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대만 알고 묘봉은 모르는 당신을 위해(2023-10-22)
가을산행은 단풍과의 숨바꼭질이다.
설악을 기점으로 남하하는 단풍 전선이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다.
오늘 Y대장의 선택은 속리산, 그런데 문장대도 천왕봉도 아니고 묘봉이란다.
이름도 높이도 당당한 천왕봉(1,058m), 문장대(1,028m)에 비하면 874m의 아담한 키로 속리산 산봉군의 막내 격이다. '기묘하게 생겼다' 해서 묘봉, 산 이름의 유래란다. 막둥이라고 깔보면 안 될 것이, '묘한' 이름처럼 기암절경을 이루는 3개의 암봉들 [875봉, 상학봉(862m), 830봉]을 거느리고 있다.
천안서 멀지 않은 곳이라 모처럼 여유 있게 아침 9시에 출발했다. 내비에 '속리산 상학봉 등산로주차장'을 찍고 길 건너 묘봉두부마을 식당을 지나니 탐방안내소가 보인다. 막 지나가는데 관리인 아저씨가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산행을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나... 여차저차 인명록을 작성하고 나니 손등에 파란 도장을 찍어 준다. 송이철이라 마을 주민들이 민감하니 탐방로 밖으로 나 다니지 말란다.
운흥 1리 마을회관을 지나니 멀리 낙타 등 같기도 한 봉우리가 보인다.
'정말 묘하게 생겼군.'
시월 말, 등산에 최적화된 날씨다.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도 상쾌하다.
숨차게 오르막을 올라도 시원한 바람에 등이 뽀송하다.
'남이 많이 가는 길'에 알레르기가 있는 베테랑 Y대장은 거미줄이 착 감기고 심심할만하면 암벽이 막아서는 난코스를 택했다. 대신 너른 바위 위나 조망 좋은 곳에선 충분한 휴식을 선사했다.
거의 수직 직벽인 토끼봉이 바로 머리 위다.
의지할 데라고는 부실해 보이는 밧줄 한 가닥 뿐.
동호회 최고령이지만 젊은날 암벽을 탔던 K회장님이 대표로 밧줄을 힘있게 잡았다. 나머지는 조망보다 안전을 택했으니...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토끼봉 아래 너럭 바위위에서 마트에서 사 온 단팥빵, 샤인머스캣, 사과대추, 귤 등 각자 챙겨 온 간식을 나누며 '가을날의 소풍'을 만끽했다.
머리를 드니 구름이...
일행들과 보온병 속 따뜻한 커피물을 나누었다.
'이런 경치에 음악이 빠질 순 없지 않은가..'
바위에 대자로 누워 폰에 담아둔 O Mio Babbino Caro를 Maria Callas의 목소리로 들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https://youtu.be/uFLVKaFVGag?si=4eJ0FcAQJWJBcbiX
낙타모양의 봉우리는 오르내림이 심하다는 뜻.
상학봉(862m)을 지나는 길 독서대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수능대박 날듯!
몇 번의 오르내림 끝에 암릉을 거쳐 드디어 묘봉에 이르렀다.
거대한 바위가 솟아 봉우리를 이룬 묘봉은 그 품이 넓다. 어른 10여 명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넓이이다.
묘봉에 올라 동남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묘봉의 모산, 속리산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음봉(983m), 문장대(1028m), 문수봉(1018m), 신선대(1028m), 입석대(1012m), 비로봉(1008m), 천왕봉 등 속리산 7개의 연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올 가을이 가물었나? 단풍이 제대로 물들기도 전에 말라버린 듯... 아쉬웠는데, 하산길엔 계곡 곳곳이 울긋불긋하다. 시월 중순 속리산 묘봉에서 산꾼과 단풍의 숨바꼭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이다.
놀멍 쉬멍... 여유 있게 하산하니 점심시간이 한 참 지나 쪼로록 소리가 난다.
먹거리에 진심인 Y대장의 선택은 '문경식육식당'
삼겹살과 가브리살을 주문하고 나니 '착한 가격'의 등심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도마에 실려 오는 고기를 보니 한 발 늦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넘의 살'을 맛나게 흡입.
귀가길, 토끼봉을 못 오른 것이 살짝 아쉽다.
'멈춤을 배움'도 산에서 배우는 지혜려니, 마음을 달래본다.
* 묘봉 정상에 이르기 전 돌무더기를 쌓아 세워놓은 비목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77년 9월, 대한민국을 세계 여덟 번째 에베레스트(8,848m) 등정국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자 1979년 아메리카 대륙 최고봉 데날리(6,194m)봉 등정 후 하산하다 사망한 산악인 고상돈(1948∼1979)을 추모하는 비라는데, 청주태생인 고상돈이 평소 즐겼던 산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