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군락지, 비슬산 탐방기
'참꽃이 진달래였군!'
그럼 다른 꽃은 모두 가짜꽃인가?
괜한 어깃장을 놓으려다, 울 엄니가 제일 좋아하는 진달래더러 '진짜' 꽃이라니 급히 철수.
여전히 소녀 같은 울 엄니는 해마다 이맘때면 꽃잎을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말을 거신다.
"이쁜 것.. 춥고 긴 겨울을 어찌 견디었누...."
소월 덕분에 '이별과 정한(情恨)'의 상징이 되었지만, 본래 진+달래의 진(딘)은 '밝다, 맑다'란 뜻이라니 그대로 풀면 "밝고 고운 꽃"이다.
비슬산(琵瑟山), 해마다 4월이면 전국의 산악회들이 앞다투어 찾는 참꽃(산달래)의 명소다.
산 이름도 이쁜데, 한자마저도 이리 멋지니 검색의 유혹을 참을 수 없다.
琵(비) + 瑟(슬): 둘 다 고대의 현악기 이름입니다. 비(琵)는 비파를, 슬(瑟)은 슬 또는 슬기라고도 불리는 25현의 고대 현악기를 의미합니다. 비슬산(琵瑟山)은 두 악기가 조화를 이루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산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형태가 현악기의 곡선과 유사합니다.
순우리말인 ‘비스듬하다’, ‘비스리하다’ 같은 말에서 ‘비슬’이 유래되었고, 이는 산의 경사나 능선 모양이 부드럽고 비스듬한 형태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비슬산이 오래전부터 수행의 장소로 쓰였고, 고요하고 맑은 선율, 즉 마음의 평온함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비슬’이 붙었다는 불교적 해석도 있습니다.
새벽 6시 천안 출발, 현풍의 원조 할머니 곰탕집에 도착하니 8시 40분, 9시까지 기다려 오픈 런으로 식당문을 열고 들어가 곰탕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유가사를 들머리로 도성암-도통바위-천왕봉(정상)- 참꽃군락지(대견사)를 거쳐 자연휴양림에 이르는 10km 코스. 얼마 전 경북지역의 대규모 산불로 참꽃 축제는 취소되었고, 대부분의 등산로가 통제상태인데 유일하게 열린 길이다.
우울 산행기
아뿔싸.. 들머리부터 운무가 가득, 시야가 좋지 않다.
정오쯤엔 개인다는 예보를 믿고 가쁜 숨을 고르며 오르고 또 올랐다.
등산 간절기인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즉각 신호를 보낸다. 숨이 떡까지 차고 무릎이 후덜덜한 고뇌와 인고의 시간들.
정상(천왕봉 1,084m) 근처에 이르러도 태양은 간데없고 안개비가 내린다. 전국에서 몰려온 산꾼들로 정상석 주변은 인산인해. 다시 능선길을 내달아 드디어, 참꽃군락지에 이르렀지만 시야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간간이 보이는 참꽃 군락들도 꽃샘추위로 냉해를 입어 기대에 못 미쳤다.
"우리 집 마당에 꽃이 한가득인데, 멀리까지 와서 겨우....." 어느 분의 푸념이 귓전을 스친다.
맞는 얘기다.
새벽잠 설치고 3시간여를 달려와, (유명세에 비해) 그렇고 그런 곰탕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운무 때문에 풍광도 별로고, 등산로는 인산인해, 냉해로 인해 피다 말아버린 참꽃군락지..... 차라리 동네 산이나 오를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맘이 어두워졌다.
"곰탕 먹고 곰탕 구경만 하다 가게 생겼군....ㅠ"
행복 산행기
작고 여린 노랑이 눈에 '화악' 들어왔다.
풀숲에 숨은 노랑제비꽃의 앙증맞은 자태를 확인한 순간, 잠시 어찔, 죽비로 정수리를 세게 맞은 듯했다.
'뭘 그리 바라는 게 많노...'
지난 주말까지 비에 우박에 꽃샘추위에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달성군은 17-23도, 덥지도 춥지도 않은 산행에 최적인 온도다. 여기에 구름을 머금은 공기가 천연 가습기 역할을 해 주어 갈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막 싹을 틔운 여린 잎들이 내뿜는 날 것 그대로의 산소가 폐포를 가득 채운다.
산행 내내 펼쳐진 운무 속 연두와 초록들은 그대로 모네의 수채화 연작이다.
장엄하게 펼쳐진 참꽃들의 군무 대신, 냉해 속에서도 늠름한 참꽃잎 한송이에 올올히 맺힌 크리스털 물방울들을 오래 드려다 보았다.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발터 벤야민의 속 깊은 경구를 살짝 비틀어본다.
"아무 기대 없이 산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산을 제대로 안다."
이유나 조건 따위없이 오롯히 대상, 그 자체가 이유인 사랑,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어떠한 오해나 편견없이 오래 사랑할 수 있다. 불안을 잠재우고 평안을 가져오는 예측 가능함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는 데서 비롯된다. 사랑의 상호성, 댓가성에 대한 기대나 희망 이전의.
20대 연예시절 아껴가며 읽었던 막스 뮐러의 고전 『독일인의 사랑』은 그런 사랑에 관한 훌륭한 텍스트였다.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하지?” 그녀는 이 결정적인 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냐고?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봐. 들에 핀 꽃에게 왜 피었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왜 햇빛을 비추냐고 물어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내가 산을 사랑하는 이유도 그러하기로 했다.
조망도 날씨도 바쳐주지 않고, 즐길거리 하나 없어도 그럴 수밖에 없기로. 한걸음 한걸음 옮길 때마다 땀구멍이 열리고 심장이 터질 듯한, 어느새 산과 나의 경계가 아득해지는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은 오롯이 내 것 아닌가!
* 여느 때처럼 글 중 사진은 CJ산악회 사진첩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퍼다 썼음^^