다.


맛있게 먹어줘서 내가 더 고마워요!

말씀하시는 보호자분께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말씀드린 뒤 든든한 배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나를 보며 맛있게 먹으라 하며 지어주신 환자분의 밝은 미소가 계속 떠오른다. 어쩌면 '성인군자'의 미소가 저런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저녁밥은 더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먹을 음식이 있음이

내가 스스로 숟가락질할 수 있음이

입으로 맛을 느끼고 음식을 삼킬 수 있음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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